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신재헌은 내게 뭘 도와달라는 건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와 나 사이의 벽이, 그의 눈물로 깨지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내가……,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졌다.
나는…….
“…….”
하지만 그는 답을 듣지 않고 자리를 떴다.
멀리 날아가 처박혔던 말레티아의 검은 어느새 그의 인벤토리로 돌아갔는지, 사라져 있었다.
‘끝까지 못 도와줘서 미안해.’
그렇게 말한 그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닌데…….”
지금 말해 봐야, 그는 이미 들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가 있었다.
***
팔의 상처는 붕대를 감아 잘 감추었다.
움직이기가 좀 불편하지만 A급인 이상 금방 나으리라.
하지만 나아지지 않는 게 있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 S급(딜러)]
난 파티창에서 멍하니 그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그와 헤어진 이후, 난 그와 채팅에서 말을 섞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달라진 게 아니었다. 내가 달라진 거였다.
그걸 티 낼 수는 없으니 수련에만 신경 쓰려고 애썼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죠]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럼 먼저…….]
신재헌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채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게 그가 뻔뻔해서가 아니란 걸, 이제 알았다.
‘네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란 걸 아는데…….’
그가 했던 그 말.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어떨 때는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채팅에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그래왔다는 것도,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나를 위해서.
내가…… 네 행동에 어색함을 느낄까 봐.
차라리 뻔뻔한 저를 욕하도록.
그 사실에 멍해졌을 때쯤.
사건이 터졌다.
***
“자자자작님!”
호들갑이 심한 하인 출신의 집사는 오늘도 시끄러웠다.
포를랭 자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뭐냐?”
별것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떠는 게 일상인 놈이기에 오늘도 그럴 줄 알았다.
“A급 게이트입니다! A급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집사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쾅!
“뭐라고!”
지금까지 ‘2층의 하녀 중 하나가 출산했답니다!’ 따위의, 포를랭 자작에게는 쓸모도 없는 정보를 다급한 듯 물어오는 놈이었기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차였다.
그런데 이건 정말 호들갑을 떨 만도 했다.
“어어어떻게할까요?”
집사는 긴장한 듯했다. 그야 당연했다.
기사들의 절반 이상이 나간 지금, 어떻게 A급 게이트를 처리한단 말인가?
게다가 B급 이하의 게이트도 1/3이나 간신히 막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A급? 이건 망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포를랭 자작은 달랐다.
당황도 잠깐, 그의 얼굴에서 희열이 피어올랐다.
[아버지, 에델바이스 백작가에서 S급 게이트를 관리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비밀 잉크로 쓰인 편지가 얼마 전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발신인은 에델바이스 영지에 침투해 있는 리카스였다.
사랑스러운 둘째 놈!
원래는 애물단지라고 생각했던 둘째 리카스의 위치가 그의 마음속에서 수직상승했다.
리카스가 보내준 건 S급도 상대할 수 있는 구성이다.
그럼 그 이하인 A급은?
당연히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겠지!
“다, 다, 당장 황성에 병력 요청을…… 아니, 저 공문 쓰는 법 모르는데…….”
어리바리한 집사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포를랭 자작이 혀를 찼다.
“병력 요청은 무슨! 당장 공략 준비를 해라!”
이건 기회였다!
포를랭 자작이 생각했다.
원래 신은 몸을 숙이고 때를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를 주신다고 했다.
오, 신시안이시여!
드디어 포를랭을 보살피시는 것입니까!
신시안 교황이 들었다면 황당해했을 그의 외침은 다행스럽게도 주이안에게는 닿지 않았다.
“A급 게이트를 저희 병력으로요???”
집사는 허술했지만 정상인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새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포를랭 자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하지! 우리 포를랭의 건재함을 보여줄 좋은 기회가 아니더냐!”
‘이빨 빠진 호랑이’ 내지는 ‘겉만 화려할 뿐 속 빈 상자’ 등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포를랭이었다.
근래 게이트 관리도가 30%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A급 게이트를 보란 듯이 처리한다면 인식이 바로 바뀔 것이다.
