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215)화 (215/218)

215화

던전 밖으로 나왔을 땐, 당연히 RP던전 안이 아니었다.

“와, 공해.”

숨을 들이마시자마자 느껴진 건 SS급의 기감에 더 예민하게 잡히는 미세먼지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L급 던전도 클리어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손에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물건들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세니아의 세검(L+)]

밑에 붙은 부가효과는 무서울 정도로 길었다.

[신의 상점 : Lv. 4]

그리고 신의 상점이 켜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화냐?

그런데 난 그것에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공기는 분명 익숙한데 분위기가 왜 이 모양이지?”

사실 우리가 꽃밭에 온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서 있는 던전 앞이 온통 새하얀 꽃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뭔 상황인지 모르겠네.”

신재헌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주이안 헌터님의 목소리도 들렸다.

나왔구나. 무사히.

안도감이 드는 것도 잠깐, 그의 말에 생각회로가 잠시 멈추었다.

“국화인데요?”

“네?”

국화가 여기서 왜 나와?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빼서 멀리를 내다보더니 말했다.

“죄~다 국화인데?”

“?”

이게 뭔 상황임?

국화꽃에 대고 물어봐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으므로, 난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던전에 들어갈 때 은하 서버에 저장되는 휴대폰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은하 서버에 있는 동안 배터리는 닳지 않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날짜는 안 감사했다.

“……우리가 언제 던전 들어갔죠?”

난 얼빵한 얼굴로 물었다. 신재헌이 날짜를 흘끗 보고 답했다.

“두 달 정도 전이네요.”

“……오랫동안 있었군요.”

일반적인 S급 던전도 일주일이면 깬다고 하는 판에, 두 달이면 오래 걸리는 걸 넘어 감감무소식 수준이었다.

난 날짜와 눈앞의 국화꽃밭을 보고 결론 내렸다.

“우리 죽은 줄 아는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세 헌터의 시선이 국화꽃 무더기로 향했다.

“그런 것 같은데요?”

소예리 헌터가 황당하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죠? 아무래도 그런 듯? 맞는 듯?

우리 전국 단위 추모 당하는 중인 듯?

SNS 가면 #PRAYFORSHINYURI 떠 있을 듯?

설마 하는 생각에 인터넷 어플을 켠 순간이었다.

[게이트 사태 대응 회의 LIVE]

메인 화면에 라이브 방송 배너가 커다랗게 번쩍였다.

“이건 또 뭐야.”

설마 오자마자 다른 게이트 가는 거 아니지?

내 화면에 다른 세 헌터의 시선도 집중되었다.

소예리 헌터가 내 어깨에 턱을 얹는 사이 난 라이브 영상을 켰다.

[게이트는 이미 나흘 전부터 서서히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준비해도 늦는단 말입니다!]

켜자마자 다급하게 말하는 건 게이트학자였다.

[아닙니다. L급 게이트인 만큼 재구축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맞은편에서 안경을 척 올리는 남자도 게이트 학자인 듯했다.

“이 사람 헌터협회 자주 오가던 사람 아닌가?”

신재헌이 그를 가리켰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헌터협회장 친구였을걸?

아니지, 잠깐만.

“L급 게이트가 또 떴어???”

지금 헌터협회장의 인맥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내 말에 우리 넷의 몸이 일제히 굳은 순간.

오른쪽 아래에 게이트 정보가 떴다.

[대한민국 최초의 L급 게이트]

그러면서 영상이 뜨고 있었다.

“우리가 깼는데?”

하루 전의 영상이라고 뜨는 게 보였다.

[L급 게이트, 강력한 마력 때문에 긴 시간 촬영 불가]

그런 설명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게이트는 학자들의 말대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상황파악에는 얼마 안 걸리지 않았다.

“아직 던전이 클리어된 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주이안 헌터가 말했다. 그야 모르겠지, 우리도 방금 나왔는데.

[벌써 게이트가 일렁이기 시작한 것도 이틀 전입니다!]

게이트 학자가 다시 침을 튀기며 외치기 시작했다.

“이틀?”

난 게이트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일반적으로 헌터가 공략 중인 던전은 일렁임이 멎는다.

그러다가 공략팀이 죽으면 서서히 다시 일렁이기 시작하다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다음 공략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근데 얘는 왜 일렁였단 말인가?

그 답은 소예리 헌터의 입에서 나왔다.

“제가 사망처리 됐을 때부터 그런 것 같은데요?”

사망처리란 말에는 심장이 철렁했다. 난 소예리 헌터를 째려봐 주었다.

“흠흠.”

지난 일이니까 가볍게 나오는 거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난 새삼 헌터팀을 돌아보았다.

라이브 영상에 시선을 주는 세 사람 모두 진짜였다. 꿈도 아니었고.

우린 무사히 나온 것이다.

내가 나도 모르게 웃을 때였다.

[폭주까지의 시간을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주변을 봉쇄했지만 최대한 빨리 다음 공략팀을 정해야 합니다.]

