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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87)화 (187/218)

187화

신재헌이 나를 부른 곳은 내 개인 연무장이었다.

내 별장 구조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물러가라.”

그는 내가 오자 다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

이내 S급의 기감에 아무도 잡히지 않게 되었을 때, 난 입을 열었다.

“나보다 내 저택 구조를 더 잘 아네.”

그 말에 신재헌이 가볍게 웃었다.

“그럴 리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맞이하는 그의 차림은 편해 보였다.

“…….”

“…….”

그와 나 사이답지 않게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그가 울었던 날 이후로.

그러고 나서 분명 채팅창에서도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그것들은 다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분명 대화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도. 그와 채팅할 때조차 어색함을 느꼈으면서도.

난 마치 그와 어제 헤어졌던 것 같은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그만큼, 신재헌을 줄곧 생각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왠지 모르게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바빠?”

신재헌이 불쑥 물었다. 이미 오고 나서 묻는 게 어이가 없었다.

난 양손을 옆으로 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바쁘지, 그럼. 좀 전엔 카를렌타 영애가 왔는데…….”

이야기를 해주던 난 멈칫했다.

잠깐, 카를렌타 영애가 미야에 오고 싶어 한다는 걸 말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럼 이놈은 여기로 오다가 카를렌타 영애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신재헌이 말을 받았다.

“카를렌타 가의 마차는 오다가 봤어.”

그럼 그렇지. 난 황당해서 볼을 긁적였다.

“말도 없이 웬일이야?”

이 말은 분명 내가 전에 들은 것 같았다. 묘한 데자뷔를 느끼는 순간.

“보고 싶어서.”

신재헌의 말이 얼마 전에 했던 내 말과 겹쳐 들리는 듯했다.

그날이 오버랩되면서 순간 말문이 막혔을 때, 신재헌이 뜬금없이 물었다.

“긴장돼?”

그 말에 난 픽 웃어 버렸다.

“안 되겠냐?”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뭘 묻는지는 뻔했다.

L급 던전 안에 있는 L급 던전.

그것도 히든루트를 타 버려서 L급 이상의 난이도를 가졌을 그 던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욕심 많은 사람이라서, 반드시 네 명 모두가 살아 나가야만 하니 더욱 그랬다.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난 급하게 할 말을 떠올렸다.

“맞다, 우리 마지막 던전에서 부상은 최소화해야 돼.”

내 말에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물었다.

“왜?”

왜냐고? 음…….

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예리 헌터도 어지간히 빡쳐 보였지만 이쪽은 화염검 스킬 있는 사람 아니랄까 봐 반응도 불같을 게 분명했으니까.

“주이안 헌터가, 음.”

내가 말을 고를 때였다. 신재헌이 불쑥 말을 가로챘다.

“눈이 안 좋아져서?”

“응, 그……걸 알아?”

이놈이 그걸 어떻게 알지? 내 말에 신재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어쩌다가 알게 됐어.”

“언제?”

“늦게.”

문답이 빠르게 오갔다.

내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도 늦게 알아서 못 막았어.”

하긴, 일찍 알았으면 주이안 헌터를 기절시켜서라도 힐하지 못하게 했을 놈이 이놈이었다.

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주이안 헌터가 더 이상 시력을 잃게 해서는 곤란하다.

딜러이자 탱커인 나와 신재헌이 몬스터 대응 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마침 내게 방어1검식에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스킬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내가 선두에 서면 데미지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네가 선두에 설 생각은 하지 마.”

신재헌이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말했다.

그럼 네가 선두에 서게? 난 황당해서 다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 SS급 방어스킬 생긴 거 잊었어?”

게다가 S급이다.

스탯도 은하 서버의 내 기존 능력치를 넘어 버렸다.

내가 선두에 서는 게 낫다.

하지만 신재헌이 말했다.

“그래도.”

그가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약속은 그대로니까.”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곧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너보다 먼저 죽겠다는 약속.”

그의 목소리가 조용한 연무장에 울렸다.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순간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내가 뭐 때문에 그렇게 다급해졌었는데! L급 던전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든 생각이 뭐였는데!

정말 싫었다.

