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불쑥 찾아갔는데도 신재헌은 다행히 바쁘지 않은 듯했다.
쫓아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음, 바쁘면 기다리려고 했는데.
‘내가 도와줘야 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여긴 사람들이 올 수도 있거든?’
심지어 그렇게 말한 그는 자리를 이동하기까지 했다.
나도 이제 A급 상위라서 신재헌의 이동속도를 거의 따라잡을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검은 로브를 쓴 채 빠르게 뛰어 황성 주변을 벗어났다.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공터에 도착하고 나서야, 신재헌이 로브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러고는 날 돌아보았다.
“뭘 도와주면 되는데?”
이놈 적극적인데? 이렇게 나와 주면 나야 땡큐였다.
그래도 미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는 건 좀 미안하긴 한데.”
난 볼을 긁적였다.
단어를 골라 보려고 했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신재헌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니 고상한 단어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하긴, 언제는 고상하게 말하고 다녔나.
“너 말고는 생각이 안 나더라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게 최고지.
내 말에 신재헌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난 그런 그에게서 몇 걸음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는 때였다.
―탁.
그가 빠르게 내 손목을 붙들었다.
이제 나도 A급 상위라 그가 손목을 잡는다고 손목이 으스러질 일은 없었다.
“도와달라며 어디 가?”
아니 한 발짝 떼기도 전에 이렇게 벼락같이 반응할 일이야?
난 재차 볼을 긁적였다.
“떨어져야 네가 도와줄 수 있는데?”
설마 이 거리에서 말레티아의 검을 휘두를 셈?
“?”
신재헌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는 사이, 난 뒤로 물러났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후, 난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에델바이스의 훈련용 검(C)]
아직 체육선생님의 목검(SS)을 사용하기엔 내 랭크가 달렸다.
그래서 쓰는 게 이 검이었다.
C급이지만 내구성은 좋거든.
난 그에게 손짓했다.
“검 꺼내봐.”
내 말에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인벤토리에 손을 넣고 천천히 검을 꺼냈다.
그가 꺼낸 건 익숙한 붉은 검신의 대검이 아니라, 평범한 검이었다.
“그거 말고 말레티아의 검으로.”
내 말에 신재헌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물었다.
“왜?”
“네 평소 컨디션이 필요해서.”
사실 평소보다도 더 최상의 컨디션이 필요했다.
앞에 최대한 강한 적이 있어야 연습이 될 테니까.
신재헌은 내 말에 들고 있던 검을 아래로 내렸다.
“지금도 평소 컨디션인데.”
난 그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기가 다른데 어떻게 컨디션이 같냐?
“빨리.”
내 짧은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는지, 신재헌은 결국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팍!
말레티아의 검처럼 단단한 검이 아니고서야 저러면 검날 상한다니까.
습관이란 무서운 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그가 인벤토리에서 말레티아의 검을 꺼내들었다.
익숙한 붉은 검신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들기도 어렵다는 신재헌의 귀속 아이템인 말레티아의 검은, 주인인 그가 들기에도 무게가 상당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오른손만으로도 그걸 가벼운 한손검처럼 자유롭게 다뤘다.
심지어 그 움직임은 섬세하기까지 했다.
“후우.”
짧게 숨을 내쉰 내가 그를 살폈다.
이렇게 정면으로 그를 마주한 건, 아마 10년이 좀 안 됐을 것이다.
한 8년?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그가 S급이 되고 나서는 이럴 일이 없었으니까.
‘신유리, 나 좀 도와줘.’
어느 날 찾아왔던 너.
‘응?’
네 고민도 모르고 천진하게 되묻던 나. 그런 내게 너는 이렇게 말했다.
‘강해지고 싶어.’
그의 매섭게 빛나는 눈이, 결심으로 단단하게 뭉친 시선이 무엇을 향한 갈망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나와 같은 S급이 되고 싶어서, 내가 사람들에게 C급을 데리고 다니는 철없는 애라고 욕먹는 게 싫어서…… 그런 거라고 짐작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그의 입장으로 선 난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강해지고 싶어.
강해져서 모두를 지키고 싶어.
내 앞에서는 그 누구도 위험해져서는 안 돼.
내가 그러지 못하게 만들 거야.
―스릉!
처음엔 내가 약하게 휘둘렀던 검조차 받아내지 못하고 멀리 날아가 처박혔던 너.
‘괜찮아?’
놀란 내 물음에 일부러라도 괜찮다고 했던 너. 피가 나고 뼈가 부러져도 다시 일어났던 너.
네가 다치면, 다시는 내가 네 대련 상대가 되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걸 이제는 알았다.
같은 자리에 서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랬던 너는 결국 강해져서 내 앞에 서 있다.
나 역시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난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리 와.”
―파앗!
검을 아래로 강하게 털어낸 내가 그에게 검 끝을 겨누었다.
“전력으로 덤벼.”
10년 전처럼.
***
―쨍!
신유리는 그의 검을 제대로 받아냈다.
신재헌은 수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쩡!
그때 난 네게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고, 너는 그걸 너무나도 쉽게 쳐냈다.
