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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8화 (8/211)

검을 든 꽃 8화

잊고 싶은 기억들이라 해도, 그것들을 잊었다간 회귀한 의미를 잃는다. 기억을 유지하면서 마검을 버려야 한다. 저 검이 있는 한 그녀가 원하는 ‘행복한 삶’은 무리였다.

마검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잘 봉인할 수 있는 곳, 다른 기오사를 얻을 수 있는 곳. 그녀가 아는 한 그 두 가지가 가능한 장소는 대륙에 하나뿐이었다.

도시 아젠카, 창천기사단.

결국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하나. 그녀로 인해 몰살당했던 땅. 유리엔이 지키는 땅. 그녀가 유리엔을 죽였던 땅. 아득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던 에키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발.”

[아, 좀, 그렇게 줄여 부르지 말라니까. 품위가 없잖아, 품위가!]

“내가 기오사 오너라서, 시간을 되돌렸는데도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거랬지?”

[어. 왜?]

“……그럼, 다른 기오사 오너들도 예전 일들을 전부 기억한단 소리야?”

그녀가 죽인 기오사 오너는 네 명이었다. 아젠카의 시민들을 구하려다 목이 잘렸던 부단장 바론. 디트리히가 도망치도록 그녀의 발목을 잡다 죽은 테레사. 하룻밤 동안 끈질기게 달아나다 결국 살해당한 디트리히. 그리고 눈을 감지도 못했던 유리엔.

그들이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그 가정에 목이 바짝 탔다. 손발이 차게 식었다.

[글쎄, 모르지.]

“확실하게 말해!”

[모른다니깐? 나처럼, 자아가 깨어나야 유지된단 말이야. 걔들이 자기 기오사의 자아를 깨웠을지 못 깨웠을지 내가 어떻게 아냐?]

“……만약 깨웠다면?”

[다 기억하겠지, 뭐.]

마검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에키는 밀랍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늘어진 손이 침대의 시트를 구겨지도록 움켜쥐었다.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어?”

[아, 모른다니까? 기오사마다 자아가 깨어나는 조건이 다르다고.]

“닥치고 어떻게든 생각해 내. 당장.”

에키의 눈이 가라앉았다. 마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바르데르기오사는 그녀가 얼마나 집요한지 너무나 잘 알았다.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아니, 진짜로 모른단 말이야! 기오사끼리 무슨 동창회를 여는 것도 아니고! 깨어나는 조건도 죄다 다르고, 깨어나 놓고서도 입도 뻥긋 안 하고 지가 보통 검인 척하는 놈도 있는 판에, 그걸 어떻게 알아!]

마검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정말로 모른다는 소리였다. 시트를 쥔 에키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니까 기오사 오너들이 기억할지 기억 못 할지는 알 수 없는 거네. 그럼…… 기억한다고 가정하고 행동해야겠지.’

절로 신음이 나왔다.

기오사 오너들은 각자가 죽은 이후의 일들을 당연히 모르겠지만, 죽기 전까지의 기억만 해도 그녀를 죽이려 들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래도 이대로 로아즈 백작가에서 살면 그들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사는 세계가 너무나 달랐으니까.

문제는 저 빌어먹을 마검을 대신할 다른 기오사를 얻으려면 창천기사단으로 가야 한다는 점이다. 네 명의 기오사 오너가 모두 모여 있는 그곳으로.

마검의 주인이란 걸 들켜서, 싸우게 되어도 그녀는 다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간신히 되찾은 가족들이 있었다. 그녀가 싸우게 되면 창천기사단이건 제국이건 로아즈 백작가를 내버려둘 리가 없다.

그러니 절대로, 그녀가 마검의 주인이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한 번 봐주었다가 몰살당한 그들이 그녀를 또다시 믿어줄 리가 없었다.

‘……유리엔이라면, 믿어줄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가, 에키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순간 검을 맞대기 전에 보았던 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금이 간 것처럼 보이던 하늘색 눈동자. 가슴께가 욱신 아려 왔다.

