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실례가 많습니다. 방문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를렌타 영애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카를렌타 가는 미야 출신이 아닌 가문 중에, 유일하게 게이트 방어도가 85%가 넘는 가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원래 검가로 뿌리 깊고 명성 있는 데다, 중앙 사교계에 영향력도 커서 중부의 사자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가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그런 가문의 후계자인 루릴 드 카를렌타 영애가 이렇게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잔 하나 더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이까!”
바이야 백작은 기쁘게 말했다.
다른 귀족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가 중의 검가가 뭉친 미야 연합에서, 카를렌타의 등장을 환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용건이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난 미야 사람들이 적당히 잦아들기를 기다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내 말에 카를렌타 영애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미야 연합의 모임이 있다는 소식에 급히 찾아왔어요.”
난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가 우리 가문의 별장이라 해도, 역시 용건은 나보다는 미야에 있었던 모양이다.
“?”
“……?”
미야의 귀족들이 그 말에 서로를 마주 보고 있을 때였다.
카를렌타 영애가 말했다.
“카를렌타 역시 미야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서요.”
그 말에 난 눈을 크게 떴다.
다른 가문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들어오려 하지 못했는데.
카르렌타에서 직접 청하러 온 것이다.
“괜찮을까요?”
카를렌타 영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흥분에 차오른 귀족들에게 진정하라는 뜻으로 손을 펴 보이곤 말했다.
“그야 미야에서는 물론 환영이죠.”
안 그래도 미야의 소속 가문들이 동북부에 치우쳐 있었다.
당연히 다른 지역에는 지원을 해주고 싶어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L급 게이트에 들어가고 나면 다른 지역은 어떻게 하나 고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중부를 꽉 잡고 있는 카를렌타가 합류한다면?
당연히 훨씬 영향력이 커질 터였다.
“하지만 폐하께 먼저 보고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텐치아 백작이 침착하게 말했다.
“옳소.”
“맞는 말씀입니다.”
귀족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윤허해주실지…….”
걱정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카를렌타가 미심쩍기 때문이 아니었다.
“으음…….”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중부의 카를렌타가 합류한다면 미야는 단순히 게이트 대응 연합이 아니라, 좀 더 큰 규모의 무언가로 인식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폐하께 보고드리도록 하죠.”
귀족들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난 신재헌이 허락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미야에 카를렌타 오고 싶대요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게 묻다 말고,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보내버린 것 같아서.
신재헌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를 대하는데 내가 어색하게 대하면 그것대로 이상하겠지만, 그래도…….
그가 나를 위해 일부러 평소처럼 행동한다는 걸 알게 된 뒤로, 마음 한쪽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네 황권강화 퀘스트 끝나서 괜찮아요]
아니나 다를까, 신재헌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고민도 하지 않은 듯했다.
저럴 것 같긴 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을 막은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 새삼스러운 사실이 다시 떠올라 멍해지는 것도 잠깐, 난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있어 봐야 의아한 시선만 받을 뿐이니까.
“윤허해 주실지는 미지수이지만, 카를렌타가 미야와 공식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면 그보다 게이트 대응에 좋을 수는 없을 거요!”
바이야 백작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난 그 말에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귀족들의 반응까지 호의적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카를렌타 영애의 얼굴이 밝아졌다.
“긍정적으로 고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를렌타 영애가 예쁘게 웃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미야 귀족들 중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뭐지, 이 딴죽 걸 것 같은 목소리는?
설마 카를렌타가 미야의 수좌를 차지할 것 같아서 그런가?
미야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라 권력의 구조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 긴장감(?)을 무마해야 할지 딜러답지 않게 머리를 굴릴 때였다.
“카를렌타의 속검은 검을 휘두를 때 팔에 힘을 싣습니까, 손에 힘을 싣습니까?”
상상도 못 한 질문이 나왔다.
“손이라니까, 이 사람아!”
“팔이라니까 그러네! 안 그럼 그렇게 넓은 범위로 움직일 수가 없어!”
그 뒤로 갑자기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이 사람도 궁금했소이다.”
그러자 무게 잡던 바이야 백작까지 합세했다.
이 인간들이 검에 미친 인간들이란 걸 잠시 까먹고 있었다…….
“…….”
카를렌타 영애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긴장했었는지, 눈을 깜빡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보여드릴까요?”
그녀의 말에 미야의 귀족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함성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시다!”
“그게 좋겠소!”
“준비된 자리도 마침 있소이다!”
“역시 먹은 후엔 몸을 풀어 줘야지!”
그렇게 갑자기 대동단결, 아니 대련의 장이 펼쳐졌다.
***
뜬금없는 대련이었지만 난 이게 기회란 걸 깨달았다.
[루릴 드 카를렌타(A)]
[레디드 드 바이야(A)]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있는 선명한 A랭크 표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카를렌타 영애와 바이야 백작의 랭크만은 더욱 환하고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A급 상위란 소리였다.
