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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7화 (7/211)

검을 든 꽃 7화

그녀는 이를 악물고 꾸러미를 접어 챙겼다. 그사이 그들은 에키의 개인 욕실에 도착했다.

“일단 씻고 나오세요, 옷을 준비해 둘게요. 아침은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면 식당에서 함께 드시겠어요?”

“함께라니, 누구와?”

“당연히 주인님, 마님, 도련님이시죠. 아가씨가 자주 늦잠을 주무시니 함께 드시려면 주방에 미리 알려줘야 해요.”

“주인님, 마님, 도련님이면……. 부모님? 내, 부모님? 란셀이랑?”

“그럼 다른 부모님이 있나요? 오늘 아가씨 이상해요.”

“부모님……이라고.”

“어쨌든 함께 드시겠다는 거죠? 주방에 말하러 다녀올게요.”

“으응…….”

그녀가 멍하니 대꾸하자 노라가 주방으로 떠났다. 에키는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욕실에는 커다란 전신거울이 있었다. 얼룩 한 점 없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스무 살의 에키네시아 로아즈가 거기에 있었다. 앳되고, 피에 젖지도 않았고, 상처받지도 않은 자신이.

죽지 않은 노라가 죽지 않은 부모님과 남동생을 입에 담았다. 함께 식사를 하실 거냐고 물었다. 그 평범한 물음이 미어지도록 와 닿았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다 살아 있어. 정말로.”

심장이 부서질 듯 뛰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키는 서 있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 앉았다.

살려냈다. 해냈다. 바뀌었다.

그녀가 알던 3월 17일의 아침과 달리 모두가 살아 있는 아침으로.

악몽 같았던 6년과 제대로 쉬지도 않고 기오사를 모으기만 했던 9년의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떠올랐다. 피에 젖고 검게 물든 악몽들. 처절한 발버둥과 뚜렷한 고통들.

그러나 결과를 앞두자 그 모든 기억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감격과 안도가 왈칵 치밀어 올라 한동안 심호흡을 했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서 손으로 몇 번이나 문질렀다. 눈물이 솟아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운 흔적이 있으면 다들 걱정할 테니까.

걱정한다니, 이건 또 얼마나 달콤한 현실인지. 그녀는 자신을 걱정해 줄 사람을 모조리 잃은 지 너무 오래 되었다. 다 잃었다가, 기적처럼 얻었던 한 명도 자신의 손에 죽었으니까.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그녀를 올곧게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 그녀의 손에 죽어가면서 감지도 못했던 눈.

‘그 사람도…… 살아 있겠구나.’

만나고 싶다. 보고 싶다. 내가 마침내 해냈다고, 당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괜찮다. 모르는 게 나은 기억이니까. 아니, 그녀가 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몰라야만 했다. 에키는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다 손바닥의 문양이 눈에 들어와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데 가장 큰 악몽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걸 어쩌지.’

일단 문양이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장갑을 끼는 게 가장 간단할 것이다.

빠르게 씻고 나와서 얇은 실크 장갑을 찾아 끼고 나니 때마침 노라가 들어왔다. 노라는 그녀에게 연보랏빛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파티용이 아니라 일상용이었으나 무척이나 오랜만에 입는 드레스였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매끄러운 옷감을 문질러 보았다. 거미줄처럼 섬세한 레이스도 한 번 쓸어보았다. 예쁘고 부드럽고 화려했다. 걸음을 옮길 때 나풀거리는 옷자락이 좋았다. 기분이 들떴다. 정말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라서.

함께 식당으로 향하던 노라가 그녀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아가씨. 아까는 좀 이상하셔서 걱정했는데.”

“나, 좋아 보여?”

“네, 웃고 계신 걸요.”

“웃고 있다고?”

에키는 입가를 만져보았다. 절로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느껴졌다. 몇 년 만에 웃는 건지 모르겠다. 주체할 수 없이 기분이 들떴다.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숙녀는 경박하게 웃지 않는 법이란다, 에키.”

등 뒤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키의 걸음이 뚝 멎었다. 노라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주인님, 마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노라. 에키, 일찍 일어났니?”

“오랜만에 딸과 함께 아침을 먹겠구나.”

다정하게 인사한 로아즈 백작 부부는 그녀를 지나쳐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미 도착해 있던 란셀이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훈련 후에 씻었는지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예법에 엄격한 백작부인이 그걸 가볍게 지적하고, 란셀이 머쓱하게 머리를 가렸다.

백작은 니콜이 내일쯤 저택에 도착할 예정이란 이야기를 꺼냈다. 니콜은 로아즈의 후원을 받는 마법사로, 수도의 마탑에서 일하면서 휴가 때면 자주 로아즈 영지에서 머물곤 했다. 에키나 란셀과는 남매처럼 친밀한 사이였다.

란셀이 오랜만에 니콜 누나를 보는 게 기대된다며 웃었다. 백작부인도, 백작도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차례로 입구에 서 있는 에키네시아를 바라보았다.

“누님, 잠이 덜 깨셨어요?”

“에키, 뭐 하니?”

“들어오렴.”

