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이거 생각보다 더 묵직한데?”
말레티아의 검은 신재헌의 귀속 아이템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면 들어볼 기회가 있었을 리 만무했다.
덕분에 난 검을 쓰는 데에 애를 먹었다.
내가 쓰던 가벼운 종류의 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한 손으로 들 수는 있는데…….”
신재헌의 능력치를 갖고 있으니 들고 휘두르는 거야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세밀한 조작이 어려운 것이다.
―키에엑!
덕분에 몬스터를 찌르려고 했다가 베고, 베려고 했다가 뭉개 버리는 참사가 일어났다.
물론 이런 랭크의 던전에서 그런다고 클리어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니었다.
“이러다가 만나겠네.”
난 멀리서 들려오는 과거의 나와 신재헌의 인기척을 느끼면서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앞에 누가 있다는 걸 과거의 내가 알아채면 곤란했기 때문에, 내가 처리한 건 주로 숨어 있는 몬스터들이었다.
“이놈도 지하에서 치고 올라와서 번거로웠지.”
특히 이런 지하에 숨어 있는 거대 지렁이 같은 놈들 말이다!
[화염검(SS)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지렁이는 화염검을 두른 말레티아의 검으로 찌르니 재도 못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깔끔해서 좋긴 하네.
“오늘따라 던전이 쉽네.”
지상에서 과거의 내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야 쉽겠지.”
난 작게 뇌까렸다.
이게 미래의 너란다! 아니, 상태창이 이러니까 신재헌인가? 아아아무튼 합작이란다!
자랑스러워하렴!
난 거대 지렁이 굴에서 빠져나와 빠르게 앞서 나갔다.
그때 시스템창이 떴다.
[히든 퀘스트 ‘뒤따르는 자’]
근데 시스템창이 좀 흐릿했다. 과거라 화질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일 리는 없고.
[클리어 보상 : B랭크 각성]
S랭크 된 지가 언젠데 B랭크 각성을 보상으로 걸고 있는 걸 보면 이건 아마.
과거 신재헌의 퀘스트일 것이다.
같은 신재헌이라고(?) 미래의 신재헌 시스템창을 보고 있는 나에게까지 노출되는 듯했다.
난 그 아래의 클리어 조건을 살폈다.
[신유리를 수호하며 A급 던전 클리어]
“…….”
그리고 잠시 멈칫했다.
신유리를 수호하며.
……이 말이 자꾸 눈에 띄어서.
퀘스트도 랭크업도 사람의 간절한 소망으로 생겨나는 걸 생각하면…….
이때의 신재헌은 그만큼 간절하게 나를 지키고 싶었다는 뜻이다.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정답이 가까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억의 주인’을 만족시키십시오.]
이 클리어 조건.
이 시점의 신재헌을 강하게 만들어주면 클리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렇게 A급 던전을 클리어한 후.
난 신재헌의 랭크업을 계속해서 도와주었다.
어차피 신재헌이 어떤 던전을 클리어해서 S급이 되었는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신재헌의 스탯 성장은 눈에 띄게 빨랐고, 그가 랭크업이 느렸던 건 히든 퀘스트 조건과 부합하는 던전을 찾는 데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게 뭔지 알지롱!
문제는 어떻게 그 던전에 가도록 이끄느냐는 점이었다.
“두 번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난 그걸 간단하게 해결했다.
헌터협회의 게이트 관리실 직원을 잠시 눕혀준 후 게이트 관리 프로그램에서 과거의 나와 신재헌의 담당 던전을 바꿔 버렸던 것이다.
이땐 사실상 협회 소속이나 다름없이 부탁받은(이라고 읽고 부여된) 던전만 클리어했거든.
―파삭!
물론 CCTV는 사각지대에서 박살내준 후였다.
[헌터협회 침입자 발생…… 피해 없어]
뉴스가 뜨긴 했지만 훔친 건 없었으므로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조작한 대로 신재헌은 A급 랭크업 던전과 S급 랭크업 던전을 차례로 클리어했다.
‘신재헌이 수련하는 것’ 자체가 이 던전의 목적이 아닌 탓인지, 그가 수련하는 시간은 금방 빨리감기하듯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클리어는 쉬웠다.
이내.
“……!”
S급 승급 던전에서 과거의 신재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왜 그래?”
과거의 난 그를 의아하게 돌아보았다가, 시스템창을 봤는지 눈을 크게 떴다.
“고생했어! 진짜로 고생했어!”
내가 그를 꼭 끌어안는 걸 보면서 난 흐뭇하게 웃었다.
자, 그럼 이쪽은 클리어…….
[‘기억-신재헌’ 실패하였습니다.]
