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신재헌은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그는 상황파악이 안 됐다. 일단 반쯤 녹은 보스룸 벽이 보였다.
SS+급 보스룸인 만큼 강도가 강해서 L급 자폭도 버텼던 모양이다.
근데 그건 보스룸 벽 이야기고 난 보스룸 벽이 아닌데?
무엇보다.
[‘헌터 주이안(S)’이 ‘소생(L)’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그는 제 앞에 잔상을 남긴 시스템창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분명 소생 스킬은 소예리 헌터한테 들어갔을 텐데?
남은 횟수가 없었을 텐데?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신재헌 헌터님.”
주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주이안을 홱 돌아보았다.
그새 야전병원 스킬 효과를 받은 치유 스킬이 쏟아진 덕에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그게 하나도 감사하지 않았다.
그럼 주이안 헌터의 시력은?
아니, 소예리 헌터에게 소생 스킬을 쓴 시점부터 이미 그는 시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치유 스킬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기에 오히려 치유 스킬을 폭발적으로 퍼부었다.
자신은 더 잃을 게 없다는 것처럼.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어떻게 한 거죠?”
그런데 소생 스킬을 또 사용했다고?
세상에 대가 없는 힘은 없었다.
말없이 웃는 주이안을 보다가, 신재헌은 제 옆에 떨어진 도금 목걸이와 말레티아의 검을 바라보았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증거였다.
[인벤토리]
애장품이 걸려 있지 않은 물건들이 죄다 증발한 게 보였다.
정말 죽었었다는 이야기다.
“주이안 헌터의 시간을 되돌렸어요.”
그때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그 옆의 신유리는 착잡한 표정이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표정인데.
“시간을 되돌렸다면,”
시력을 되찾았다는……. 신재헌의 생각이 멎었다.
회귀 스킬이 사람한테도 사용된다는 게 신기한 건 둘째 치고, 그 뒤로 다시 치유 스킬을 사용했다면?
주이안은 이미 그 결과를 알려주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늘 눈을 맞춰 오면서 이야기하던 사람이 눈을 감고 있으니 어색했다.
그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는 게 없기 때문에.
“주이안 씨가 다시 소생을 사용했고.”
신유리가 소예리 헌터의 말을 받았다.
“……아.”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다시 시력을 찾았다면 주이안 헌터는 이곳을 그냥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소생 스킬을 사용해 신재헌 자신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왜?
삶에 미련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살아있는 이상 고통을 피하고 고통의 연장선인 죽음을 피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신재헌이 소예리를 돌아보았다.
“……다시 회귀 스킬을 쓸 순 없어요?”
소예리 헌터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시간의 힘을 다 썼어요.”
그렇겠지.
아무리 회귀 스킬이 시간에만 관여하는 스킬이라고 해도, 한 사람의 상태이상을 넘어서려면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할 테니까.
게다가 주이안 헌터가 시력을 잃은 건 아마도 소예리 헌터를 살렸던 시점.
시력을 되찾는 순간으로 회귀시키려면 소생 스킬의 스킬 사용 횟수까지 되돌려야 하니 대가는 더 컸을 것이다.
신재헌이 피가 나게 입술을 짓씹었다.
“더 모아 봐도, 회귀를 발동시킬 만큼의 시간의 힘이 나오지 않아요.”
소예리 헌터가 말을 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부여잡고 있었다.
“시간의 힘…….”
신재헌이 반쯤 녹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든 시간의 힘을 모아야 했다.
던전 내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던전 밖에 나가서 구해야 한다.
하지만 이대로 나가면 던전은 완전히 클리어 처리되고, 주이안 헌터는 이곳에 남는다.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가 시선을 내렸다.
“…….”
잔인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내리쳤다.
―쾅!
그리고 그 사이로 잘그락,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움찔한 그가 옆을 돌아보았을 때 보인 건 도금 목걸이였다.
잠깐만.
그가 도금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네 사람이 실험해본 결과 시간의 힘을 많이 주는 물건은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일단 긴 시간 헌터와 함께했을 것.
여러 던전에 같이 들어간 경험이 있고…… 무엇보다 이 게이트 내의 물건이 아닐 것.
이 목걸이보다 잘 맞는 물건이 어디 있지?
그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소예리 헌터님. 이걸 쓰죠.”
그가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소예리 헌터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신유리도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그게 화나서는 아닐 터였다.
신재헌은 신유리에게 목걸이를 흔들어 보였다.
“하나 더 사줄 거지?”
그 말에 신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웃어 버렸다.
“응.”
백화점이라도 털어줄 기세였다. 난 하나면 되는데.
그렇게 뇌까린 신재헌이 소예리 헌터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뭘 쓰시려는 겁니까?”