‘그래도 역시 포를랭’이라고!
“빨리 준비해라! 황성으로 보낼 보고서도 준비하고!”
게이트 처리는 시간이 중요한 만큼 황가에 보고하는 동시에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
당연히 등급이 높은 게이트일수록 황가에서도 빠르게 서류를 처리해주기도 했다.
“보, 보, 보고서……!”
집사가 허둥대면서 서류를 준비해 왔다.
포를랭 자작은 위풍당당한 기세로 내용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
발생 게이트 등급 : A
공략 인원 : 포를랭 소속 기사 3명, 신시안 교단 소속 성기사 2명, 신시안 교단 소속 사제 1명, 마법사의 탑 소속 마법사 1명]
그렇게…… 희대의 공략법이 공식 경로를 타고 황제의 앞에 당도했다.
***
전설의 게이트 공략법을 문서로 받아본 신재헌은 짧은 감동과 함께 회신을 보냈다.
[A급 게이트에 대한 일반적인 공략 인원 구성과는 많이 다른 것 같으니, 재고해 최대한 빠르게 보고하라.
그리고 해당 인원 구성에 대한 근거를 따로 제출하라.]
황가의 언어로 곱게 풀어 말했지만 요점은 이러했다.
[이 괴상한 공략법은 어디서 나온 거냐?]
그리고 그 답장을 본 포를랭 자작은 당연히 당황했다.
“뭐, 뭐지? 이거 맞을 텐데?”
그는 리카스가 보낸 편지를 거듭 펴보면서 확인했다.
분명히 이 구성이 맞는데?
하지만 황가의 회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으으음.”
고민하던 그는 결국, 제가 나름 친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귀족가에 사람을 먼저 보냈다.
바로 근처에 있는 주나 자작가였다.
[기사 셋, 성기사 둘, 마법사 하나, 사제 하나면 A급 게이트 처리에 충분하지 않겠소?]
하지만 주나 자작은 포를랭 자작과는 달리 머리가 굴러가는 사람이었다.
요컨대 포를랭 자작가가 제국의 대세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주나 자작은 포를랭 자작의 말도 안 되는 공략법에 회신하는 대신, 모른 척 사교계에 퍼뜨려 버렸다.
“포를랭 자작께서 A급 게이트에 이런 공략을 쓰신다는데, 저는 처음 듣는 것이라…….”
모른 척하며 포를랭 자작의 이름을 언급하자, 사교계는 곧바로 난리가 났다.
“이런 미친 구성으로 게이트를 공략한다니!”
“전술 기본이 안 됐군!”
당연히 포를랭 자작은 평생 먹을 욕을 한 번에 다 먹었다.
그리고 사교계의 아웃사이더인 포를랭 자작은, 그 사실을 다른 사교회에 우연히 들렀다가 듣게 되었다.
“포를랭 자작, A급 던전을 이런 구성으로 공략한다는 게 사실이오!?”
쑥덕거리는 귀족들은 진짜 이런 미친 생각을 네 뇌로 한 게 맞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포를랭 자작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정말 이런 생각을 포를랭 자작이 한 것이오?”
그렇게 답을 재촉당하자 포를랭 자작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이, 이런 상황은 예상에 없었다고!
그리고 사고회로를 거치지 않은 답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에, 에델바이스 백작이 만든 공략입니다만!?”
아무튼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니라니까?
그도 놀랍게도 뇌가 있었으므로 말하고 나서 아차 하기는 했다.
에델바이스 가와 포를랭 가가 근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갑자기 에델바이스 가에서 공략법을 전수해 줬을 리가……!
아, 그렇지!
하지만 이런 데에는 머리가 탁월하게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포를랭 자작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에델바이스 백작은…… 포를랭의 영지민들을 위해 알려주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소!”
아무튼 내가 첩자 보낸 거 아니라고!
“뭐라고? 에델바이스 백작이 이런 공략 방법을?”
그렇다니까! 걔가 그랬다니까!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이 바뀌었다.
