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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6화 (6/211)

검을 든 꽃 6화

에키는 연무장에서 벗어나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의 15년 만에 보는 정원인데도 익숙하게 구조가 생각났다. 그것이 눈물이 나게 기뻤다.

‘이 빌어먹을 것만 아니면 마음 편히 이 감동을 누렸을 텐데.’

에키는 손바닥의 검은 문양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찾기 어려운 깊숙한 곳, 키 큰 측백나무들이 빽빽한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그것으로도 불안하여 무성한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땅을 박차고 한 번, 공중에서 몸을 틀어 나무 기둥을 밟고 한 번, 가지를 밟고 한 번 더. 딱 세 번 뛰어오르자 까마득한 꼭대기 근처의 나뭇가지에 착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굵은 가지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뚫어져라 보며 입을 열었다.

“……발. 대답해.”

[이이름 조음 제대로 불러어. 이 몸으은 바르데르으기오사다아!]

술 취한 주정뱅이마냥 꼬부라지는 음성이 그녀의 혼을 울렸다. 대답이 없길 바랐는데. 익숙한 마검의 감각에 에키는 사정없이 얼굴을 찡그렸다. 전혀 반갑지 않다.

“그건 뭔 등신 같은 말투야?”

[히임 들어어서. 야, 시간이 움직였느은데. 그러니까, 나 좀 잔다아.]

“아니, 자지 마. 그러니까 시간을 돌렸는데, 왜 네놈이 아직 내 손에 붙어 있냐고!”

[다앙연한…… 일이지이…….]

“야, 설명하고 자! 야! 야! 이 망할 마검이!”

흐물흐물거리는 음성을 마지막으로 마검 바르데르기오사의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에키는 손바닥을 붙들고 소리를 지르다가, 짜증스럽게 손을 내뻗었다. 그녀의 의지를 따라 검은 문양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기오사 시리즈는 대체로 주인의 혼을 검집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렇게 언제든 빈손에서 기오사를 뽑아내는 게 가능했다. 보통은 장점이지만, 에키에게는 지긋지긋한데 떨어뜨릴 수조차 없는 저주에 가까웠다.

“일어나, 발.”

그녀는 검은빛의 자루를 쥔 채 매끈한 검날을 툭툭 쳤다. 문양을 두드리고 마구잡이로 흔들다가 결국에는 때릴 목적으로 손에 마나를 모았다.

“어……?”

칼날을 형성하려던 마나가 뭉치지 못하고 스르륵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통증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쥐가 내린 것 같은 감각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짧게 신음한 에키는 금방 원인을 알아차렸다.

“내 몸……. 이렇게 약했었나?”

단련이 전혀 되지 않은 몸으로 예전처럼 움직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마스터급 기사라면 누구나 형성하는 마나 코어조차 없는 상태인데 억지로 마나까지 사용했으니까.

애초에 불가능했을 일을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이르렀던 정신이 자연스럽게 저질러 버렸다.

몸을 점검한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찻잔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도 없는 몸뚱이. 고작 이 정도 움직였다고 보드라운 발바닥은 벌써 뜨끈뜨끈했고 근육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강제로 마나를 받아들인 몸에서는 열이 오른다.

그야말로 곱게 자란 백작 영애 그 자체였다.

“일단 코어부터 만들어야겠네.”

무슨 상황이든 힘이 있는 편이 없는 편보다는 확실하게 낫다. 그녀는 내친 김에 지금 해버릴 작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눈을 감고 집중하며 마나를 움직였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금세 몸 안의 마나가 한 곳에 모이며 주위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명치 근처에 자연스럽게 고이더니 마나 코어가 형성되었다.

갓 만들어진데다 축적된 마나가 별로 없어 연약했지만 분명한 코어였다. 마스터에 이른 기사들이 만들어 내는 몸 안의 마나 저장고, 평생을 노력해도 만들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그것이 10분도 되지 않아 만들어졌다.

그녀에겐 간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에키는 그것을 만들며 딴생각을 했다.

‘역대 최연소 마스터가 유리엔 단장이었지. 스물세 살 때였나? 스물세 살도 그렇게 떠들썩했는데 내 나이가, 지금이 1629년 3월 17일이랬으니까……. 스무 살이네. 마스터라는 건 일단 숨겨야겠다.’

그러다 그녀는 불현듯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신력 1629년 3월 17일…….”

란셀이 알려준 오늘 날짜. 기억하고 있는 날짜였다. 에키는 신음을 흘리며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마검을 얻게 된 건 15년 전의 3월 17일 새벽이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되돌린 지금 기준으로는 오늘 새벽. 그건 그녀의 생에서 가장 끔찍한 새벽이었다.

회귀 이전 1629년 3월 17일 새벽,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에 에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따뜻한 우유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지금의 그녀를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지만, 그때의 에키네시아는 우유 한 잔도 제 손으로 데워 먹을 줄 모르는 아가씨였다. 에키는 침대 옆의 줄을 당겨 전속하녀인 노라를 깨웠고, 우유를 데워 오라고 시켰다.

우유를 데우러 나간 노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에키는 잠옷 위에 숄만 걸친 채 방을 나와 직접 주방으로 내려갔다.

짜증스럽게 하녀의 이름을 부르며 주방의 문을 열었었다. 그런 그녀를 맞이한 것은 마검을 쥔 노라였다.

어떻게 노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등불 없는 어두운 주방, 창 밖에서 스며들어온 달빛에 어슴푸레하게 드러나던 윤곽, 흔들리던 시야, 비명, 투명하게 빛나던 검날, 그런 것들만 기억에 남았다.