주이안 헌터가 물었다. 신재헌은 그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말리지 마세요. 어떻게든 되돌려서 빠져나갈 거니까.
“그―”
주이안이 뭐라고 말하려는 때였다. 나머지 셋이 동시에 말했다.
“다물어.”
“…….”
주이안이 입을 다문 사이, 소예리의 손에 신재헌의 목걸이가 쥐어졌다.
그리고.
―파삭.
마음을 굳힌 소예리 헌터가 목걸이를 강하게 쥐는 순간, 목걸이가 바스러지면서 환한 금빛이 그녀에게 흘러 들어갔다.
“……아.”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눈을 떴다.
금안이 시간의 힘으로 반짝이는 듯했다.
하지만 부족했던 걸까. 그녀는 곧바로 인벤토리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녀가 꺼내는 건 양산이었다.
신유리의 시선이 그 양산의 손잡이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은령고등학교 1학년…… ……반 신유리]
시간이 흘러 칠이 벗겨졌지만 이름은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신유리의 눈이 커졌다. 신재헌은 그녀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자신했다.
정말, 소예리 헌터가 그 사람이었구나.
게다가 소예리 헌터는 아까 사망 판정을 한 번 받았었으니, 저 양산이 인벤토리에 남아 있다는 건.
양산을 애장품으로 삼았다는 소리다.
‘정말 미안해…….’
기억에서 보았던 소예리 헌터는 끝내 두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할 말이 많지만 할 수가 없었다.
―파삭!
우산이 바스러지면서 금빛으로 변해 소예리 헌터에게 빨려 들어갔다.
저 우산 역시 긴 시간 소예리 헌터와 함께한 물건이니, 시간의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소예리 헌터가 눈을 떴다.
금안에 시간의 힘이 감돌았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설마.”
신유리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소예리가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재헌은 소예리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부족해요.”
신재헌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말레티아의 검(SS+)]
그는 미련 없이 무기를 꺼냈다.
이것 역시 긴 시간 저와 함께 있었으니, 충분히 많은 시간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럼 이것도요.”
소예리 헌터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무기는 다시 구하면 돼요.”
그 말에 주이안 헌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재헌 헌터님.”
말리려는 듯했다.
“가만히 있어요. 무기 없으면 그냥 주이안 헌터님 들고 휘두르면 되니까.”
신재헌은 어서 검을 없애라는 듯 소예리 헌터 쪽으로 손잡이를 내밀었다.
소예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 봤는데, 무기는 시간의 힘을 별로 주지 않아요.”
무기뿐만 아니라 많은 것으로 시도해 본 모양이었다.
소예리 헌터의 귀걸이나 다른 물건들도 많이 사라져 있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른 기준이 있는 것 같아.”
우산과 도금 목걸이는 가지고 있지만, 무기는 갖고 있지 않은 것. 그게 뭘까?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소예리가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러더니 신재헌의 손을 잡아 내렸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
그러더니 지나온 길을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신유리는 쫓아가려고 했지만 소예리가 손짓했다.
“가만히 있어! 금방 올게!”
어차피 던전은 클리어 상태이니 위험은 없겠지만…….
“……아?”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신재헌이 시선을 돌렸다.
신유리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
숨차게 뛰어본 게 얼마 만이지?
소예리가 뛰면서 생각했다. 숨이 차는 건 폐활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급해서 그랬다.
주이안 헌터의 시간이 흐를수록, 주이안 헌터의 눈을 되돌리기 위한 시간의 힘은 많이 필요할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간절하게 뛰었다.
이 던전 안에 있을, 마지막 희망을 찾아서.
―타타타탓!
그녀가 급히 뛰어간 곳은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은 공간이었다.
A급 던전에 홀로 떨어졌을 때. 어린 그녀는, 아직 이진아였던 그녀는 긴 시간 동안 외진 곳에 숨어 있었다.
무서워서. 나가 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아서.
하지만 사람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 몬스터들은 곧 그녀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때 느낀 공포를 기억했기에, 소예리는 더욱 빠르게 달렸다.
물론 기억과는 달랐다.
이미 클리어된 던전이었으니 몬스터는 없었다.
하지만 보스를 잡기 전까지 몬스터들이 몰려 있기는 했는지, 문 앞에 널브러져 있는 몬스터들의 잔해가 보였다.
―쾅!
소예리는 급히 문을 열어젖혔다.
“!”
그리고 튀어오를 듯 화들짝 놀라는 과거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흑갈색의 눈동자가 공포에 젖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누구……?”
미래의 나라고 할 필요는 없으니.
소예리 헌터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도와주러 왔어.”
나가자, 이곳에서.
그녀가 과거의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과거의 자신이 수도 없이 원했던 구원의 손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