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든 꽃 2화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조금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검술과 마나 친화력이라는 두 분야 모두에서 한 세기에 한 명 나오기도 힘든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천재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에키네시아는 검을 한 번도 쥐어보지 못한, 곱게 자란 백작가의 영애였으므로.
‘영영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에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온몸에 진득한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감각은 끔찍했다. 스무 살까지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감각에 지금은 더없이 익숙하다.
‘이딴 식으로 내가 천재라는 걸 알고 싶지는 않았다고.’
에키네시아는 멍하니 앞을 보았다. 정확히는 앞을 보게 되었다. 지금 그녀의 몸은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쥔 마검(魔劍)에게 몸을 빼앗긴 상태였다.
인간의 살의로 빚어낸 유리처럼 투명한 칼날, 인간의 악의로 빚어낸 새카만 칼자루.
그 검에서부터 뻗어 나온 기운이 그녀의 오른팔을 검게 물들였고, 하얀 피부 곳곳에도 까만 얼룩을 만들었다.
그녀의 이름이 에키네시아가 된 이유인 분홍빛 머리칼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보라색 눈동자도, 모조리 악의 같은 검은빛에 물들었다.
거기에 곳곳에 불거진 혈관, 충혈된 눈, 엉겨 붙은 피와 먼지로 그녀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라 해도 지금 그녀가 에키네시아 로아즈임을 알아보기는 어려울 터다.
에키는 제국 백작 가문의 하나뿐인 딸이었고, 작위를 이을 남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가문은 세력가는 아니어도 꽤 부유하고 오랜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집안에 사생아니 불륜이니 하는 문제가 있지도 않았다. 남매 사이도 괜찮았고 백작 부부의 금슬도 좋았다. 백작 부부가 에키에게 바라는 건 좋은 곳에 시집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 정도였다.
에키는 그런 자신의 상황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녀는 결혼을 목표로 미모를 가꾸고 적당한 교양을 배웠다.
예쁜 것들을 좋아했고 땀내 나도록 몸을 움직이는 건 질색이었다. 험한 말투는 상스럽다 여겼고 조신한 몸가짐이 몸에 배어 있었다. 게으른 편이었고 귀족답지 않은 짓은 싫어했다.
딱 스무 살까지는 그랬다.
마검 바르데르기오사.
그것이 그녀가 쥔 검의 이름이었고, 그녀가 자신이 천재인 걸 알게 된 이유였으며, 그녀를 삶을 완전히 뒤바꾸고 참극을 만들어낸 주범이었다.
바르데르기오사는 주인의 몸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몸을 이용해 살육과 파괴를 벌인다. 그런 학살 사건이 여러 번 있었고, 그 사건들 때문에 바르데르기오사는 마검이라는 이명을 얻었다.
마검의 힘은 대단했다. 검에 재능이라곤 쥐뿔도 없는 인간도 마검에게 몸을 빼앗기면 마스터, 즉 무기에 마나를 실어 검기를 사용하는 자들까지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검이 힘을 발휘하는 건 주인의 몸뚱이를 통해서였다.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에는 몸이 버티지 못하고 망가지면서 숙주를 잃는 것이 마검의 말로였다.
마검 스스로도 그것을 아는지 지나치게 강한 자들이 접근하거나 숙주가 망가져 가면 도망쳐서 숨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에키네시아의 몸을 얻은 마검은 달랐다.
‘어떻게 된 게, 아무도 막질 못해?’
정신 나간 수준의 마나 친화력이 마검의 마나로 붕괴되려는 몸을 지탱했다. 단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도 타고난 육체는 마나에 적셔지며 순식간에 마검이 발휘하는 검술에 최적화되었다.
그 결과는 아주, 아주 끔찍했다. 에키는 자신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를 강제로 체험했다.
이름을 날리던 용병도, 근위기사단장도, 궁정마법사도,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조차도, 전부 칼날에 베여 시체가 되었다. 그녀 앞에서 모두가 쓰러져 갔다. 너무나 쉽게. 기가 찰 정도로 간단하게.
‘이 정도까지 천재일 필요는 없었잖아.’
에키는 오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알게 된 재능이라니.
그녀가 천재가 아니었다면 이 지경까지 이르진 않았다. 이런 재능은 필요 없었다. 있더라도 영원히 알지 못하고 사는 게 나았다.
울고 싶은 그녀의 기분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먼지와 피와 오물이 머리카락과 뒤엉켜 얼굴에 달라붙은 덕에 그 미소를 누가 보기는 어려울 거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루에 두 번 목욕을 하던 에키는 이제 더러움에도 무감각해졌다.
사방이 온통 시체였다. 그녀는 누구의 목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발끝으로 툭 차며 앞으로 걸었다. 목적지는 없다. 마검은 제가 죽일 생명을 찾아다닐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앞을 한 무리의 기사들이 막아섰다.
실전용이라기엔 지나치게 눈에 띄는 순백의 제복, 푸른 망토, 가슴팍에는 흰 방패 모양 안에 금빛 매가 네 장의 날개를 펴고 있는 문장.
에키는 기사의 세계에 문외한이었던 귀족영애였지만, 그런 그녀도 저런 문장을 달고 흰 제복을 입는 기사들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유명한 기사단. 어느 한 국가에 소속되지 않는 자들, 창천기사단. 저 문장을 보니 틀림없이 창천의 매들이었다. 남자 셋, 여자 하나.
그중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마검에 물든 자여.”
긴 은발을 느슨하게 한 가닥으로 묶어 어깨로 늘어뜨린 남자였다. 그가 기사단의 이름처럼 새파란 하늘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키네시아는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
그녀가 속한 키리에 제국의 3황자이자, 일찍부터 계승권을 버리고 창천기사단에 입단하여 최연소 기사단장이 된 남자.