[처음 상태로 리셋됩니다.]
[실패 횟수가 1회 증가합니다(1/3).]
“엥?”
왜??? 나 실패야???
―파앗!
그때 눈앞이 번쩍이면서, 다시 익숙한 헌터협회의 어두운 복도가 보였다.
“흑…….”
우는 과거의 내 목소리. 다시 정말 처음이었다.
뭐야?
신재헌 아주 만족스러웠거든? 걔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거든?
근데 왜 실패야?
내가 당황할 때였다.
[……가 ‘기억-신유리’를 클리어했습니다.]
시스템창이 떴다.
누구라고?
다시 처음으로 리셋되면서 복잡하게 시스템창이 오가는 통에 이름까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름을 다시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개인 던전을 클리어한 파티원이 ‘기억-신재헌’에 진입합니다……]
시스템창과 함께.
―팟!
그 사람이 내 옆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나와 그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
던전에 던져지고 나서 당황해봐야 좋을 건 없다.
던전에 들어와서 가장 좋은 마음가짐은, ‘아, 원래 이런 동네구나’ 하고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나도 무던하게 넘어가는 것.
그게 신재헌이 오래전부터 터득해온 그만의 던전 공략법이었다.
“근데 그것도 정도가 있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스템창부터 갈아 치워버리는 이런 파격적인 던전은 그도 처음 보았다.
[‘헌터 주이안(S)’의 정보를 동기화합니다.]
시스템창에 이게 떴을 땐 제 눈이 잘못됐든 시스템창이 돌아버렸든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동기화되어 있었다.
[주이안 / 29세, 힐러(S)
체력 : 1432239 (+302114)
근력 : 99816 (+1066)
마력 : 1992127 (+907774)
민첩 : 100213 (+9978)
지구력 : 172038 (+30211)
방어력 : 149915 (+102729)
특수 버프 “주시의 알림(S)” : 파티원 체력소모 및 디버프 발동 시 자동알림
특수 버프 “카라닐의 눈(SS+)” : ‘카라닐의 단안경(SS+)’ 착용 시 발동 가능, 발동 시 1분당 마력 0.5%를 소모하여 적의 공격 경로 파악
특수 :
- 주시의 렌즈(S, ‘헌터 주이안(S)’ 애장품 보너스 : 아이템 랭크 강제 증가(C>S), ‘주시의 알림’ 발동 직후 1초 이내 사용한 치유계 스킬 효과+20%)
- 노트(B, ‘헌터 주이안(S)’ 애장품 보너스 : 현재 소속 중인 파티원들과의 ‘헌터채팅 친구추가 일자’를 기준으로 1일 경과당 치유 효과 +0.01%(개별적용))]
“……마력이 높으신 줄은 알았지만 장난 아닌데.”
아이템 추가 능력치까지 포함하면 거의 300만에 육박하는 마력이었다.
“내 마력이 추가능력치까지 20만 정도일 텐데.”
거의 15배 수준 아닌가? 그가 감탄했다.
게다가 주이안 헌터의 힐이 유독 효과가 좋은 이유가 있었다.
추가로 덕지덕지 붙어 있는 버프를 보면.
“……그래도 쓸 순 없지.”
문제는 주이안 헌터의 치유 스킬 효과가 아무리 좋든, 그는 힐 스킬을 사용해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시력저하(L) 94%]
주이안 헌터의 시력저하 디버프 효과까지 고스란히 가져온 상태였으니까.
당연히 새빨갛게 변한 시스템창은 치유 스킬을 더 사용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체질에도 안 맞는 힐러 클래스에 앞까지 제대로 안 보인다니 최악이었다.
게다가 아까 뜬 시스템창에 의하면 이곳의 ‘기억의 주인’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능력치가 줄어든다.
그건 물론이고 여차하면 사망까지.
까다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딜러인 그에겐 답답할 정도로 좁은 시야에 간신히 간판이 눈에 띄었다.
[행복 육아원]
익숙한 이름이었다.
[‘기억-주이안’에 접속합니다.]
아까 분명히 그렇게 떴으니까 그가 만족시켜야 할 기억의 주인은 주이안 헌터였다.
“문제는 시점이 언제냐는 건데.”
그가 소환된 곳은 행복 육아원 부지의 공터였다.
그는 일단 제 복장부터 확인했다.
“뭔 편의점 갈 때나 입을 것 같은 옷을 주냐.”
그는 새하얀 반팔티에 까만 바지를 입은 채였다.
반팔티에는 헌터협회의 문양과 함께 ★With HUNTER★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헌터협회에서 헌터 인식 바꿔보겠다고 뿌린 티였다.
