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5화
그 결심으로부터 9년 후, 신력 1644년 봄.
에키네시아는 부서진 신전 안을 걸었다. 그녀의 손에 멸망한 도시 아젠카에 있던 대신전이었다.
기사의 성지 아젠카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불길한 땅이 되어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신전의 폐허에는 인간의 손으로 옮길 방법이 없어 남겨진 것이 하나 있었다.
신검 카이로스기오사. 신이 시간을 담금질하여 만들어냈다고 전해지는 검.
공간의 검인 다른 하나의 신검이 공간을 표류하여 실종된 것과 달리, 시간의 신검은 기오사 전설이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인 과거부터 줄곧 이 땅에 있었다. 그래서 창천기사단이 이 땅에 터를 잡았고, 아젠카라는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도시가 생겨났다.
카이로스기오사는 폐허의 한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시시각각 다른 빛을 띠는, 날렵하고 섬세한 검.
그 주위를 장식하던 조각과 제단은 박살이 났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그 신검은 신비로웠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 그 자체였다.
인간은 그 검을 쥘 수 없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검에 닿지 않는다.
그러나 에키는 신검을 쥐어야만 했다.
그녀는 짧게 잘라버린 머리에, 낡아빠진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긴 여행의 흔적이 온몸 곳곳에 가득했다. 신검을 향해 내미는 손은 상처투성이였다. 잘 봐줘야 용병, 언뜻 보면 부랑자나 다름없는 초라한 모양새.
그런 그녀의 손에 신검은 제 몸을 허락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누구도 쥘 수 없었던 검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을 뿐.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 음성이 들렸다. 마검처럼 성별을 알 수 없는 음성이었다.
[자격 있는 인간아, 무엇을 원하는가?]
“……카이로스기오사.”
에키는 몇 차례 마른 입술을 핥은 다음,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던 과거로, 나를 돌려보내 줘.”
신검은 잠시 침묵하더니 느릿느릿 물었다.
[너는 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가?]
“살려내고 싶으니까.”
[누구를?]
“……내가 죽인 사람들을.”
[네 손으로 죽여놓고, 도로 살리겠다는 것인가?]
“나는, 원해서 그들을 죽인 게 아니야……!”
검을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악문 잇새로 피가 몇 방울 떨어졌다. 신검은 그녀가 거쳐온 시간들을 읽었다. 그리고 납득했다.
[알겠다. 그럼 그 다음엔?]
“다음……?”
[시간을 되돌리면 네가 죽인 자들이 모두 살아 있겠지. 그들이 살아 있는 세상에서, 너는 뭘 하려는 건가? 네가 다시 얻은 시간을 무엇을 위해 쓰겠느냐?]
말문이 막혔다. 오직 모두를 살려내겠다는 목표 하나만으로 달려왔던 서른다섯 살의 에키네시아는 처음으로 그 이후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바랐던 건 뭐지? 나는 왜 그들을 살리고 싶었지? 왜 과거를 바꾸고 싶었지?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냥, 살아갈 거야.”
[그저 산다고? 그뿐인가? 너는 지금도 살아 있다.]
“지금은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어.”
[어째서?]
“지금의 나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가 없으니까. 마음 편히 잠들 수조차 없어서…….”
생각하기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그녀는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행복해지고 싶었다.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제 손으로 죽여버린 지금은 행복해지는 게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바꿔야만 했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미친 듯이 기오사를 모았다. 지난 9년간 제대로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웃어본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했다.
그녀의 대답에 신검은 비로소 만족했다. 검이 부드러운 빛을 냈다.
[좋다. 힘을 빌려주마, 자격 있는 인간아.]
아득하고 어지러운 감각이 그녀의 전신을 물들여갔다.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신검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두 번의 기적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행복해져 보거라.]
검이 움직였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에 성공했다. 15년 전, 아직 그녀가 평범한 백작가의 영애이던 바로 그 시절로.
1막. 달라진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산뜻하고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무심코 그것에 뺨을 비비던 에키는, 문득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물 흐르듯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오른손을 늘어뜨리고 무게중심을 낮추어 무엇에는 반응할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사락.
그녀의 빠른 움직임에 떠올랐던 긴 머리카락이 뒤늦게 내려앉았다. 에키는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연한 분홍빛 머리카락. 자다 일어나서 흐트러져 있긴 하지만 정성과 돈을 들여 관리한 태가 났다.
“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긴 머리를 유지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다. 마검으로부터 몸을 되찾은 후로 그녀는 죽 짧은 머리로 다녔다.
이토록 길고, 그렇다고 검게 물들지도 않은 머리카락이라니. 색이 엷은 머리칼을 쥔 손은 상처 하나 없이 하얗고 보들보들했다. 손톱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실크 잠옷에 감싸인 몸은 가늘고 말랑말랑했다.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렸다. 흰 맨발에는 굳은살 하나 없었다.