[헌터협회에서 관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상마력 때문에 헌협 소속의 헌터들이 고통을 호소한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바삐 회의하기 시작했다. 난 게이트가 사라진 자리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 앞에는 국화꽃 무더기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 마력이 흘러나왔으면 위험했을 텐데, 게다가 통제까지 되고 있었으면 국화꽃 전해 주기도 어려웠을 텐데.

고호맙게도 쌓여 있는 국화꽃은 한 무더기였다.

와! 고귀한 희생! 애도! 감사하다!

개뿔!

내가 얼굴을 구겼을 때였다. 내 휴대폰에서 간절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신유리 헌터팀이 목숨을 내놓고 번 시간을 이렇게 허비할 겁니까!]

이름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돌아본 화면에는.

“와, 이 X끼 봐라?”

―콰직!

난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구겨 버렸다.

“어.”

그리고 당황했다. 하지만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헌터협회장 얼굴이 나오는데 어떻게 휴대폰을 안 구길 수가 있지?

“빡쳐서 그만.”

내가 손을 털자 주이안 헌터가 휴대폰을 꺼내 라이브를 켰다.

그 사이 소예리 헌터가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우리 진짜 사망처리 된 것 같죠?”

“추모 맞는 듯?”

어이가 없네?

그러는 사이 실시간 인터뷰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건 사흘 전의 게이트 흐름, 그리고 이건 어제의 게이트 흐름입니다. 명백히 게이트 흐름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야 두 명이나 사망처리가 됐었으니까…….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음 공략팀으로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게이트전략분석가 심형승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L급 던전인 만큼 가장 안정적인 구조를 가진 ‘휘황’ 길드의 공략팀이 적절해 보입니다.]

휘황이면 경기도 쪽에서 잘나가는 길드였다. 거기 길드마스터가 S급 탱커긴 하지.

[길드 휘황]

그때 라이브 화면이 바뀌면서 휘황 길드의 사람들이 앉은 테이블을 비추었다.

길드마스터 자리는 공석이었고, 길드원들은 침통한 표정이었다.

“뭐야, 죽었어?”

내 말에 답이라도 하는 듯이 그들이 화면을 하나 띄워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그리고 아픈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휘황 길드장의 모습이 생중계되었다.

“얼씨구.”

S급이 저렇게 병원 신세 지기는 쉽지 않은데?

그것도 탱커가?

“이거 외국 병원 아니에요?”

그때 소예리 헌터가 날카롭게 화면 구석을 짚었다.

휘황 길드장에게는 안타깝게도 쓸데없이 좋은 화질은 화면 구석의 영어 설명문까지 잡아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주이안 헌터가 답하는 사이 휘황 길드장이 말했다.

[저희는…… 아시다시피 주력 탱커가 저뿐입니다만, 정말 안타깝게도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태입니다. 물론 국가의 부름에는 당연히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만, 이 상태로는 도움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아주 침통한 얼굴이었다.

“…….”

그 모습을 보는 우리 넷의 표정은 비슷했다. 심지어 주이안 헌터마저도 그랬다.

X랄하고 있네…….

[저런.]

하지만 휘황 길드장이 정말 아픈지 증명할 시간이 없는 회의장의 공무원과 학자들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 시간에 다른 길드를 찾아보는 게 빠를 테니까.

[그렇다면 ‘서연’ 길드는 어떻습니까?]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길드마다 죄다 드러누워 있거나 던전 공략 중이라며 곤란하다는 기색이었다.

심지어 어떤 놈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주이안 헌터의 집중치료 스킬을 받지 않는 이상 손상을 복구하기 힘들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이안 헌터는 아주 떫은 얼굴이었다.

“얘네 이안 헌터님 없다고 입 막 터는데?”

소예리 헌터가 툭 뱉었다.

그러게요? 꿀잼이네?

“이야, 나라 꼴 잘 돌아간다!”

그렇게 국내 모든 순위권 길드들이 어떻게든 L급 입장을 마다하려고 기 쓰는 모습을 보면서 난 감탄했다.

아무래도 회의는 결론이 안 날 듯했다.

난 그 한심한 꼴과 국화꽃 무더기를 보다가 세 사람에게 물었다.

“우리 뒤풀이나 할까요?”

어차피 여기서 갑자기 우리가 나타나 ‘짜잔! 사실 클리어했습니다!’ 해 봐야 어떻게든 L급 안 들어가려고 빼는 저놈들 좋은 일만 해주는 꼴이다.

마음 졸일 사람들을 위해서도 언젠가는 밝혀야겠지만, 저놈들이 좀 더 바닥을 보이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럴까요?”

주이안 헌터가 불쑥 말을 받았다.

이 사람도 빡친 게 분명했다.

“몰래 나가자!”

소예리 헌터가 숟가락을 얹었다. 신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엿 좀 먹어보라고 하죠.”

그렇게 우리는 대동단결해서 집으로 튀어 버렸다.

반경 4km 정도에 헌터협회 소속의 헌터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우리가 걸릴 일은 없었다.

미쳤냐? A급한테 걸리게?

저런 데 걸릴 실력이었으면 L급 던전은 클리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습니다!]

라이브 방송이 씨불이거나 말거나 우린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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