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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꽃-4화 (4/211)

검을 든 꽃 4화

“내가…….”

에키는 그가 그녀를 향해 무어라 말을 할 줄 알았다. 후회든, 분노든, 원망이나 저주라도. 그러나 그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조용히 검을 뽑았다.

유리엔 혼자서는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긴 전투 끝에 에키네시아는 그의 심장을 찔렀다.

하얗던 남자가 새빨간 피로 물들어 숨을 거두는 것을 에키는 똑똑히 보았다. 그녀를 믿어주고 지켜보았던 푸른 눈은 감기지도 못하고 빛을 잃었다. 그녀는 그 눈을 감겨줄 수도 없었다.

마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시체를 내팽개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에키는 그때부터 버티기 위해 하던 상상들마저 그만두었다. 이긴 후에 무엇을 할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검에 대한 증오만이 그녀의 안에 남았다.

‘죽여 버리겠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면에서, 검게 물들어 일렁이는 자기 자신의 실루엣을 보며 그녀는 오직 그 생각만을 했다. 이제 마검이 벌이는 살육의 감각 속에서도 그녀는 집중할 수 있었다.

마검은 다음 먹이를 찾아서 움직였다. 그 쉼 없는 학살 때문에 경험은 끊임없이 쌓였다. 마나를 다루는 방법에도 점점 능숙해졌다.

그때로부터 2년. 마검에 물든 지는 6년째.

스물여섯 살에 에키네시아는 어떤 경지를 넘었다. 자연스럽게 알았다. 그녀가 마스터라는 알려진 경지보다 더 위의 어딘가에 도달했음을. 그녀는 기사가 아니었으므로 그 경지를 무어라 부르는지는 몰랐다.

어쨌든 그녀는 도달했고, 마침내 마검으로부터 벗어났다.

에키네시아가 자신의 몸을 되찾은 건 어느 작은 어촌에서였다. 물론 그 마을에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손에 들려 있던 마검을 팽개치고 6년 만에 제 것이 된 몸을 움직여 보았다.

검은 얼룩이 사라진 피부, 원래의 색을 되찾은 머리카락. 내 손. 내 팔. 내 뜻대로 움직이는 몸.

“하.”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피웅덩이 한 가운데에 주저앉았다.

“너무 늦었잖아! 늦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 주위는 죽음뿐이었고, 돌이킬 수 없는 일들만이 그녀의 온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에키네시아는 마검을 내려다보았다. 마나도 감싸지 않은 맨손으로 그것을 내리쳤다. 날에 베이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것을 후려쳤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아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뭘 해야 하지? 나는…….’

끝내 마검을 이겨냈어도,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기다려줄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녀 자신의 손으로 모두 죽여 버렸다.

상처에서 떨어진 그녀의 피가 눈물과 함께 투명한 칼날을 타고 흘러 날에 새겨진 문양에 닿았다.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백날 그래 봐라. 부서지나.]

귀가 아니라 영혼에 울리는 목소리.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린 건지 늙은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다. 에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 누구야?”

[나? 바르데르기오사. 지금 네 손에 잡혀 있는 검이지.]

“……뭐?”

[내가 만들어진 후 내 자아를 일깨운 건 네가 두 번째야.]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바르데르기오사를 응시했다. 굳어 있던 머리가 돌아가며 말뜻이 천천히 이해되었다.

“네가…… 마검이라고? 자아가 깨어났다니?”

[네가 깨웠어. 그 말은, 드디어 네가 내 주인이 될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지. 축하해!]

“……축하?”

에키네시아는 으득 이를 갈았다.

“이 저주받을 마검이, 이제 와서 뭐라고?”

[이제 와서라니, 네가 지금 깨운 건데?]

“그래,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부술 텐데.”

그녀가 형형한 눈으로 마검을 내려다보자 질겁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야, 진정해. 어, 고생을 좀 많이 했나 보네.]

“고생을 좀? 그렇게 쉽게 말이 나와?”

새파랗게 증오가 타올랐다. 그녀의 마나가 이글거리며 몸 밖으로 흘러 넘쳤다. 그녀는 피를 짓씹듯 말을 씹어뱉었다.

“전부, 네놈 짓이잖아. 어머니도, 아버지도, 란셀도, 니콜 언니도, 유리엔마저도! 전부, 전부 네가 죽였다고! 전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다 망가져 버렸어! 다 죽었으니까! 내 손에! 너 때문에!”

[아니 잠깐만,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그건 ‘내’가 아니야.]

“닥쳐!”

마스터는 검에 마나를 실어 마나의 칼날을 덧씌운다. 그것을 검기라고 불렀다. 아무리 마스터라도 검이나 검과 비슷한 물건이 없으면 검기를 만드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나 에키는 맨손에 마나를 모아 칼날로 만들어냈다.

그녀는 그 검기로 바르데르기오사를 내리찍었다. 쾅, 소리와 함께 땅이 파이고 흙이 튀었다. 지진 같은 진동이 일었는데도 검에는 금조차 가지 않았다.

[아, 아! 아프잖아! 어차피 안 부서지는데!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주인아!]

“누가 네 주인이야.”

한기 서린 음성으로 대꾸하자, 바르데르기오사는 어쩐지 떠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반복해서 검을 내리쳤다.

한 번에 부서지지 않으면 부서질 때까지 하면 그만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에키네시아의 눈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마검이 급하게 말했다.

[되돌릴 수 있어!]

“……?”

