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머릿속이 비었다가, 뜨거워졌다가, 하얘졌다.
그는 내가 세운 벽 너머에 서서 끝끝내 나를 기다리다가, 그 벽을 부수고 넘어와 버렸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그가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던 내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눈에서, 내가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걸 알아챈 순간.
그래서 그 침투는 불쾌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되었던 것처럼.
“비밀연애 하자. 너랑 나랑만 아는 거야.”
신재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닿아 있는 코끝으로 열기가 전해져 왔다.
벽을 짚었던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딱 하나만 약속해주면 돼, 신유리. 달라지는 건 없어.”
간절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메웠다.
“네 안에서, 내가 일 순위라는 걸 인정해주기만 하면 돼.”
그거면 돼, 나는.
그렇게 속삭인 그가 다시 한번 내게 파고들었다.
“……!”
그와 나 사이에는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깊은 접촉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상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너일 거라고……, 나는 아마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면서 생각했다.
손끝이 저릿해졌다.
나도 모르게 힘이 풀려 그의 몸을 꽉 붙들자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무릎이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를 단단히 받쳐 안은 그가 내게 마음껏 들이쳤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꽉 잡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나만이 풀어줄 수 있는 갈증에 아주 오래전부터 시달렸던 사람처럼.
“……!”
그가 내 작은 신음마저 삼켰을 때, 난 깨달았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신재헌이 특별한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이미 특별했고 내 안에선 없어선 안 되는 사람이었으며 유일한 의미를 가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내 안에는 이미 그만의 자리가 있었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그만의 자리.
없어지면 다른 걸로 채울 수도 없이 내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런 단단한 기둥 같은 자리가.
“…….”
숨을 나눈 끝에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끌어안은 채 입맞춤을 끝내고도, 그는 한참 동안 나를 놓아주지 못했다.
“답을 듣기가 두렵네.”
그렇게 말한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참았는데.
그렇게 뇌까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 시간 억누르다가, 참다못해 터져 버린 것일 터다.
이전에도 그는 그랬다.
‘10초만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 봐.’
줄곧 자신을 친구로만 보는 내게.
나는 그런 그를 애써 일으켜 마주 보았다.
“…….”
그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난 그 푸른 눈동자를 보다가 말했다.
“……또 울겠다, 너.”
내 말에 신재헌이 웃어 버렸다.
“태어나서 지금처럼 무서웠던 적이 없거든.”
이 벽, 이 선을 넘어온 건 처음이기에 그럴 것이다.
난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넌 항상 나보다 나를 잘 알았지.”
난 그의 손을 보면서 생각했다.
수없이 생채기가 났다가 나아서 단단해진 손이었다.
“난 지금처럼, 늘 네게 나를 이해해주기를 강요했고.”
신재헌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부인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러자 그는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
난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밀연애 하자.’
그런 제안도 나 때문인 걸 안다.
그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었다.
그래, 너 말고 누가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을까?
누가 날 놀라게 하지 않고, 불쾌하게 하지 않고 내 선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
네가 아니면,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울지 마.”
그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울고 있었다.
내게는 그게 보였다.
“약속할게.”
그런 그에게 내가 속삭였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미 오래전부터 정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내가 무엇을 하고, 어디에 시선을 주든, 항상 마지막은.”
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반드시 너로 맺겠다고.”
눈을 크게 뜨는 그에게 내가 먼저 입을 맞추었다.
충동적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
나를 받아들이던 그가 곧 적극적으로 내게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주도권을 앗아간 그의 팔이 나를 단단히 받쳐 안았다.
숨 가쁠 정도로 저돌적이면서도, 애절한 입맞춤이었다.
***
2주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우리는 L급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래서 신재헌 헌터님 메인퀘는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했죠]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엥 언제? 어느새?]
개인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던전에서 나갈 수 없다.
주이안 헌터가 이번 던전 내에서 시력을 잃지 않는 한 주이안 헌터는 통과.
소예리 헌터는 회귀 스킬을 익혔으니 통과.
나는 은하 서버에 저장된 내 능력치를 넘겼으니 당연히 통과.
하지만 신재헌의 ‘원하는 것을 완전히 가져라’ 퀘스트는 끝났다는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쌈빡하게 답하니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뭐야뭐야뭘가졌는데]
그 말에 신재헌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결국 뜯어냈거든요]
뭘 뜯어내?
뜬금없는 말에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답은 의외로 주이안 헌터에게서 나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렇게 저를 속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속여?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투쟁의장갑 좀 보겠다고 받은 다음 애장품 걸었음]
난 그 채팅을 보고 입을 떠억 벌렸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아니 날강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미쳤ㄴ]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끝까지 쓰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신재헌 헌터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날씨 좋네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비 옵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저 비 좋아해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언제는 검 잡을 때 손 미끄러져서 싫다며]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사람은 원래 바뀌는 거죠]
신재헌이 뻔뻔하게 응수하는 사이 내 얼굴은 조용히 타올랐다.
―덜컹.
내가 있는 곳이 마지막 던전으로 향하는 마차라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속절없이 빨개진 내 얼굴을 누군가에게 해명하려 애써야 했을 테니까.
“애장품을 걸었다는 건 사실인 것 같은데…….”
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원하는 것을 완전히 가져라.]
신재헌이 받은 그 퀘스트의 조건이 투쟁의 장갑이 아니었던 건 분명했다.
그랬으면 이제 와서 그 장갑을 노릴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그 사이에 다른 무언가가 ‘충족’된 거겠지.
그리고 아마 그건…….
[‘헌터 신재헌(S)’의 이름을 ‘신재헌놈’에서 ‘뻔뻔한놈’으로 변경합니다.]
“…….”
시스템창을 보던 난 거듭 마른세수를 했다.
[‘헌터 신재헌(S)’의 이름을 ‘뻔뻔한놈’에서 ‘걔’로 변경합니다.]
걔. 그래. 그 애.
얼굴을 묻은 두 손 사이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