결과는 확실히 기억한다. 노라가 그녀를 찌르려다 넘어졌고, 에키는 살기 위해 노라가 떨어뜨린 검을 쥐었다. 까맣고 차갑고 매끄럽던 검의 손잡이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을 쥔 순간 그녀는 뱀 같은 감촉이 전신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 꼈다. 그 감촉이 이끄는 대로, 덤벼 드는 노라에게 칼을 찔러 넣었다. 그게 에키의 첫 살인이었다.

그 뒤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끔찍한 새벽 이후 아침에는, 저택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에키네시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지금의 3월 17일 아침에는 평소처럼 정원사가 정원을 손질하고, 란셀이 가문의 기사에게 훈련을 받고 있었다.

“달라졌어……. 어떻게 바뀐 거지?”

에키는 이마를 짚었다. 회귀 전과 완전히 달라진 아침. 그러나 손에는 여전히 마검이 있다.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노라. 노라를 확인해 봐야 해.’

그녀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 마음이 급해졌다. 에키는 나무에서 뛰어 내렸다. 몸 곳곳에 있던 통증은 갓 형성된 코어에서부터 마나가 흐르기 시작하자 금세 사라졌다.

그녀는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저택의 1층 외곽에 있는 주방은 신선한 식재료를 매일 공급받기 때문에 뒤뜰 쪽으로 난 문이 있었다. 아침이라 마침 배달을 왔는지 배달원과 하녀가 문간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에키를 발견한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가씨? 이런 이른 시간에……. 어머, 잠옷 차림이시잖아요.”

“노라는? 노라 어디 있어?”

“노라요?”

하녀가 갸웃거린 다음 입을 열기까지 걸린 시간이 에키에게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노라라면 저기 있잖아요. 노라! 아가씨께서 부르신다!”

요리사와 대화를 하고 있던 하녀가 달려왔다. 주근깨 있는 얼굴에 놀란 표정이 퍼져나갔다.

“아가씨! 벌써 일어나신 거예요?”

“……노라.”

“세상에, 옷차림이……. 게다가 맨발! 이리 오세요! 너, 눈 돌려!”

노라가 에키를 잡아당기며 배달원에게 눈을 부라렸다. 배달원이 벌게진 얼굴로 모자를 눌러썼다. 에키는 노라에게 이끌려 실내로 들어갔다. 노라는 그녀를 욕실로 끌고 가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일찍 일어나셨으면 절 부르셔야지, 왜 그러고 돌아다니신 거예요? 정숙하지 못해요! 고운 발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그런데 어디 안 좋으신가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다니. 새벽에도 잠이 안 온다고 하셨잖아요? 아픈 곳 있으면 말하세요, 스미스 선생님을 불러서…….”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전속하녀의 잔소리였다. 투명한 칼날에 꿰뚫려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모습이 기억 속에 생생한데, 지금 노라는 숨을 쉬고 재잘거리며 살아 있었다.

에키는 홀린 듯이 그 잔소리들을 듣다가 그중 한 부분에서 정신을 차렸다.

“노라, 잠깐만. 새벽에 내가 널 불렀어?”

“기억 안 나세요? 잠이 안 오니까 데운 우유를 가져다 달라고 하셨는데.”

예전과 똑같은 상황.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에키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그, 그래서?”

“네?”

“그래서, 어떻게 됐었어?”

“가져다 드렸잖아요……? 그거 드신 후에 주무신 거 아니에요? 설마, 안 주무셨어요? 수면 부족은 피부의 적인데!”

미간을 구긴 노라가 에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모시는 아가씨의 피부가 자신이 정성들여 가꾼 그대로 매끄럽고 뽀얀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얼떨떨하게 있던 에키가 중얼거렸다.

“우유를, 가져다 줬다고? 내가 그거 마시고 자고?”

“네. 기억 안 나세요?”

“……그럼, 노라, 그때 뭐 이상한 것 본 적은 없어?”

“이상한 거요? 그런 건, 아.”

의아한 듯 되묻던 노라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에 못 보던 길쭉한 꾸러미가 있어서, 뭔가 하고 풀어봤었죠. 아무 것도 안 쓰여 있었거든요. 그런데 빈 꾸러미더라고요.”

“빈 꾸러미? 그런 게 왜 주방에 있어?”

“그러게요. 식재료나 빵 배달받고 봉투를 안 치웠나 했는데, 방금 주방에서 물어보니 그런 건 본 적도 시킨 적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집사님께 가져다 드리려고요.”

그 빈 꾸러미에, 원래는 마검이 들어 있었구나. 에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번에는 마검이 이미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에 노라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래서 예전과는 다른 아침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난 분명히 아무도 죽이지 않았던 과거로 보내달라고 했었어. 그럼 노라를 죽이기 전인 오늘 새벽이어야 할 텐데? 왜 이미 아침이고, 이 지긋지긋한 마검은 원래 있던 꾸러미가 아니라 나한테 있는 거지?’

“……그 꾸러미 지금 가지고 있어?”

“예. 이거예요.”

노라가 부스럭거리며 접은 종이뭉치를 꺼냈다. 에키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그거, 나한테 줘.”

“네?”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네에…….”

노라는 갸웃거렸지만 순순히 그것을 내밀었다. 에키는 걸음을 옮기며 종이를 살폈다.

상점가에서 물건을 포장할 때 쓰는 지극히 평범한 종이와 노끈이었다. 매우 길쭉한 물건을 포장한 듯한 길이. 펼쳐서 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역시 마검이 담겨 있던 게 틀림없었다.

대체 누가 로아즈 백작가의 주방에 마검을 가져다 놓은 거지? 왜? 무엇을 노리고?

그녀를 노렸을 리는 없다. 에키네시아가 검의 천재라는 건 그녀 자신도 몰랐으니까. 운동을 위한 검술조차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의 재능을 누군가 알고 마검을 가져다 놓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대체 왜? 이건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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