그야 당연했다.
그때의 나는 S급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SS+급 무기 중에서도 단단한 말레티아의 검과 평범한 검이 맞붙고 있으니 검을 부러뜨리지 않기 위해서도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능력치 차이까지 현격했다.
아무리 신유리가 지금 A급 상위 수준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신재헌 자신이 S급이 된 후 성장이 멈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전 세계 S급 중에서 상위에 랭크되는 사람이었다.
일각에서는 가장 먼저 SS급의 아성을 부술지도 모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그는 신유리가 자신보다 먼저 SS급이 될 거라고 자신했지만.
―스르릉, 쨍!
검의 세기와 능력치 차이만으로도 신유리가 검을 받아내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신재헌 자신에게는 ‘황제의 피’라는 황제 스킬 보너스까지 붙어 있지 않은가?
“버프 안 켜?”
하지만 신유리는 진심을 요구했다.
신재헌은 결국 마지못해 스킬을 하나 켰다.
[검의 수호자(B) 사용합니다.]
하지만 신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봐주지 말라니까?”
아예 풀버프 상태를 원하는 듯했다.
결국 신재헌이 물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데?”
그러자 신유리가 반 박자 늦게 답했다.
“그냥 싸우고 싶어.”
신재헌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까는 도와달라며?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이유는 아닐 터다.
그가 아는 신유리는 감정적인 문제가 있으면 말로 풀어버리는 사람이니까.
꼭꼭 숨겨두고 삽질하는 건 신유리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검을 휘두른다는 건, 정말 제 ‘검’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풀버프 상태는…….
그가 주저할 때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 A급(딜러)
- 버프 : 잔상(SS+) 잔상(SS+) 잔상(SS+)……]
신유리의 파티창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정말 진심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
속도 위주의 딜러답게 A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속도로 검이 치고 들어왔다.
결국 신재헌이 몸을 틀어 피했다.
하지만 반응이 늦어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팍!
볼에서 피가 튀었다.
잔상 하나가 스친 것이다.
신유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던전 가서도 딴생각할 거야!?”
딴생각하느라 반응이 늦었다는 걸 곧바로 알아챈 모양이었다.
신재헌은 문득 생각했다.
수년 전 수련할 땐 듣지 못했던 말이라고.
그야 당연했다.
그때의 그는 정말 강해지고자 하는 일념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난 충분히 강해졌나?
―챙!
그가 강하게 검을 휘둘러 신유리의 검을 막아냈다.
―파파팟!
잔상 수 개가 깨지면서 신유리가 뒤로 쭉 밀려났다.
하지만 신유리의 공격은 빈틈이 없었다.
“!”
반동을 무시하듯 바로 치고 들어오는 동작을 보니 저건 도약 스킬과 급강하 스킬, 무게추 스킬일 것이다.
원래 높이 뛰어오르는 데에 쓰는 도약 스킬을 지상에서 낮은 각도로 쓰면서, 급강하 스킬과 무게추 스킬로 속도를 높인 것이다.
그녀답게 변칙적인 스킬 사용이었다.
그녀가 원래 갖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막기 힘들 정도로.
―콰직!
결국 말레티아의 검과 그녀의 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신재헌이 밟고 있던 바닥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신유리의 공격은 끝난 게 아니었다.
“……!”
그녀가 이쪽으로 뛰어오기 전에 일찍 사용한 잔상 공격이 뒤늦게 그의 눈앞에 쇄도한 것이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생명의 위기가 느껴지자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기혈개방(S) 스킬을 사용합니다.]
[뜨거운 피(A) 스킬을 사용합니다.]
[화염검(SS) 스킬을 사용합니다.]
[책임감(S) 스킬을 사용합니다.]
[약점 간파(S) 스킬을 사용합니다.]
―쿠콰쾅!
당연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세로 검이 맞부딪쳤다.
그러면서 약점 간파 스킬 때문에, 신유리의 몸 근처로 새파란 빛 몇 줄기가 노출되었다.
본능은 검을 그곳으로 이미 내지르고 있었다.
“……!”
하지만 이성을 찾은 그는 곧바로 검을 멈추었다.
그리고 멈칫하는 그 잠깐의 순간만으로도, 신유리가 그의 목 아래로 검을 들이미는 건 충분했다.
―탁.
그의 목을 벨 듯 검을 들이댄 신유리가 말했다.
“제대로 해 줘.”
신재헌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그가 결국 신유리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챙!
하지만 그 후로도 몇 번이고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회가 왔을 때, 검을 내지르지 못했다.
‘진심으로 해 줘.’
그게 그녀의 부탁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신유리가 이러는 건 아마, 곧 닥쳐올 L급 던전에 대한 압박감 때문이란 걸 알면서도.
그래서 수련이 필요해 찾아왔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그는 차마 진심으로 검을 내지를 수가 없었다.
내가 죽어도 좋으니, 너는 안전해야 해.
본능을 넘어선 간절한 소원이 움직임을 옭아맨 탓이었다.
―파파팟!
그래서 점점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늘어났다.
……옷자락 하나도 베이지 않은 신유리와는 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