이상한 말에 그녀가 멈칫했다. 마검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너 살의에 물들어서 몸을 빼앗겼었지? 일단 널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나한테 깃들어 있던 인간의 악의랑 살의라고, 날 만든 작자가 악의랑 살의를 재료로 써서- 야, 야! 야! 잠깐만! 야!]

“쓸데없는 소리.”

그녀의 손에 마나가 다시 응집되었다. 마검이 빽 소리쳤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던 때로 되돌아갈 방법이 있단 말이야!]

에키가 얼어붙었다. 손에 있던 마나가 흩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너, 뭐라고 했어? 되돌릴 수 있다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그래, 시간을 되돌리는 게 가능해. 너 이전에 나를 깨웠던 녀석도, 좀 많이 죽이는 바람에, 날 깨우고 나서 되돌렸거든, 너도 할 수 있을 걸?]

“……어떻게?”

막막한 절망뿐인 상황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바르데르기오사의 말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야.]

“닥치고 말해. 어떻게? 전부 살릴 수 있는 거야?”

[살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되돌리는 거라니깐.]

“됐으니까 방법부터 말해!”

그녀는 절박하게 마검을 움켜쥐었다. 검에 새겨진 문양이 반짝였다. 마검은 순순히 말했다.

[기오사 시리즈를 모아서, 카이로스기오사를 사용하면 돼.]

“……무슨 소리야?”

[내가 기오사 시리즈 중 하나인 건 알지? 너 기오사 전설은 아냐?]

물론 알고 있었다. 유명한 전설이니까.

먼 옛날,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칭송받는 대장장이가 있었다. 대장장이는 자신이 검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신에게도 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어느 날, 이 대장장이에게 정말로 신이 찾아왔다.

신은 대장장이에게 자신의 권능을 빌려주었다. 그 권능은 밤과 낮처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들을 재료로 검을 만들 수 있는 힘이었다.

신은 말했다.

【네게 나와 동등한 능력을 주었다. 너는 그것으로 최고의 검들을 만들라. 이것은 네게 내리는 나의 시험이다.】

대장장이는 일흔 낮 일흔 밤을 고심했다. 그리고 백 년에 걸쳐서 특별한 재료로 열 개의 검을 벼려냈다. 그 검들은 모두 아름다웠으며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을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대장장이는 신에게 자랑스럽게 제 작품을 보였다.

신은 가만히 그것들을 내려다보다가 단숨에 허공에서 두 개의 검을 만들어내었다. 그 검은 단둘이었으나 하나만으로도 대장장이의 검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아름답고 강했다.

대장장이는 그제야 무릎을 꿇었다. 감히 신을 넘보았던 제 오만함을 뉘우쳤다. 신은 너그럽게 대장장이를 용서하고 그를 신계로 데려갔다.

대장장이와 신이 떠나고 나서, 세상에 남겨진 열둘의 검은 ‘시험’이라는 고어를 따서 기오사 시리즈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장장이가 만든 열 개의 기오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을 주인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신이 만들었던 두 개의 기오사는 누구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신검(神劍)들은 나머지 열 개의 기오사를 모두 소유한 자에게만 제 힘을 빌려준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열둘의 특별한 검, 기오사 시리즈에 대한 전설이었다.

기오사의 주인으로 인정받은 자는 기오사 오너라고 불렸다. 기오사마다 주인을 택하는 기준은 조금씩 달랐지만, 보통 마스터급은 되어야 기오사에게 선택받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예전에는 대륙 곳곳에 기오사가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강대한 힘을 가진 기오사에 얽힌 사건이 여럿 발생하면서, 어느 날 기오사 시리즈를 관리하는 집단이 등장했다.

그게 바로 창천기사단의 시작이었다.

위치 불명인 기오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오사가 창천기사단의 관리하에 있었다.

그리고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는 그 위치 불명인 기오사 중 하나였다.

“그 전설이 왜?”

[인간이 만든 열 개의 기오사를 모두 소유하면 신검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거. 그거 진짜야.]

“신검의 힘? 그걸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물론. 내 전 주인이 성공했다니까? 신검 둘 중에서 카이로스기오사를 쓰면 돼. 카이로스기오사는 시간을 재료로 만들어진 검이라, 시간을 다룰 수 있거든. 물론 세계 전체를 바꾸는 건 엄청난 일이니까 한 번 쓰고 나면 다시는 카이로스기오사의 힘을 빌리지 못하겠지만.]

희망이 드리워진다. 되돌릴 수 있다, 모든 것을. 눈앞이 아찔했다. 에키네시아는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그거, 거짓말은 아니겠지. 거짓말이면 널 부숴버릴 거야.”

[야, 내가 뭐 하러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냐. 그리고 날 부수는 건 불가능해. 이 몸은 바르데르기오사란 말이다.]

“불가능한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날 속였다면 무슨 수로는 네가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까.”

[와, 눈빛 봐라. 너, 생긴 건 예쁘장한 애가 왜 이렇게 살벌해?]

에키는 마검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기오사 시리즈에 대해 아는 것들을 최대한 되새겨 보았다. 떠오르는 건 별로 없었다. 이름을 아는 기오사도 한 손에 꼽아졌다. 애초에 기사도 아닌 그녀가 기오사 열 개를 모두 외우고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 정보를 얻고 어떻게 기오사를 모아야 할지 까마득했다. 저 마검의 말대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돌이키고야 말겠다. 자신의 손에 죽은 모두를 되살릴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기적을 쟁취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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