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S급들은 대부분 동안으로 유명하다.
정확히는 각성하고 나서 나이가 들지 않거나, 전투에 가장 적합한 20대 중반 정도에 노화가 멈춰 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좀 차이가 나긴 하겠네.”
하필 신재헌은 고등학생 때 각성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키가 큰 편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입던 옷만 있으면 위장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과거의 제가 입은 것과 같은 옷을 준비한 신재헌은 소예리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그날도 소예리는 과거의 신재헌과 신유리를 쫄쫄 따라다니고 있었다.
뭐 도와줄 거 없나, 하면서.
그리고 마침 때가 왔다.
과거의 신재헌과 신유리가 카페에 들어간 것이다.
“나 화장실 좀.”
과거의 신재헌은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를 떴고, 카페에서 시선을 받으며 서 있는 건 신유리뿐이었다.
그리고 소예리는 조심스럽게 카페로 들어갔다.
신재헌은 소리 없이 카페 뒤쪽 문으로 난입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있는 과거의 자신이 아직 나오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 소예리에게로 다가갔다.
“어?”
그리고 놀란 척 그녀의 손에 들린 양산을 가리켰다. 그녀는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낡은 양산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
의아한 듯 고개를 들던 소예리는 제자리에서 펄쩍 뛸 듯이 놀랐다.
제가 마주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던 신재헌이 눈앞에 있었으니 당연했다.
“와, 혹시 이진아 누나 아니세요?”
카페 구석으로 슬금슬금 향하는 소예리에게 신재헌이 물었다.
아직 과거의 신유리는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저쪽이 비록 S급 초입이라고 해도 S급은 S급.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그, 음.”
소예리가 곤란한 듯 눈을 굴리다가 결국 말했다.
“맞아요.”
“엄청 건강해지셨……. 아, 헌터로 각성하신 건가요?”
이 당시 신재헌이 C급이었다고 해도, 시스템창을 볼 수 있는 이상 소예리가 헌터인 걸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비록 랭크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S]
물론 현재 신재헌의 눈에는 잘 보였다.
“그, 그렇게 됐어요.”
“진짜 축하드려요. 나으셔서 다행이네요. 그때 시끄럽게 해서 진짜 죄송했는데.”
신재헌은 아무렇지 않게 소예리에게 말을 붙였다.
과거의 자신이라도 이랬을 것이다. 그저 반가웠을 것이다.
각성한 후에 만난 이들은 죄다 신유리와 신재헌을 속여먹으려는 자들뿐이었지만, 각성 전에 만난 사람들은 그나마 덜했으니까.
물론 각성 전에 알았다고 해도 그들을 이용해먹으려는 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신유리가 다 쳐내 버린 후엔 없어졌지만.
“아, 아, 아니에요!”
좀 갑작스럽게 들이댄 게 미안하지만, 어린 신재헌 자신이라면 분명 이랬을 터였다.
그땐 말 그대로 어렸으니까.
모처럼 아는 사람, 그것도 헌터로서가 아니라 고등학생 신재헌으로서 알던 사람을 만났으니 들이댈 법도 했다.
“내가 더 미안했어요. 어린 친구들이 그렇게 신경 써줬는데.”
소예리 헌터는 작게 말했다. 신재헌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프셨는데 그럴 수도 있죠. 유리나 저나 아무 생각 없었으니까 괜찮아요.”
그 말에 소예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신재헌은 진짜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때 과거의 신유리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뭐야, 너 화장실 간다며? 언제 여기로 튀어나왔어?”
아무리 과거의 신재헌 역시 자신이라지만, 지금과는 괴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재헌은 최대한 과거의 자신인 척하며 답했다.
“갔다 왔잖아?”
다행인 건 일반인에서 C급으로 변할 땐 몰라도, C급에서 S급으로 올 때까지는 몸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다.
헤어스타일이야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 가릴 수 있었고.
신유리의 시선이 그에게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근데 이분은 누구야?”
“아, 이분이 그분이래.”
신재헌은 신유리에게 소예리를 소개했다.
“그분?”
“그 왜, 내 앞자리에 입원해 계셨던…….”
그 말에 소예리는 벌써부터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신유리는 달랐다.
“헐, 진짜? 완전 바뀌셨네? 헌터 되신 거예요? 엄청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그럼 다 나으신 거예요???”
물음표가 쏟아져 내렸다.
소예리는 신유리가 제 생각보다 훨씬 자신을 반가워하자 조금 당황한 듯했다.
“그, 그렇게 됐어요.”
“대박!”
신유리가 그녀의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자 신유리가 목소리를 팍 죽였다.
“랭크가 낮진 않으신 것 같은데 정말 축하해요.”