아침 햇살이 식당의 유리창으로 한 가득 쏟아졌다. 그 빛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가족들이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에키는 어느 순간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인형에 혼이 들어오듯,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눈꺼풀의 어둠이 스치고 지나가도 가족들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환상도 꿈도 아니다. 현실이었다. 그녀는 목이 메여 간신히 대답했다.

“네.”

저미도록 그리워했던 풍경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동자 가득 그 풍경을 담았다. 그녀가 결국 되찾은 풍경이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킬 삶이었다.

그러니 마검 따위가 간신히 되찾은 이 삶을 망가뜨리게 내버려두진 않겠다.

그녀는 오른손을 꽉 움켜쥐고 걸었다. 한 걸음씩, 가족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가슴께가 뻐근 했다. 에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너무나도…….”

“응? 어제도 봤잖느냐.”

“누님이 이상하게 일찍 일어나더니 아직도 꿈속인가 봐요.”

“나쁜 꿈이라도 꿨니, 에키?”

부모님과 남동생이 한마디씩 건넸다. 에키네시아는 붉어진 눈매로 환하게 웃었다.

“네, 아마도 전, 나쁜 꿈을 꿨었나 봐요.”

* * *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문학 선생과 춤 선생이 오늘 실수가 잦다고 야단을 쳤지만 하나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며칠 전에 가르친 걸 까먹은 학생일 테니, 화낼 만도 했다. 물론 에키 입장에선 15년 만에 듣는 수업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지루하던 수업이 내내 즐거웠다. 꾸중을 들어도 마냥 좋았다.

그렇게 되돌아온 첫날이 저물었다. 에키는 노라가 등불을 끄고 물러난 후에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며 가만히 기척을 느꼈다. 그녀는 노라가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등불을 켤 필요는 없었다. 커튼을 열어 달빛을 맞아들였다. 그 정도 빛으로도 그녀는 대낮처럼 주위를 볼 수 있었다.

에키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종일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잘 때도 낄 수는 없어서 노라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고생했다. 그녀는 검은 얼룩 같은 문양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문양에서 유리처럼 투명한 검신이 솟아올랐다. 장식용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정갈하고 아름다운 검. 그러나 이건 수천수만의 피를 먹은 마검이었다. 에키는 서늘한 눈으로 검을 응시했다.

“발.”

마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잡이를 움켜쥔 채 검을 가로로 눕혔다. 손에 마나를 휘감고 문양 위를 후려쳤다.

[아! 아! 야! 좀 곱게 깨워!]

“일어났네.”

그녀는 검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회귀 이전 9년간 그녀와 함께했던 바르데르기오사는 험한 취급에 익숙했다. 마검이 툴툴거렸다.

[피곤해 죽겠는데 주인이란 인간은 괴롭히기만 하고…….]

“말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든 모양이고, 설명해.”

[뭘.]

“왜 네가 여전히 나한테 붙어 있는지, 설명하라고.”

[당연하지. 시간은 되돌아갔지만, 네 영혼은 예전 그대로니까. 그리고 난 네 혼에 박힌 기오사고.]

“내가 모은 기오사는 열 개인데? 너 말고 다른 기오사들은?”

[모으긴 했어도 넌 그것들의 자아를 깨운 적이 없잖아. 자아까지 깨워야 진짜 주인이 된단 말이야. 어쨌든 그래서 네 영혼에 새겨진 건 나 혼자고, 영혼이 그대로면 당연히 나도 그대로인 거지.]

바르데르기오사는 한심하다는 듯 종알거렸다. 에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마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야, 네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것도 기오사 오너라서야. 나 아니면 넌 다 까먹고 아무것도 모르는 예전의 스무 살짜리가 될 걸? 오, 그럼 너 또 나한테 잡아먹힐 수도 있겠네.]

“잠깐.”

에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말대로라면, 설마.

“널 버리면 내가 다 잊어버린단 소리야? 회귀 전의 기억들을?”

[나 말고 다른 기오사가 있으면 그 놈 덕분에 유지되겠지만, 하나도 없으면 까먹겠지. ……근데 주인아, 진짜 나 버리고 싶냐?]

그 질문은 약간 풀이 죽은 느낌이었다. 에키는 그런 마검의 태도에 비웃음을 띄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정한 인간…….]

그녀를 학살하게 만든 껍데기와 저 자아가 다르다고 해도, 저건 근본적으로 마검이었다. 그걸 9년간 기오사를 모을 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바르데르기오사는 살육의 검. 대장장이가 인간의 살의와 악의를 재료 삼아 만든 검이다.

무해한 듯 굴어도 방심할 수 없었다. 방심하면 저 검에 물들어 그녀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싶어지니까. 그 때문에 실수했던 적도 있다. 회귀 이전, 기오사를 모으던 시절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에키는 지긋지긋한 표정으로 마검을 노려보았다.

자아를 깨웠건 말았건, 스스로 기오사를 포기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자마자 버릴 수도 있었다. 아무데나 저걸 버렸다간 또 누군가가 조종당할까 봐 일단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기억의 유지.

마검은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징징거릴지언정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른 기오사를 얻을 때까지는 못 버린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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