창천기사단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집단이다. 그러므로 유리엔은 엄밀히 따지면 더 이상 황족도, 제국인도 아니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무 자르듯 딱 끊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제국인들은 창천기사단장이 자국의 황족임을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에키도 자랑스럽다고 여겼다. 그녀가 참석한 티파티에서는 꽤 자주 유리엔이 화제에 올랐다.
에키는 직접 그를 본 적도 있다. 그녀도 참석했던 황제의 탄신 연회에, 유리엔이 아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었다.
그때 그녀는 무성한 소문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를 보며 남몰래 볼을 붉히기도 했었다. 비록 그와 춤 한 번 춰보지 못했지만, 그 유명한 창천기사단장을 직접 본 것에 만족했다. 그는 그녀와는 너무도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낭만소설처럼 우연한 만남으로 창천기사단장과 사랑에 빠지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있긴 했다.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제국의 영애 대다수가 그런 상상을 해봤을 터였다. 꿈꾸는 건 자유고, 그는 매력적인 미혼 남성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와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리라곤 꿈꿔본 적이 없었다. 마검에 물든 상태로, 마검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창천기사단장과 만나는 것 따윌 상상할 리가.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그에게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서늘한 칼날이 겨누어지는 감각. 저 넷 중에서 그가 가장 강하다.
오직 실력으로만 평가하는 창천의 단장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그가 얼마나 강한지 명확하게 와 닿았다. 빌어먹을 마검 덕분에 트인 감각이었다.
“기오사를 수호하는 창천기사단으로서, 그대를 토벌하겠다.”
유리엔은 선고하듯 말하며 하얀 검을 치켜들었다. 그 검은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성검 랑기오사였다.
에키네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말없이 마검 바르데르기오사를 겨눴다. 죽여. 죽여. 죽여. 마검에 잠식된 머릿속에 악의에 찬 메아리가 울렸다.
공격은 그녀가 먼저 시작했다. 새카만 마검과 하얀 성검이 맞부딪혔다.
에키네시아는 승리하고 싶지 않았다. 동경하던 기사단장이 악인 그녀에게 승리해 주길 빌었다.
‘무리야. 진짜 나, 쓸데없이 강하구나.’
그녀가 마검에 물든 지도 3년이 지났다. 그간 그녀는 수없는 전투를 겪었다.
창천기사단에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던 제국은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많은 기사들을 보냈다. 그리고 에키네시아는 그 모두를 죽였다. 그러면서 점점 강해졌다. 그녀의 몸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도.
그 경험들이 말하고 있었다. 유리엔은 지금까지의 그 누구보다도 오래 버티겠지만, 결국 이기는 건 에키네시아다. 그녀는 지나치게 뛰어났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유리엔도 알아차렸다. 그가 그녀의 검을 흘리며 훌쩍 뒤로 물러섰다.
“대단하군. 실로 안타깝다.”
푸른 눈이 흐려졌다.
“그대가 기사였다면…… 진심으로 검을 나누었을 텐데.”
“유리엔 단장.”
대기하고 있던 셋 중 하나가 혀를 차며 그를 불렀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은 채 답했다.
“안다. 이것은 대련이 아니라 토벌이지.”
“슬슬 합류할까요?”
“그래.”
나머지 세 기사가 각자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전부 기오사 오너였다. 창천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기사들.
그 뒤로는 좀 더 치열해졌다. 네 명의 합공이었다. 그것을 버텨내기 위해 마검은 에키네시아의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잠재력의 밑바닥까지 닥닥 긁어다 뽑아 썼다.
그러나 아무리 마검을 든 불세출의 천재라 해도, 창천의 단장을 포함한 네 명의 기오사 오너들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었다. 차라리 군대를 상대하는 편이 쉬울 것이다.
에키네시아는 드디어 패배했다.
유리엔이 그녀를 쓰러뜨리고 올라타 목을 검으로 짓눌렀다. 상처투성이가 된 에키네시아는 억눌린 짐승처럼 발버둥쳤다. 본능적으로 목을 감싼 마나 덕에 그녀는 아직 목을 베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한동안 대치했다. 지친 기사들이 주위에서 투덜거렸다.
“소름끼치게 강하네요, 정말. 우리 넷을 상대로 이만큼이나 버티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눈앞에 있는데 못 믿어? 눈 다쳤어, 테레사?”
“입 닥쳐, 디트리히.”
“기사답게 바른 말만 쓰라더니……. 테레사는 자기 맘대로야. 그 점이 매력이지만.”
“디트리히 사루아. 다물라고 했다.”
“아깝군. 단장님 말대로 기사였다면 훌륭했을 텐데, 저 재능으로 마검 따위에 손을 대다니.”
티격태격하는 두 기사를 무시하며 덩치 큰 기사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에키네시아는 반박하고 싶었다. 울부짖으며, 피를 토하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나라고 이러고 싶었을 것 같아? 마검인 줄 알았으면 미쳤다고 그걸 쥐었겠어? 나는, 나는, 그저-!’
“그녀라고…… 원해서 이걸 쥐었겠나.”
유리엔이 말했다. 발버둥 치는 그녀를 내리누르느라 거칠어진 호흡임에도 명료한 발음이었다.
그녀가 외치고 싶었던 말이었다. 학살을 벌이는 그녀 앞에서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혹은 할 수 없었던 말이다.
에키네시아는 넋을 잃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몸뚱이가 발광하면서도 그를 노려보는 덕에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가 그를 관찰하듯 그 또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에게서는 지금까지 그녀가 봐왔던 공포, 혐오, 분노, 원망, 고통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연민이 스며 있었다. 마검을 쥔 미친 악마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한 시선이었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을 테지.”
바짝 붙어 있는 그녀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하게,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