이 당시 신유리는 시스템창에서 헌터의 랭크를 보는 법을 몰랐다.
정확히는 헌터들이 본능적으로 갖는 ‘사람 보는 눈’이 아직 발달하기 전이었다.
신재헌이 자신 있게 들이댄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신유리가 제 머리 위의 S라는 랭크를 보는 순간 이상함을 눈치챘을 게 분명하니까.
“앗, S급이에요.”
소예리는 그녀의 말에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신유리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요? 진짜? 어떡해!”
신유리는 기쁜 얼굴로 소예리의 손을 꼭 쥐다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양산을 발견했다.
“어, 그거…….”
“이, 이거 돌려주려고 왔어요.”
소예리는 허둥대다가 말했다. 차마 쫓아다녔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신유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뭘 돌려줘요. 선물로 드린 건데. 아, 구멍 나서 좀 그런가?”
그녀가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신유리는 어느 때보다도 신나 보였다.
***
신유리는 기쁜 날엔 케이크라며 홀케이크를 통째로 사 버렸다.
“이, 이걸 다 먹어요?”
소예리는 당황했다. 신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남으면 버리죠, 뭐. 지구야, 미안해.”
그렇게 말한 그녀가 소예리에게 포크와 접시를 밀어 주었다.
이때는 아직 게이트로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전이었나?
신재헌이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는 사이.
그는 민감하게 인기척을 감지했다.
과거의 자신이 화장실에서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신재헌>>> 주이안 헌터님. 이 시간대의 저 좀 맡아주세요]
[주이안>>> 네?]
주이안은 잠시 당황했지만, 지켜보고 있었던 만큼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이대로 과거의 신재헌이 밖으로 나오면 끝이었다.
[주이안>>> 알겠습니다.]
신재헌은 주이안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 사이 소예리와 신유리는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땐 진짜 미안했어요. 제가, 제가 좀…… 미쳤었나 봐요.”
소예리는 벌써 몇 번이나 사과하고 있었다.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요? 기억 하나도 안 나요! 양산도 왜 없어졌나 했다가 새로 샀는데.”
신유리가 깔깔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소예리의 표정이 안도감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때…… 그때 혹시 상처받았을까 봐 너무 마음 쓰였거든요.”
“그런 걸로 상처받았으면 고등학교 못 다니죠.”
그러면서 신유리는 고등학교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욕 몇 가지를 읊어 주었다.
지금과는 달리 욕에 익숙하지 않은 소예리는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런…… 말도 하는구나…….”
“그니까 걱정 말라니까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신재헌의 눈앞에 채팅창이 떴다.
[주이안>>> 처리했습니다.]
C급이니까 기절시키긴 쉬우셨을…… 텐데.
쓸데없이 비장한 채팅을 보면서 신재헌은 잠시 멈칫했다.
혹시 맡아달라는 말을 다르게 이해하셨나?
[신재헌>>> 저 쓱싹당한 거 아니죠?]
주이안의 성격상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 쓸데없이 비장한 채팅이 수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간의 침묵 후 주이안의 긴 변명이 올라왔다.
[주이안>>> 조금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 시간대의 신재헌 헌터님은 아직 지금만큼 성장하지 않으신 상태라 힘을 조절하는 데에…….]
요컨대 목뼈 부러져 죽을까 봐 힘 조절하느라 신경 좀 썼다는 소리 같았다.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
신재헌이 들어오기 전 주이안이 혼자 진행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소예리는 신유리와 신재헌 팀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주이안 혼자 시도했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근데 이름은 왜 바꾸신 거예요?”
소예리는 주변을 정리하고 팀과 정식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그 전에 신유리가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다.
“원래 이름도 예뻤던 것 같은데.”
“아, 그…….”
소예리는 곤란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러다가 옅게 웃었다.
“……그냥요. 더 예쁜 이름 갖고 싶어서.”
그러면서 제 화려한 붉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예뻐진 만큼, 더 예쁜 이름 가지면 좋잖아요.”
“지금 이름도 예뻐요. 신유리, 소예리……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소예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신재헌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한 것이 우연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앞으로 잘해 봐요!”
소예리는 주변 정리를 빠르게 하겠다며 헤어졌다.
확실히 주이안이 이끌었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과거의 신유리가 진실을 안다는 점에서.
……물론 과거의 신재헌 자신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거야 내가 자리를 비키면 될 것 같고.
신재헌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그래서 넌 누구야?”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신재헌은 이미 제 목에 단도가 닿아 있음을 느꼈다.
서서히 시선을 돌린 곳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의 신유리가 있었다.
당연히, 단도의 주인도 신유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