저만큼 능력치가 쌓였는데 랭크업하지 못한다는 건, 다른 종류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시스템창이 없는 이 세계 사람들이 우리랑 같은 방식으로 랭크업하진 않겠지만, 내가 조금 도와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기력전수(SS)]
이 스킬로.
이걸 사용하면 이 세계의 표현으로 ‘깨달음의 시기’가 와서 한 걸음 정진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난 얼마 전에 연무장에서 만났던 포를랭 출신 기사 이디스와 밀리샤를 떠올렸다.
[B] [B]
둘 다 B급이었지만, 내 기력전수 스킬이 끝난 이후 그들은 다음날 A랭크 중반이 되어 나타났다.
‘어제의 수련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한 건 기력전수 스킬을 써준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눈빛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이번 게이트전에서 큰일을 해낼 것이다.
[기력전수(SS) 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 지정 : 레디드 드 바이야(A)]
이들도 만일 그들처럼 랭크업할 수 있다면?
S급과 A급의 차이는 확연하니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기력전수(SS) 스킬을 사용합니다.]
[지금까지 쌓였던 경험치의 일부를 레디드 드 바이야에게 전수합니다.]
[성장 속도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진행하시겠습니까?]
[Y / N]
남들이 보면 불길하게 여겼을 시스템창이 떴지만, 난 고민 없이 Y를 선택했다.
한…… 10년쯤 전에 생긴 이 스킬을 당시에 매일매일 사용했지만, 내 성장이 느려졌다는 느낌은 못 받았거든.
애초에 시스템창에 제대로 뜨지도 않는 ‘경험치’라는 개념은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스탯 증가에 도움을 준다곤 했지만, 다른 S급들하고 비교해봤을 때 내 성장 속도가 느리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꼭, 강해질게.’
그렇게 말하던 신재헌의 눈을 볼 때마다, 후회 한 점 남지 않았으므로.
특이하게도 이 스킬은 상대에게 이로운 효과만을 전달하기 때문인지, 시스템창이 있는 상대에게도 동의를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기력전수가 가능했다.
신재헌이 이것 때문에 랭크업이 빨리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했다.
아주 잠깐.
“…….”
하지만 그가 노력하는 모습을 본 뒤로, 그리고 이 던전에 온 뒤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성장은 본인에게 달려 있었다. 랭크업을 하고자 하는 의지도 본인만이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간절한 사람이 보다 빨리 성장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내 기력전수 스킬은 외부에서 가하는 약간의 동력에 불과했다.
“하앗!”
난 힘차게 카를렌타 영애와 검을 부딪치고 있는 바이야 백작에게 몰래 기력전수를 하면서 생각했다.
좋은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
―챙! 챙!
속검이 뭐네, 에델바이스의 속검과 카를렌타의 속검엔 어떤 차이가 있네 하며 심도 깊은 토론을 하는 검사들 사이로 기력전수 스킬을 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력전수(SS) 대상 : 루릴 드 카를렌타(A)]
힘을 기를 수 있는 역량을 높여준다는 애매한 설명이 붙어 있는 스킬.
내가 이 스킬을 얻은 건 아마 신재헌이 B랭크가 되었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난 강해져야 할 이유가 있거든.’
그렇게 말하는 그가 나만을 보고 있다는 걸 몰랐을 때.
그 애가, 간절하게 성장을 바랐을 때.
나도 그 애가 내 옆에 영원히 서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을 때.
“하아아!”
카를렌타 영애의 입에서 기합이 터졌다.
그녀는 벌써 몇 번째 대련을 하고 있었지만 땀을 흘릴 뿐,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만은 더 선명하고 깨끗하게 빛났다.
오직 한 가지 열망만이 보이는 눈.
강해지겠다는 열망으로 끓어오르는 눈.
볼수록 닮았네.
난 속으로 뇌까렸다. 그리고 저런 사람은 이내 큰 성장을 이루게 된다.
[기력전수 완료.]
시스템창이 뜨는 걸 보면서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기력전수를 굳이 해주지 않아도 카를렌타 영애나 바이야 백작은 S급이 될 사람이었다.
성장한 사람을 보고, 내가 직접 랭크업해보니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기력전수 스킬에서도 얻어가는 게 많을 것이다.
난 그렇게 확신했다.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자는 원하는 것을 꼭 쥐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 애처럼.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갔던 생각이 자꾸 같은 방향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이었다.
“백작님.”
기사가 파래진 얼굴로 달려왔다.
아까 카를렌타 영애가 왔을 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
왜, 또 손님 왔니? 올 사람이 또 있나?
말을 잇지 못하던 기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께서 긴히 찾으십니다.”
난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신재헌?
“이곳에 이미 와 계십니다.”
그 애가, 별장에 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