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신재헌이 지금까지 지켜본 주이안은 온화한 성정으로 보였지만 화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누르고 다녀서 문제였지.
제 이야기를 억누른 세월이 너무 길어 풀어놓는 데에 조심스러운 사람.
특히 이 시점의 주이안은 더욱 그랬다.
‘좀 더 일찍 강단 있게 행동했더라면, 팀에 폐를 끼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주이안 헌터는 언젠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헌터팀이 행복 보육원 이야기와 함께 몇 번 언론을 시끄럽게 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팀의 누구도 주이안이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이안 본인 빼고.
그 후회, 없애 드립니다!
그는 이 시점의 주이안 헌터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건 모조리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보육원.
―콰직!
보육원의 컴퓨터 본체도 종잇장처럼 구겨 버린 그가 아이들 몰래 보육원을 빠져나왔다.
“내가 나중에 새 걸로 사 줄게.”
어차피 그가 지켜보는 동안, 아이들은 원할 때 컴퓨터를 만질 수 없었다.
주이안에게 편지를 보내라는 원장의 압박이 있을 때만 만질 수 있었지.
―탁.
대신 그는 원하는 아이들은 주이안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도록, 아이들의 놀이방에 쪽지를 남겨 놓았다.
[서울시 XX구 XX동 XXX-X 주이안 앞]
당시 주이안이 개인적인 연락을 받던 주소였다.
원장 놈은 이 놀이방에 들어와 보지도 않으니 아이들만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편지지와 볼펜을 한 무더기 올려놓았다.
[(속보) 행복 보육원 원장 구속]
뉴스가 나오는 TV를 뒤로한 그가 보육원을 벗어났다.
***
[행복 보육원, 앞으로 주이안이 직접 관리키로]
곧 뉴스가 떴다.
직접 보육원을 관리하게 된 주이안 헌터는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신재헌은 과거의 팀이 살았던 주택의 지붕에 앉아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애들도 좋아한대요.”
과거 신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보다 좀 더 앳되고 경쾌한 목소리다.
신재헌이 웃었을 때였다.
신유리는 불쑥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와, 근데 컴퓨터 박살 낸 거 주이안 헌터님이죠?”
듣던 신재헌이 멈칫했다. 야야, 그런 거 묻지 마!
아니나 다를까, 한 박자 늦게 주이안의 답이 들렸다.
“예? 제가요?”
“아니에요? 박살 났다는데? 이거 봐요.”
보여주지 마!
“이건…….”
주이안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 신재헌은 문득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 시간대의 제 목소리였다.
“애들이 데모라도 했나 보죠. 원장 성격도 X랄맞더만.”
그거지!
신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새 걸로 사 줘요. 어차피 증축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다행히 애들은 안 다쳤다니까 부순 놈만 찾아서 조지고…….”
신유리의 말이 이어졌다.
부순 놈 여기 있는데.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사이 시스템창이 떴다.
[‘기억-주이안’을 클리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눈앞이 천천히 새까맣게 물들었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게 분명했다.
***
[‘기억-소예리’에 진입합니다.]
주이안은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기이한 시스템 메시지를 받았다.
그래서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헌터 소예리(S)’의 정보를 동기화합니다…….]
뜬금없이 소예리 헌터님의 정보는 왜?
그렇게 따질 틈도 없이 그의 앞에 낯선 상태창이 펼쳐진 탓이었다.
[소예리 / 37세, 보조(S)
체력 : 2188771 (+454000)
근력 : 102894 (+12018)
마력 : 1340875 (+640218)
민첩 : 81993 (+22031)
지구력 : 191028 (+20011)
방어력 : 128675 (+17648)
항시적용 버프 “새로운 내 모습(L)” : 사망 전까지 해제 불가, 총마력-5%
특수 버프 “배움의 소리(SS)” : SS급 이하의 스킬 습득 시 히든 스킬 설명 무조건 개방
특수 : 소중한 기억(A, ‘헌터 소예리(S)’ 애장품 보너스 : 소지 시 획득하는 스킬의 랭크 1단계 증가, 소지 시 파티원에게 가하는 ‘방어’ ‘보조’ 계열 스킬의 효과 30% 증가, 전체 능력치+10%)]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 가운데 눈에 띄는 건 ‘새로운 내 모습(L)’이라는 버프였다.
