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꽃-1화 (1/211)

검을 든 꽃 1화

서막

아젠카 사관학교는 엄밀히 말하면 학교라기엔 무리가 있었다. 수업이나 강의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훈련이 있지도 않다. 물론, 교관이나 선생도 없다. 사관생도들에게 제공되는 건 숙식과 사관생도라는 신분뿐이었다.

“하지만 그 신분이 의미하는 게 대단하죠. 창천기사단의 스콰이어(Squire : 기사의 종자) 후보라니. 응시생이 이렇게 많이 몰리는 것도 당연해요.”

사관학교 행정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신입 사무관이 중얼거렸다. 책상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지원 서류를 살피던 선배 사무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그냥, 새삼 사무관으로나마 창천기사단 소속이 된 게 뿌듯해져서요.”

“싱겁긴.”

아젠카 사관학교가 위치한 도시 아젠카는 창천기사단이 다스리는 도시였다. 아젠카는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았다. 창천기사단이 국가를 초월한 기사단이기 때문이다.

“쟤들 중에 몇이나 창천의 기사가 될까요?”

“한 명도 안 나올 수도 있지.”

“설마요.”

“마스터가 아니면 창천의 정식 기사가 될 수 없는데, 마스터가 되는 게 어디 쉽냐?”

“……기사는 다 마스터 아니었어요?”

“이놈 봐라. 무서운 소릴 하네. 너, 아젠카 출신이었지? 쭉 아젠카에서만 살았어?”

“네. 왜요?”

“야, 기사단원이 죄다 마스터인 창천기사단이 이상한 거야. 창천이 괜히 최강 소릴 듣겠냐?”

“그럼 다른 기사단은 마스터가 아니라도 기사로 받아줘요?”

“애초에 다른 나라에는 마스터가 몇 명 있지도 않아. 그런데 여긴 뭐, 평기사가 검에 마나 실어서 뿌려대는 마스터고 그 위로 기오사 오너들까지 있으니…….”

“어, 쟤 뭐야.”

신입이 황당하다는 어조로 선배의 말을 끊었다. 한창 설명을 하고 있던 그녀가 인상을 썼다.

“너 이 자식, 내 말 듣고 있었어?”

“서, 선배, 쟤 좀 봐요.”

신입은 허둥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란이 들려오고 있었다. 화를 내려던 선배 사무관이 그 소란에 결국 창가로 다가왔다.

“뭔데 그래? ……저게 뭐야?”

밖을 내다본 그녀가 입을 떡 벌리자 붙어선 신입이 물었다.

“선배, 여기서 일한 지 몇 년이랬죠?”

“7년…….”

“……그 동안 저런 응시생 본 적 있어요?”

“있겠냐?”

“없겠죠…….”

“내가 별의별 응시생들을 봤지만, 저런 애는 또 처음이네.”

한 여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여자라서가 아니었다. 남자가 더 많긴 해도 응시생들 중에는 여자도 많았고, 창천기사단에도 여기사들이 있었다.

예뻐서?

예쁘긴 했다. 갓 스물쯤 되었을까. 얼굴은 그보다 앳되었지만 몸매가 성숙했다.

피부는 우윳빛, 반은 틀어 올리고 반은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엷은 분홍색, 어리게 보이는 인상에 일조하는 커다란 눈동자는 잘 익은 포도알 같은 보랏빛이었다. 도톰하고 작은 입술은 꽃잎처럼 발그레했다. 만지면 꽃가루가 묻어날 것처럼 곱고 가녀린 여자였다.

그러나 그런 외모도 소란의 주범은 아니었다. 몰린 인원이 천 단위다 보니, 그녀보다 더 눈에 띄는 미인도 꽤 있었으니까.

그녀가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옷차림 때문이었다.

하얀 레이스 장갑. 패티코트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드레스. 굽이 높은 여성용 구두. 귀걸이. 목걸이. 브로치. 옅은 화장. 리본, 러플, 프릴, 보석.

기사 지망생들이 모여 있는 연무장이 아니라 귀족영애들의 티파티에나 어울릴 차림이다.

“돌았나 봐요…….”

신입이 중얼거린 말이 그녀를 보는 모든 이의 심정을 대변했다. 선배 역시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그러게, 어느 집안 아가씨인진 몰라도 철이 없다 못해 개념을 상실했네.”

