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3화
저릿했다. 추락하는 듯한, 또는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아찔함이 사지를 타고 흐른다.
그는 3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심정을 공감해 준 사람이었다. 가족 마저 제 손으로 죽여버린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 들여다보아 주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비참함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전율했다.
‘당신은 알아? 그래, 나는 이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정말로……!’
마검에게 뺏겨버린 몸뚱이가 찰나 그녀의 강렬한 감정에 동조했다.
반항이 멈췄다. 눈물이 고였다. 흘러내렸다. 딱 한 방울.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의 눈이 커졌다. 에키는 그 푸른 눈동자가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보였다.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눈물.”
“단장?”
“울고 있다.”
“……누가요? 설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마검한테 잡아먹히면 자아 따윈 남지 않는다며. 단장, 저건 그냥 마검이 휘두르는 몸뚱이일 뿐이야.”
기사들이 줄줄이 반박했다.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남아 있군. 싸우고 있는 거다.”
“싸워? 뭐랑?”
“마검과, 그녀의 의지가.”
그의 말대로였다. 에키네시아는 몸을 잠식하고 있는 검은 얼룩들과 끝없이 싸웠다.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 아직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자아를 잃었을 터다.
아무도 마검을 든 악마 속에서 그녀가 마검을 막기 위해, 몸을 되찾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의식은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그 싸움을 알아차렸다, 최초로.
그녀를 막아선 남자가.
그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에키는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매달리며 목 놓아 울고 싶었다. 괴로웠다고, 끔찍한 시간들이었다고,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사실은 이렇게, 악마로 죽고 싶지는 않다고, 제발 누구든 나를 도와달라고. 그런 말들을 쏟아놓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은 그 한 방울이 끝이었다. 곧 메마른 눈으로 에키네시아의 몸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붉은 머리의 기사가 혀를 찼다.
“거 찝찝하네.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의식이 남아 있다 쳐도 상관없잖습니까. 할 일은 변하지 않으니까.”
금발의 여기사가 재촉했다. 그래도 유리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에키네시아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럴 순 없다.”
“예?”
“가능성이 있지 않나.”
“무슨 소릴……. 아, 단장, 잠깐만, 지금 혹시…….”
당황한 듯 붉은 머리가 말을 더듬었다. 그의 말뜻을 곧바로 알아들은 덩치 큰 기사가 우직하게 고했다.
“단장님. 마검을 이겨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선례가 있다.”
“전설인지 실화인지도 알 수 없는 마검사 얘길 하려는 건 아니지, 유리엔 단장?”
“단장,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이미 마검의 악마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저 여자의 손에 괴멸 수준에 이른 영지가 몇 개인지 아시잖습니까.”
“영지만 문제야? 제국은 기사들이 다 뒤져서 수도경비대원들로 기사단을 꾸려야 할 판이고, 마탑도 윗대가리 마법사들이 다 죽어버렸지. 황족이랑 귀족들도 좀 죽었지, 아마? 이건 어떻게 해도 사형이야.”
기사들이 번갈아 말을 늘어놓자 묵묵히 듣던 유리엔이 대꾸했다.
“피해가 늘어난 건 우리가 늦은 탓도 있다.”
“아니, 우리가 늦고 싶어서 늦었어? 제국 놈들이 지들이 할 수 있다고 빽빽 우기다가 이 지경이 된 거잖아!”
붉은 머리 기사가 항변했다. 유리엔은 그에 답하지 않고 에키네시아의 목을 짓누르던 검을 떼어냈다. 그는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검을 휘둘렀다.
자루 끝의 폼멜(Pommel)이 마나를 담고 명치를 가격했다. 부상당한 상태로 급소를 맞은 그녀의 몸은 그대로 기절했다. 그녀는 흐려지는 의식으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의도치 않은 죄를 단죄할 수는 없다.”
“미치겠네. 야, 율, 내가 평소에는 그런 기사도 나름 존경하는데 말이야, 이건 아닌 거 같아.”
“단장님. 대체 어쩌려는 겁니까?”
“저 여자를…….”
“……왜…….”
“무리……. 처벌을…….”
다른 말들이 흐릿한 가운데, 그의 음성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겠다.”
기적처럼 내려진 한 줄기 빛이었다.
* * *
마검을 쥔 팔을 자르는 것으로 마검을 분리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는 다른 기오사 시리즈처럼 영혼에 각인되는 검이었다.
에키네시아는 도시 아젠카에 있는 창천기사단 본부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특별히 만든 봉인구를 채우고 사지에 사슬을 달았다.
제국측은 마검의 악마를 처형하길 원했으나 유리엔이 그 의견을 묵살했다. 자기들끼리 처리할 수 있다고 우기다가 대량의 피해를 내고 결국 창천기사단에 손을 벌렸던 제국의 발언에는 힘이 없었다.
에키는 유리엔이 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마검으로부터 몸을 되찾기 위한 싸움에만 집중했다.
사람을 죽이는 감각은 지나치게 강렬해서, 마검이 학살을 벌일 때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녀의 몸이 살육을 벌이지 못하는 지금이 적기였다.
발아래는 무의식, 머리 위의 까마득한 허공은 의식. 무의식의 수면을 딛고 서서 마검의 마나로 검게 물든 그녀 자신과 싸웠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수백 번의 패배를 했고, 몇 번이나 수면 아래의 무의식에 처박힐 뻔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일어났다.