항시 지속 버프.
이런 게 있다는 말씀은 안 하셨는데.
낯선 병원에, 낯선 상태창을 가지고 소환된 주이안은 잠시 헤매야 했다.
“분명…….”
‘기억-소예리’라고 했으니 소예리 헌터가 보여야 하는데.
낯선 상태창만 남기고 사라진 그녀는 병원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붉은 장발과 반짝이는 금빛 눈으로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사람이었는데도 그랬다.
“……?”
병원이 큰 것도 아닌데.
주이안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303호실 4번 침대요~”
그는 일단 병원을 편히 돌아보기 위해 직원으로 위장했다.
의심 없이 그에게 침대를 맡기고 떠나는 또 다른 직원은 바빠 보였다.
주이안은 말없이 환자의 침대를 옮겨 주면서 주변을 살폈다.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는 화려한 적발은커녕 갈색 머리칼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
그는 곧 병원 로비의 TV를 보고 깨달았다.
그가 소환된 곳은 은령종합병원이었고, 이곳은 아직 게이트가 터지기 전 시점이었다.
게이트가 터진 후 총천연색 머리칼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머리 색에 익숙해진 것뿐, 그 전에는 거의 검은색이나 흑갈색 머리칼이었지.
그런데 왜 이 시점으로?
그리고 소예리 헌터는 어디로 간 거지?
그가 의문을 풀지 못한 가운데, 해답 비슷한 것이 나타난 건 오후였다.
“저 학생 좀 401호실로 실어다 줘요.”
그렇게 급히 말하면서 떠나는 직원이 그에게 맡긴 사람은 익숙한 이들이었다.
“저 걸을 수 있어요.”
“다물고 말 안 들어?”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어린 학생 모습이었지만, 익숙했다.
“신재헌, 그러게 두 발 멀쩡하게 달고 왜 그딴 데서 미끄럼틀을 타?”
“인간은 자고로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쓰기 위해 진화해 왔다니까? 더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쓰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지 않으면 자연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다물어.”
“넵.”
어린 신재헌과 신유리였다. 다리를 다친 쪽은 신재헌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이니, 아마 은령고등학교 교복일 것이다.
“…….”
두 사람의 어릴 적 모습과 마주치는 건 처음이라, 당연히 주이안은 순간 멈칫했다.
“침대 어디로 끌면 돼요?”
그때 신유리가 물었다.
정신을 차린 주이안이 신재헌이 누워 있는 침대를 끌었다.
“4층으로 올라갈 거예요.”
아는 척하면 안 되니까 애써 돌아섰지만, 두 사람에게로 자꾸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도 신유리 헌터님은 쾌활했다. 그리고 걱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신재헌 헌터님이 눈을 감을 때만 걱정스럽게 바라볼 만큼.
이때도 똑같았구나.
걱정 말라는 듯 애써 씩씩하게 움직이는 신재헌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주이안은 잠시 쓴맛을 머금은 입가로, 결국 옅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의아해했다.
왜 ‘기억-소예리’에 두 분이 나오는 거지?
***
그 답은 401호 병실에 있었다.
“……!”
주이안은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깨달았다.
이 병실은 처음 그가 소환된 병실이었다.
그리고 이 병실은 환자들이 자주 바뀌었는데, 유일하게 바뀌지 않는 환자가 있었다.
“이진아 환자님.”
“네.”
간호사의 말에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여자 환자.
다른 자리의 침대가 몇 번이고 드나들 동안 그녀의 침대는 그대로였다.
그녀가 쳐둔 커튼 안쪽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뀌는 게 없었다.
[이진아]
분명 이름이, 이진아라고 했는데.
“……?”
주이안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새로운 내 모습(L)]
그리고 버프창을 보다가,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눈을 크게 떴다.