난 죽는다는 말이 제일 싫어.

내 입매가 비틀렸다.

“너 그 말 하지 말랬지.”

그러자 신재헌은 곧바로 받아쳤다.

“그럼 네가 그러려는 건 괜찮고?”

그 말에 난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그―!”

그래, 이놈하고 말해 봐야 결론은 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도 물러설 수 없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됐다. 그 말 하려고 온 거면 간다.”

내가 돌아섰을 때였다.

―탁.

어느새 다가온 신재헌이 내 팔을 잡았다.

“어딜 가?”

“어딜 가냐고?”

난 그를 홱 돌아보았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 같으면 친구가 ‘유사시에는 먼저 죽겠으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같은 소리 하러 오면 곱게 듣고 있겠냐?”

내 말에 신재헌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았다.

“친구.”

낮게 뇌까린 그가 하, 짧게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

긴 침묵이 우리 사이를 덮는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물었다.

“그럼 친구 아니고 다른 놈이면 그래도 돼?”

“뭐?”

뜬금없는 소리에 뭔 말인가 싶었다.

그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짙푸른 눈동자에 기묘한 열기가 어렸다고 생각한 순간.

“친구가 아니면, 너 대신 죽어도 되냐고.”

―탁.

나도 모르는 새 물러선 자리에는 벽이 있었다.

묘한 열기가 벽과 그 사이를 메웠다.

그가 어디에 가둔 것도 아닌데, 그냥 벽에 등이 닿았을 뿐인데.

그의 숨결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새파란 심해 같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거기서 눈물이 맺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울고 있었고, 지금은 화난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왜인지 그때도 지금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나, 너랑 친구 안 해.”

그가 말했다. 난 눈을 크게 떴다.

하얘진 머릿속에 그의 말이 채워졌다.

“아니, 오래전부터 친구가 아니었어. 너한테는 내가 친구였을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었어.”

“뭐―”

멍청하게 되물을 틈도 없었다. 입술을 깨물던 그가 말했다.

“이렇게.”

뜨거운 숨을 풀어놓은 그가 말을 이었다.

“생각만 해도, 네가 없어지는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고,”

갈라진 목소리.

갈증과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와 나 사이를 울렸다.

“어느 순간 너 없는 세상이 무서워서, 차라리 너보다 일찍 죽어버릴까 싶은 순간부터, 아니었던 것 같아.”

탁한 눈동자에서 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 공간이라고는 벽과 그 사이의 좁은 이곳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선에 갇힌 것처럼.

“난 오래전부터 너랑 친구 아니었어.”

신재헌이 말했다. 난 숨도 쉬지 못한 채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는 나한테 계속 친구, 친구, 내가 돌아버릴 것 같아도 친구라고 말했지만 넌 내게 오래전부터 친구 같은 게 아니었어. 너는…….”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우주였어.”

그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식상하게 들려?”

더욱 깊어진 듯한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생활반경, 내 집, 내가 아끼는 것들 모두 네가 쥐고 있거나 너와 관련된 것들뿐이더라.”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게 불쾌한 적이 없었어. 단 한 번도 없었어. 그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그래서 넌 내 우주였어.”

그는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우주에게 감히 나만 사랑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거든. 근데 정말―”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죽어버릴 것 같으면, 못 견딜 것 같으면, 어디든 갖다 박아 봐야 할 것 아냐, 그렇지?”

그가 탁 풀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상하지 않은, 너무나도 당연한,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내 귀에 속삭여 온 것 같은.

나만 외면해온 것 같은, 익숙한 말을 속삭였다.

“좋아해, 신유리.”

“아…….”

내가 살짝 입을 벌렸을 때였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그가 내게 몸을 기울였다.

내가 나도 모르게 늘 벌려두길 바랐던 거리 안으로, 그가 들어왔다.

“근데도 네가 너무 좋아. 눈을 못 떼겠어.”

―탁.

그가 더 가까워졌다.

“그러니까.”

그가 내 입술에 검지를 살짝 얹었다.

“나랑 연애하자.”

비밀 연애.

내가 눈을 크게 뜬 순간 그가 내게 입술을 겹쳐 왔다.

다시 한번, 침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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