침대 아래에는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슬리퍼가 있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에 남아 있는 물건이었다. 슬리퍼를 신으며 고개를 들었다. 침대 위로 드리워진 하늘거리는 캐노피를 가만히 살피다가, 그것을 걷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내, 방…….”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익숙한 방의 풍경. 에키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창가에 다가갔다. 약간 열린 창에서 흘러들어온 바람이 하얀 커튼을 휘날렸다. 그녀는 커튼을 밀치고 창밖을 보았다.
봄이다. 연둣빛 새순과 꽃봉오리들이 맺힌 정원이 보였다. 덤불 앞에 쭈그려 앉은 정원사가 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정원 너머 약간 떨어진 곳에 연무장이 있다. 연갈색 머리의 소년이 기사의 지도 아래 그 연무장을 달렸다.
“란셀……리드.”
에키는 소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녀보다 세 살 어렸던 남동생의 이름이다.
〈누님, 대체, 왜…….〉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피에 잠겨 숨을 거두었던 소년. 그건 선명한 악몽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에키는 그대로 창을 열고 2층인 그녀의 방에서 뛰어내렸다. 머릿속이 흩날리는 커튼처럼 하얗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마나가 움직였다. 그녀의 몸은 아직 코어가 형성되지 않았고 축적된 마나도 없었지만, 그런 것은 그녀에게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착지했다. 눈은 연무장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달리기 시작하자 슬리퍼가 발에서 벗겨져 굴렀다. 신경 쓰지 않았다. 맨발로 나는 듯이 달려 연무장에 뛰어들었다.
“아가씨?”
기겁한 기사를 지나쳐, 그대로 란셀을 끌어안았다. 그녀와 닮은 보라색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떠졌다.
“어어?”
소년은 달려든 그녀를 버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키는 동생의 목을 안고 그 가슴팍에 귀를 대었다. 두근두근, 소년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녀는 넋을 잃었다.
“누님……?”
“란셀, 란셀리드 로아즈, 살아 있구나, 너.”
“아침부터 무슨 소리예요? 아니, 이 시간에 누님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당황한 란셀이 그녀를 밀어내다가 흠칫 놀랐다. 잠옷 차림이라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슴과, 희게 드러난 다리에, 가느다란 어깨까지. 에키네시아는 눈 둘 곳이 없는 차림새였다. 란셀은 빽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셔츠를 벗었다.
“아니, 옷차림은 또 왜 이래요! 미 쳤어요?”
“난…….”
“알아요, 누님 땀내 질색하는 거. 싫어도 잠깐만 참아요. 그러게 왜 이런 꼴로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란셀은 막무가내로 셔츠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웠다. 란셀을 가르치던 기사는 차마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린 채 헛기침을 했다.
“도련님, 일단 아가씨를…….”
“응, 누님을 저택에 데려가야겠어. 오늘 아침 훈련은 여기까지만 해도 될까?”
“대신 다음에 보충하도록 하지요. 수고하셨습니다.”
“경도 수고했어. 누님, 일어나 봐요. ……발은 또 왜 맨발이에요?”
에키를 일으키던 란셀이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딱 자다 깬 모습인데.”
“악몽…….”
멍한 얼굴로 란셀을 잡고 있던 에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갑자기 란셀을 확 끌어당겼다.
원래 그녀의 힘은 고이 자란 아가씨답게 연약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란셀은 그녀의 힘에 끌려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발을 내디뎌 몸을 지탱한 란셀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녀가 소년의 어깨를 쥐고 똑바로 눈을 들여다보았다.
에키네시아의 눈이 전에 없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묘한 압도감. 란셀은 하려던 말을 그만 잊어버렸다.
“란셀.”
“……네, 누님?”
“오늘이 며칠이지?”
“네?”
“몇 년, 몇 월, 며칠이냐고.”
“……1, 1629년 3월 17일이요. 누님 진짜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1629년…….”
에키는 란셀을 놓아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상태로 일그러졌다.
“성공했구나. 성공했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연무장의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려 했다. 그러다 오른손바닥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움직임이 굳었다.
하얀 손바닥에 어울리지 않는 새까만 무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녀는 그 무늬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았다.
절로 이가 갈렸다. 으드득거리는 소리와 형형하게 치솟는 살기에 란셀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누, 누님? 누님 지금 좀 이상해요. 어디 아파요?”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아가씨, 잠시 실례를…… 억!”
기사가 그녀를 안아 들려 다가오다가 밀려났다. 반사적으로 기사를 쳐 낸 에키는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마구잡이로 고개를 저었다.
“란셀, 미안, 난 괜찮으니까!”
“누님!”
되는 대로 말을 던진 에키가 벌떡 일어나서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서 란셀도 기사도 그녀의 모습을 순식간에 놓쳤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가 떨어뜨리고 간 란셀의 셔츠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