“포를랭 자작이 잘못 안 것이 아니오?”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역시 에델바이스 백작이군.”
“역시 에델바이스 백작이군.”
“떠난 영지이고 본가와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영지민들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겠지.”
“과연 귀족가의 귀감이 될 자요.”
이게 아닌데! 걔가 공략을 잘못 알려줬다니까……! 잠깐.
“…….”
포를랭 자작은 멈칫했다.
설마 세니아가……?
……이거, 설마 일부러 잘못 알려준 거 아니야?
그답지 않게 머리가 잘 돌아갔지만, 문제는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
“이야, 이게 종이에 쓰인 걸 보는 날이 오네.”
포를랭 자작의 소식에 난 감탄했다.
“아니, 진짜 단 한 번도 생각을 안 해 봤나?”
이렇게 보내면 사제가 여섯 명을 힐해야 되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감이 오지 않아?
진짜 탱커 둘이 다 막아주니까 힐이 필요 없다는 말을 믿었단 말이야?
탱커는 그럼 자가회복하냐?
난 정말 A급 던전에 ‘딜3탱2보1힐1’을 보낸다고 했다는 포를랭 자작의 지능에 감탄했다.
그는 심지어 ‘S급도 클리어할 수 있는 구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했다.
헬렌에게 온 사교계 동향 보고서를 보면서 난 당황한 표정을 장착했다.
음, RP던전 경험이 몇 번인데 이 정도 연기쯤이야.
나 지금 아주 당황했어요.
―짤랑!
설렁줄을 잡아당겨 헬렌을 부른 난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이 사교계 동향 보고서에 이상한 내용이 있어서.”
“아, 가주님께서도 그 부분을 신경 쓰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헬렌은 곧바로 내가 어딜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난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이 공략을 알려준 건 맞는 것 같거든. 근데 포를랭 자작한테 알려준 게 아니라 리카스 오빠한테만 알려준 거야. 오빠가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곤란한 얼굴 장착!
“그런데 그날 정신이 없어서 이걸 잘못 알려준 것 같아. 봐봐.”
난 미야의 다른 가문들과 함께 주고받던 게이트 공략 정리집을 펼쳐 보였다.
여긴 당연히 S급을 공략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인원 구성이 쓰여 있었다.
[기사 2명, 성기사 1명, 마법사 1명, 사제 3명]
사제가 최소 세 명은 들어가야지, 안 그래?
헬렌은 미야 공략집에 쓰인 인원 구성을 보고 당황했다.
“전혀…… 다르군요.”
“응, 내가 그날 일이 많았잖아.”
난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매우 미안!
“그날 리카스 오라버니한테 잘못 알려준 것 같은데……. 하필 다른 데에 이런 공략을 알려줄 줄이야.”
리카스만 알고 있을 줄 알았지~ 줄줄 샐 줄 누가 알았겠냐~
사실 샐 거 다 알고 있었지만 난 곤란한 표정을 고수했다.
“혹시 다른 곳으로 퍼진 데가 있다면 빨리 정정해야 하니까, 사람 보내서 알아봐.”
그러면서 난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리카스 오라버니가 포를랭 가에 보내신 거겠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헬렌은 불쾌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호의로 알려준 정보라면 귀족가에서는 당연히 정보를 알려준 자에게 허락을 받고, 다른 곳과 공유하는 것이 매너였다.
안 그럼 그게 첩자지 뭐란 말인가?
아, 첩자 맞지?
“아무튼 사람을 풀어 알아보겠습니다.”
헬렌이 곧바로 나갔다.
난 그녀가 나가고 나서 심각한 표정을 던져 버렸다.
잘못된 정보란 걸 헬렌이 급히 전파하고 다니기 시작하면 당연히 허둥지둥하는 동네가 있을 것이다.
포를랭은 물론이고 S급 게이트 공략이 전무했던 동제국까지.
“역시 머리 복잡할 땐 뭘 조져야 돼.”
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애써 파티창으로 가려는 시선을 바로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