“여기가 검술을 시험하는 자리라는 걸 알고 있긴 한 거겠죠?”

“차라리 모르고 온 게 낫겠다. 전대륙에서 몰려온 천재들이 최선을 다해 도전하는 아젠카 사관생도 선발시험에, 알고도 저런 꼴로 온 거면…….”

“검을 잡아본 적이 있긴 할까요?”

“제일 가능성 높은 게 낭만소설만 왕창 보다가 가출한 아가씨란 건데, 검은 무슨. 내기할래? 난 검 뽑다가 떨어뜨리는 데에 1실버.”

“싫어요, 내기가 안 되잖아요! 저도 거기다 걸 건데!”

“넌 휘두르다가 떨어뜨리는 데에 걸면 되지.”

“저 팔로 검을 휘두르긴 뭘 휘둘러요! 들지도 못하겠네!”

검은 제법 무거운 무기였다. 가볍게 만든 레이피어가 아닌 이상 훈련하지 않은 여자는 휘두르는 건 물론이고,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서늘한 저음이 떠드는 그들의 뒤로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놀란 선배가 급히 돌아서더니 경례를 했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네? 다, 단장님이요?”

아젠카에서 ‘단장’이라 불릴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창천기사단의 단장.

창천은 철저한 실력제이므로, 창천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건 최고의 기사라는 뜻과 비슷했다.

행정 담당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단이라 단장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신입은 경악한 얼굴로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는 유리로 만든 꽃처럼 섬세해 보였다. 느슨하게 묶어 한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긴 은발, 새파란 하늘색 눈동자. 기사라기보다는 시인처럼 보이는 얼굴.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제복 아래의 몸은 철저히 단련되어 있었다.

거기에 분위기. 아무리 아름다워도 검은 검이다. 베고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 특유의 예리하고 차가운 느낌이 그에게서도 느껴졌다. 늘 검을 가까이하는 삶을 살아온 흔적일지도 모른다.

저 남자가 역대 최연소 마스터이자 최연소 창천기사단장이며, 성검(聖劍) 랑기오사의 주인인, 유리엔 드 하르덴 키리에였다. 후대에 음유시인들이 부르는 서사시의 주인공이 될 것이 틀림없는 자.

신입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기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신입이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자, 선배가 눈을 질끈 감더니 설명했다.

“응시생 중에 특이한 사람이 있어서, 잠시 농담을 했습니다!”

“특이하다고?”

유리엔이 미미하게 눈썹을 치켜 올리자, 사무관들이 재빨리 물러나며 창가를 가리켰다.

“저기에……. 보면 바로 아실 겁니다.”

창가로 다가간 유리엔이 밖을 내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금세 응시생들 사이에서 분홍빛 머리칼의 여자를 찾아냈다.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는 여자였다.

모를 수가 없다. 그는 그녀가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더라도 알아 봤을 것이다.

그의 눈이 커졌다가 흔들렸다. 창틀을 쥔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수많은 기억들이 뇌리를 점령하며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그는 내면의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사무관들은 누구도 그가 흔들린 것을 알아 채지 못했다.

선배 사무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젠카의 생도 선발시험에서 드레스 차림의 응시생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응시생?”

유리엔은 희한한 소리를 들은 듯이 반응했다.

“예. 사관학교를 뭐로 보는 건지……. 철없는 아가씨인 모양입니다.”

선배는 단장이 놀라는 것을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했다. 구두 신고 드레스 입은 응시생이라니 기가 찰 만도 하지. 그 편견 탓에 그녀는 유리엔의 반문이 묘한 뉘앙스를 띄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반면 신입은 알아차렸다. 어쩐지 그의 말투가 이상했다. 기사단장의 말은 ‘감히’ 응시생이냐는 뜻이 아니라 ‘고작’ 응시생일 리가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잘못 들었나? 그가 갸웃거리는 동안 유리엔은 금세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네는 그녀가 탈락하리라고 생각하나?”

“네? 그야……. 아, 아닙니까?”

그사이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예선을 치를 차례가 된 모양이었다. 여자는 차림새와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아무 장식 없는 롱소드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예선은 통나무를 검으로 베는 간단한 시험이었다.

통나무는 생각보다 단단하고, 그것을 도끼도 아니고 검으로 한 번에 베어낸다는 건 기술과 힘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리였다.