‘미쳤구나, 에키네시아. 그렇게 그를 배신하고도, 그가 다시 믿어줄 거라 생각하니? 날 알아보자마자 칼을 휘둘러도 할 말이 없는데.’

에키는 헛웃음을 흘렸다. 질척한 무언가가 발목을 타고 오르는 것 같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 우울함을 털어냈다.

마검을 극복하고, 기오사를 모으면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집중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최우선 목표는 마검을 대신할 다른 기오사를 얻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마검을 처리한다.

그러려면 창천기사단 본부에서도 가장 깊고 엄중한 곳에 있는 ‘기오사 홀’에 들어가야 했다. 주인 없는 기오사들을 봉인하고 보관해 두는 이 방은, 딱 세 가지 경우에만 열린다.

첫째, 행방이 불분명하던 기오사를 발견하여 보관하게 될 때.

둘째, 기존 기오사 오너가 사망 또는 은퇴하며 기오사를 반납할 때.

셋째, 창천기사단의 정식 기사에게, 기오사를 선택할 기회를 줄 때.

세 번째 경우가 어느 나라에 가든 대우받을 마스터급 기사들이 창천에 소속되길 열망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창천기사단의 기사가 되면 기오사를 얻을 기회가 주어진다. 그 기회를 통해 기오사 오너가 되는 자는 극소수였지만 어쨌든 기회 자체는 공평했다.

‘가능한 건 첫 번째랑 세 번째. 가능이야 해도, 첫 번째는 당연히 기각이고.’

행방이 불분명하던 기오사, 즉 바르데르기오사가 그녀의 손에 있긴 했다. 하지만 마검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기오사 오너들이 회귀 이전의 기억이 없다고 가정해도, 마검을 가지고 있다고 알리는 건 너무 위험했다.

주인 없는 마검을 그냥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그녀가 주인인 상황이니까.

주인임을 감추는 것도 무리였다. 마검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즉시 그녀는 회귀 이전의 기억들을 잊어버리므로.

‘기오사 홀에 몰래 들어가는 건…… 쉬운 일도 아니고, 성공해도 평생 창천기사단을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결국 방법은 하나야.’

창천기사단의 기사가 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기오사를 얻을 수 있다. 다른 기오사를 얻은 다음, 바르데르기오사를 버리고 주인이 없는 마검을 어딘가에서 발견한 것처럼 보고하면 된다. 창천기사단은 누구보다 확실하게 마검을 봉인해 줄 것이다.

‘그래, 마검의 주인인 걸 들키지 않고, 창천의 매가 되어서 기오사 홀에 들어가는 것. 이 방법밖에 없어. 예전에 모아봤던 기오사들이니 들어가서 아무거나 고르면 돼.’

창천의 매가 되는 건 걱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기오사 오너들에게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에키는 옆에 놓인 바르데르기오사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검에 물들어 있는 동안 그녀는 내내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었다. 흑발 흑안으로 타고난 사람과는 달리 기괴하게 일렁거렸지만 원래의 색을 짐작하기 어려운 상태였던 건 확실하다.

온몸에 검은 얼룩이 있었고, 피와 먼지와 땀으로 더러웠다. 움직이기 편한 차림, 거의 넝마 같은 옷에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쥐어뜯긴 것처럼 잘리거나 엉켜 있었다.

가족이라 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버렸었다. 꼼꼼히 살펴보면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마주친 사람을 살려놓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생존자가 거의 없어서 외모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키리에 제국, 로아즈 백작가의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마검을 든 악마였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기오사 오너들도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다. 악마의 정체는 공식적으로 불명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그녀는 흔하지 않아서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분홍색 머리카락에, 신분이 확실한 귀족영애였다.

‘가능해. 숨길 수 있어.’