에키는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었다. 그녀가 알던 자신은 게으르고 잠이 많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극한에 몰려 알게 된 스스로의 본질.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망가뜨린 저 마검에게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는 승리한 후를 상상했다.
빌어먹을 마검을 부숴버리고, 목욕을 해야지. 그 다음엔 꿈도 꾸지 않는 잠을 푹 자는 거야. 일어나면 머리를 빗고, 새 옷을 입고, 따뜻한 스프와 보드라운 빵을 먹고 싶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유리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고백하자. 내게 기회를 준 그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에키네시아의 모든 학살은 그녀가 아니라 마검이 저지른 죄였지만, 그래도 에키는 그 모든 일이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피에 젖은 건 그녀의 손이었으므로.
지하감옥 안에서 그녀의 몸뚱이는 으르렁거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고, 피가 나도록 벽이나 바닥을 긁어대고,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더 이상 누군가를 죽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은 끝없이 싸웠다.
그런 나날들 사이로, 가끔 유리엔이 지하감옥을 찾아왔다.
“여전한가?”
“예.”
그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철문의 위쪽에 뚫린 작은 창으로 그녀를 들여다보곤 했다.
에키네시아의 근처에는 사람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다.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는 살육의 검이라, 본능적으로 모든 인간을 죽이려 들었다. 근처에 사람이 다가가면 마검을 자극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식사와 물을 가져다주는 간수도 이중문의 중간에서 안쪽에 그릇을 놓아두고 나가는 방식을 취했다.
유리엔은 늘 문과 문 사이의 그 좁은 공간에 홀로 서서 철문 너머로 에키네시아를 지켜보았다. 그녀에게 말을 건 적은 없다.
그저 지켜보는, 고요하고 푸른 눈.
그의 눈에는 검게 물들어 사슬에 묶인 채 짐승처럼 날뛰는 여자만이 보일 텐데, 그럴 때마다 에키는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마검에 물든 몸뚱이가 아니라 마검과 싸우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게 부정하면서도 유리엔이 올 때마다 그녀는 같은 생각을 했다.
그가 오는 것이 기뻤다. 그는 그녀의 승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마검을 극복하리라 믿으며 지켜봐준다. 에키는 자신을 믿어준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 몸을 되찾으면, 그를 만나서…….’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정말로 많았다. 그녀는 차곡차곡 그 말들을 그녀의 안에 모아두었다. 그 말들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이기고 싶었다. 마검으로부터 벗어나, 여느 때처럼 그녀를 지켜보러 온 그를 웃으며 맞이하고 싶었다. 그런 기적을 꿈꾸었다.
그러나 기적은 베풀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상황이 나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참혹해서, 그녀는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라고 치부하며 그 일들을 잊을 수는 없었다.
간수가 갑자기 이중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에키네시아의 몸이 사흘 정도 미동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었던 탓에 죽었는지 확인하러 온 것 같았다.
그건 마검의 수작이었다. 그녀의 팔이 닿는 범위에 간수가 접근한 순간, 에키네시아는 늘어진 쇠사슬로 간수의 목을 졸랐다. 간수는 눈 깜빡할 사이에 죽어버렸다.
‘안 돼, 그만둬, 그만두라고! 제발!’
그녀의 절규는 무의미했다. 봉인구 때문에 그녀의 몸은 마검의 본체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간수의 허리에 있던 검을 이용해 사슬을 끊었다. 극도로 단련한 기사는 마나가 없어도 금속을 자를 수 있다던데 그걸 제 몸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에키네시아는 간수의 품을 뒤져 열쇠를 꺼내 이중문을 열고 나갔다. 감옥을 지키던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봉인구의 열쇠도 찾아냈다. 마나를 억누르고 있던 봉인구가 풀린 순간 에키는 파국을 직감했다.
유리엔과, 그를 도울 다른 기오사 오너가 하나만 더 있었다면 그녀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필 유리엔은 아젠카를 잠시 비운 상태였고, 아젠카에 남아 있던 오너는 부기사단장 한 명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토벌하러 왔던 기사들 중 제일 덩치가 컸던 바론이라는 남자였다.
에키네시아는 미쳐 날뛰었다. 바론은 최후까지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키며 그녀를 막아서다 목이 잘렸다.
방해하던 그가 죽자 그녀는 아젠카의 살아 있는 생명을 모조리 죽였다. 그러고 나서 ‘위험한 적’으로 인식한 다른 기오사 오너들을 기다렸다.
며칠 후 금발의 여기사 테레사와 붉은 머리의 디트리히가 함께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다. 그들은 벌겋게 물든 아젠카에서 에키네시아와 마주쳤다. 디트리히는 테레사를 지키려 발악하다 오히려 테레사에게 구해졌다.
“누군가는 가서 단장에게 알려야지.”
“테레사가 가면……!”
“네가 남으면 5분도 못 버티니까, 닥치고 빨리 가!”
테레사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보냈다. 에키네시아는 사력을 다한 테레사에게 발목을 잡혀 디트리히를 놓쳤다.
그녀는 테레사를 먼저 죽이고, 산을 타고 도주하던 디트리히를 밤새도록 추적해 죽였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들에게도, 그녀에게도.
마지막으로 유리엔이 왔다.
그는 시체가 쌓여 썩어가고 있는 자신의 터전을 보았다. 악취가 진동했다. 에키네시아는 시체의 산 앞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분수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리엔은 하얗게 질렸다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녀를 보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