***
주이안은 얼마간 병실을 지켜보다가 결론 내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이진아라는 환자는 소예리 헌터의 과거가 분명했다.
아프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의 소예리 헌터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지만.
[새로운 내 모습(L)]
그 증거로 그녀를 볼 때마다 문제의 버프가 반짝거렸다.
“안 아프니까 가요, 좀.”
“그놈의 혈압 맥박은 맨날 재요?”
장기입원환자인 그녀는 굉장히 신경질적인 상태였다.
지금의 소예리 헌터를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맞은편에는 소예리 헌터, 아니 이진아에게 몇 번 말을 듣고는 거의 음소거 상태에 접어든 신재헌과 신유리가 있었다.
하지만 소예리 헌터의 스탯을 가지고 있는 만큼, 두 사람의 이야기 소리는 잘 들렸다.
“저분 말이야. 창가에 계신 분. 맨날 저렇게 햇빛 보면 피부 따갑지 않으실까?”
신유리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갑지. 우리도 저렇게 햇볕 쬐면 피부 빨개지는데.”
신재헌의 답에 신유리는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신유리 헌터는 웬 양산을 가져와 소예리 헌터의 폴대에 달아 버렸다.
“뭐예요?”
신경질적인 반응만 돌아왔지만 신유리는 웃으면서 자리를 빠져나왔다.
“시끄럽게, 진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신유리의 얼굴은 밝았다.
양산이 원하던 모양으로 해를 가려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얼마 후.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린 신재헌 헌터가 퇴원했다.
그리고 방에 남은 이진아는 그들이 간 자리를 쌀쌀맞은 눈으로 보다가, 커튼을 쳐 버렸다.
하지만.
“……애들한테 좀 심했나.”
조금 후회하다가도.
“몰라, 시끄럽게 굴던 애들 가니까 좋다.”
그렇게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때쯤이었다.
[속보입니다. 서울시 은령구에 있는 은령고등학교에서 기현상이 일어나 인근의 사람들이 모두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해 당국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문득 나오는 뉴스 소리에 이진아는 커튼을 확 걷어 버리고 TV를 쳐다보았다.
놀란 얼굴로.
“세상에, 저거 저 자리 있던 학생들 학교 아녀?”
병실 사람들도 놀라며 쑥덕거렸다.
그리고 이진아는 굳은 것처럼 TV에 시선이 못 박힌 채 움직이지 못했다.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속보) 은령고 ‘기현상’ 발생…… 은령고 학생 및 교직원 전원 행방불명]
속보는 연신 은령고등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걸 어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얼마 안 있어 속보가 다시 떴다.
[(속보)은령아파트도 ‘기현상’ 확인…… 은령고와 4km 거리]
“은령고 애들 거의 다 저기 살지 않아?”
“맞아요.”
“세상에.”
병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이진아가 침대 시트를 꽉 그러쥐는 게 보였다.
“…….”
주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이진아는 소예리 헌터의 과거가 맞다.
그녀는 누가 봐도 두 사람을 걱정하고 있었다.
신유리 헌터가 양산을 매달아줄 때까지만 해도 날카롭게 대했던 그녀는 두 사람이 떠나고 난 후에야,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선뜻 내밀어진 호의에 자신이 짜증만 냈다는 것도.
그렇게 미안해하던 차에 은령고에 게이트까지 터진 것이다.
“…….”
은령고 게이트는 어차피 두 분이 클리어하실 것이다.
그럼 은령아파트 게이트를 처리해야 하는 건가?
[‘기억-소예리’]
하지만 이곳은 신유리나 신재헌의 기억이 아니라 소예리 헌터의 기억이었다.
소예리 헌터와 관련된 무언가를 도와드려야 할 것 같은데…….
은령아파트의 게이트가 무사히 해결되기를 바란 건 소예리 헌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던전 경험으로 다져진 주이안의 본능은 이 던전의 목적이 은령아파트의 게이트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걸 어째.”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얼마 안 있어, 이 던전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돌발 게이트의 범위에 들어섰습니다!]
[던전 ‘강제휴식(A)’에 진입합니다.]
……병원이 게이트화됨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