숙련된 기사는 통나무를 베는 자세, 베인 단면, 속도 등으로 단번에 상대의 수준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창밖에서 통나무 앞에 선 여자가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유리엔은 그녀가 검을 드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나라면 그녀가 수석으로 시험을 통과한다는 쪽에 걸었을 거다.”

여자가 검을 휘둘렀다. 치렁한 소맷자락이 하늘하늘 나부꼈다. 구두를 신은 발도, 가는 팔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통나무는 깨끗하게 반으로 갈렸다. 뭘 잘 모르는 사무관들이 보기에도 깔끔한 동작이었다.

연무장 가득 정적이 흘렀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집에 검이 들어간 후에야, 시험관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기계적으로 통나무의 단면을 확인한 다음, 더듬더듬 소리쳤다.

“에, 에키네시아 로아즈, 예선 합격!”

유리엔은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돌아섰다. 더 볼 필요가 없다. 그녀는 앞으로 남은 시험들도 간단히 통과할 테니까.

그는 사무관을 향해 명령했다.

“지원서를 가져와라.”

“네, 네?”

예상 밖의 일에 넋이 나가 있던 사무관이 화들짝 놀랐다. 유리엔이 턱짓했다.

“저 응시생의 지원서 말이다.”

“아,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무관 둘이 허둥지둥 서류더미를 뒤졌다. 잠시 후에 유리엔의 손에 한 장의 서류가 건네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것을 빠르게 훑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 여성, 20세, 키리에 제국 출신, 로아즈 백작가의 장녀.

에키네시아(Echinacea)는 분홍색 꽃의 이름이었다. 아마도 저 흔하지 않은 머리카락 색 때문에 이 이름을 받았을 것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울 만큼.

“에키네시아…….”

유리엔은 가만히 그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너무나 알고 싶었던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름은 몰랐었다.

그가 아는 ‘미래’에서 그녀는 사관생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사관생도가 될 것이다.

“달라졌군.”

“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수고하도록.”

유리엔은 사무관들에게 지원서를 돌려주고 행정실을 떠났다.

* * *

같은 시각, 에키네시아는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고 예선 시험장을 벗어났다.

그녀는 오른손바닥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화려한 장갑으로 가려진 손바닥에는 들켜서는 안 되는 검은 문양이 있었다.

[또 날 버리려는 생각 중이지? 무정한 주인아.]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푸념하는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들렸다. 오른손바닥의 문양에 깃든 것이 그녀의 영혼에다 직접 들려주는 음성이었다. 에키는 비웃음을 띄었다.

“당연하지, 내가 여기까지 왜 왔는데. 널 버리러 온 거라고.”

[야, 내 덕에 시간을 되돌리는 법을 알게 됐으면서!]

“네놈이 아니었으면 그런 게 필요하지도 않았어.”

[에이, 좀 대범하게 넘겨. 이제 그거 다 없었던 일이잖아? 지워진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고, 응?]

“닥쳐, 빌어먹을 마검아.”

에키가 가느다란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무어라 투덜거리는 마검의 말들을 무시하고 1차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장은 멀지 않았다. 예선을 통과한 사람들이 그곳에 이미 모여 있었다.

에키네시아는 입구에서 멈춰 섰다. 문양을 감추고 싶은 것처럼 오른손을 움켜쥔 채,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녀는 창천기사단의 정식 기사가 될 작정이었다. 눈에 띄면서도, 의심받지는 않게.

어쩔 수 없이 최단 기간에 기사로 서임되는 기록을 세우겠지만, 그래도 비정상적인 것으로는 보이지 않도록. 그냥 ‘평범한’ 천재인 것처럼만. 그런 상태를 유지하며 목표를 이뤄야한다.

특히 그 고결한 기사단장과는 절대 얽혀서는 안 된다. 그녀가 그를 만나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어떻게 얻어낸 새로운 삶인데 감상에 빠져 망칠 수는 없다.

‘유리엔이 만에 하나 기억하더라도……. 이렇게나 다른 모습이니까.’

에키는 화려한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드레스를 입고 꾸민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에키네시아 로아즈는 두 번째 삶을 사는 중이었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에 시간을 15년 전으로 되돌렸다. 지우고 싶었던 과거를 직접 지웠다.

그렇게 시작한 두 번째 스무 살은 쉽게 주어진 행운이 아니었다. 그녀가 직접 쟁취한 기적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