그저 귀족영애 에키네시아 로아즈로만 보이면 된다. 에키네시아 로아즈와 마검의 악마 사이에는 연결점이 없다. 최악의 경우, 기오사 오너들 모두가 기억이 남아 있다 해도, 마검을 쓰던 시절을 연상시킬 만한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

‘흐트러지거나 더러운 꼴을 피하고,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지도 않고, 화장까지 하고 있으면 더 알아 보기 어렵겠지. 그때와는 너무 다르니까.’

검술도 물론 그 시절과 다른 모습을 보여야 했다. 악마이던 시절보다 그것을 극복한 지금이 더 강하므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사가 늘 귀족영애처럼 차려입거나 화장을 하고 다니는 건 쉽지 않았다. 누가 봐도 불편한 일을 고수하면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맨얼굴을 보이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고. 가면을 쓰고 다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아예 눈에 안 띄는 건 처음부터 무리다. 사관생도 시절이야 대충 묻혀 지낸다 해도, 최단기간 기사 서임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면 모두가 그녀에게 관심을 쏟아부을 터다. 유리엔이 온갖 티타임의 화젯거리가 되었듯이.

그렇다고 눈에 띄기 싫다는 이유로 3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3년도 충분히 길었다.

남장? 확실한 신분을 두고 가짜 신분을 만드는 수상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남자로 보이기도 어려웠다. 몸매도 얼굴도 지극히 여성스러운데다 가슴이 꽤 큰 편이라 압박붕대로 어떻게 될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려한 치장으로 다니는 게 제일 나았다. 적당한 이유만 있으면. 고심하자 의외로 꾸미고 다니면서도 의심받지 않을 방법은 쉽게 떠올랐다.

‘성격이 원래 그런 걸로 하면 돼. 까탈스러운 아가씨. 더러워지는 건 질색, 땀에 젖는 것도 질색, 치장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질색, 훈련복같이 후줄근한 건 절대 안 입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회귀 이전에는 내내 대충 다녔지만 에키는 치장을 즐기는 편이었다. 게다가 마검과 얽히기 전의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까다로운 귀족 영애 그 자체였다.

옷차림을 때와 장소에 맞추는 상식만 잠깐 포기해 주면 된다. 검을 다룰 때 여러모로 불편하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마검 문양 때문에 늘 장갑을 껴야 할 테니까……. 장갑을 벗지 않는 이유도, 손이 상하는 게 싫어서라고 하면 되겠네.’

보통의 기사단이면 용납되지 않겠지만, 창천은 가능하다. 기본적인 기사도와 창천의 의무만 지키면 세세한 것들에 참견하지 않는다. 하나하나가 마스터급 강자에 국적도 다양하다보니 군기가 느슨한 편이었다.

옷차림 정도로는 기사가 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실력은 지나치게 넘쳐서 적당히 숨겨야 할 판이니.

그녀는 부풀린 패티코트에 하이힐을 신고도 기오사 오너 하나 정도는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그녀의 기오사인 바르데르기오사를 사용하지 않는 상태로.

예전만큼 몸이 단련되어 있지 않아서 그 오너가 유리엔이라거나 두 명 이상이면 바르데르기오사를 써야겠지만.

악마적인 재능을 피로 점철된 세월을 통해 갈고닦은 결과물이었다.

평범하던 귀족가의 아가씨가 검술이 뛰어난 점은, 예전부터 혼자서 몰래 연습했다고 대충 둘러대면 된다. 독학으로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고 의심하면 천재라서 그렇다고 우기면 되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은, 이상한 성격의 천재 기사가 되는 거다.

낭만소설에서도 안 나올 법한 기가 차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 설정이었다. 바로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어이가 없고 황당한 상대를 마검의 악마와 연결 짓기는 어려울 테니까.

‘좋아. 욕은 신나게 먹겠지만 의심은 안 받겠네. 뭐, 욕쯤이야 그 시절에 들었던 원한 서린 말들에 비하면 귀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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