당연히 디자인은 구렸다.
그는 눈썹을 치켜올린 채 행복 육아원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창문으로 보이는 건 거대한 TV였다. 휴대폰도 없는 상태였지만 TV 하나면 시기를 짐작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7월 22일]
마침 뉴스가 나오는 TV에는 아쉽게도 날짜만 떠 있었다.
하지만 신재헌은 실망하지 않았다. 과거 어느 시점인지는 몰라도 행복 육아원이 박살나지 않은 시기면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유리 헌터팀, S급 던전 입장]
마침 그들의 소식이 뉴스로 뜨고 있었다.
정확히는 과거 그들의 소식이.
어디 S급이지?
신재헌이 옛날에 돌았던 S급 던전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고 있을 때였다.
[이번 태안에서 나온 S급 던전은…….]
뉴스에서 나오는 말에 신재헌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게딱지 던전이구만?
그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럼 시점은 아마 주이안 헌터가 합류한 지 일 년 정도 지난 시점일 것이다.
근데 이 시점의 나랑 유리랑 같이 주이안 헌터도 던전에 들어가 버렸을 텐데?
저길 쫓아가야 하나?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럴 거면 여기에 굳이 소환된 이유가 뭐지?
이때 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잠깐……. 그가 멈칫하는 사이 뉴스는 계속 진행되었다.
[이번엔 얼마나 걸릴까요?]
앵커의 질문에 답하는 건 헌터전문가라고 주장하는 자였다.
물론 저런 놈치고 던전 들어가본 놈은 없었다.
[신유리 헌터팀이라면 떠오르는 신흥 강자 팀 아니겠습니까? 특히 국내 유일, 최초의 S급 힐러인 주이안 헌터를 영입하면서 입지가 매우 탄탄해졌죠.]
[그렇습니다. 다른 길드에서도 영입을 원한다던데요?]
앵커의 질문에 헌터전문가가 답했다.
[어유, 영입 대상 1순위죠. 그런데 신유리 헌터 본인의 반대가 거셉니다.]
[왜죠?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팀인 헌터 신재헌에 대한 조건을……]
신재헌은 제 욕을 따분한 눈으로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형도 던전 들어갔대!”
고아원의 아이들이 우르르 TV 앞으로 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들 사이로 통솔하는 어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순간이었다.
[돌발 게이트의 범위에 들어섰습니다!]
시스템창이 불쑥 떴다.
설마? 신재헌이 멈칫했다.
[신재헌 외 24인, B급 던전 <동심파괴>에 입장합니다.]
[던전 목표 : 보스 클리어]
신재헌은 그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기억-주이안’의 클리어 조건을.
그들 세 명이 저 태안의 S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
주이안 헌터의 행복 육아원에는 소리 소문 없이 게이트가 터졌다.
그리고 주이안 헌터는 그걸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괴로워했다.
게이트가 언제 뜨는지 미리 알지 못하니 막을 수도 없는 재앙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태안은 지켰으나 자란 곳은 지켜내지 못한 비운의 헌터]
당시 언론에서는 자극적인 기사를 뿌려대며 그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신재헌의 입매가 비틀렸다.
[행복 육아원 원장 ‘있을 수 없는 참사’…… 다행히 본가에 있어 화 피해]
원장만 빼고 싹 죽었다는 사건. 직원들도 죽었다고 했지만, 이곳엔 직원이 없어 보였다.
“이게 뭐야?”
“몰라. 갑자기 이상해…….”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신재헌은 그걸 보면서 던전 기여도 창을 살폈다.
이걸 보면 같이 입장한 헌터가 몇 명인지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없음]
기여도창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자신이야 이 시간대에 속한 헌터가 아니니 안 뜰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하나도 이름이 뜨지 않는다는 건…….
분명 원장은 그랬다.
[육아원의 선생님들이 잘 인솔했으리라 믿고…….]
아이들은 직원들과 함께 있었다고.
하지만 언론에서 원장이 떠든 것과는 달리, 이곳에는 직원은커녕 어른 한 명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 중 각성한 사람은 없었다.
B급 돌발 게이트에서 이 아이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공포에 떨며 죽어갔던 것이다.
“…….”
주이안 헌터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곳의 상태가 어떤지.
어른이 상주하지 않는 곳이란 것도, 원장이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그렇기에 그는 그리도 괴로워했을 것이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곳에서 공포에 잡아먹히고 몬스터에게 집어삼켜진 아이들을 감히 애도하지도 못하면서.
그가 바꿔줘야 할 과거는 확실했다.
이곳의 아이들을 구하는 것.
―탁.
신재헌이 창문을 열고 고아원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