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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77)화 (177/218)

177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한 방 공격을 해 줄 수 있는 사람.

신재헌 한 명뿐이었다.

문제는 하필 그가 황제 위치에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에델바이스 백작으로서 황제에게 공식 알현 요청을 했다간 절차도 번거로울뿐더러, 너무 많은 사람이 우리가 만나는 걸 알게 된다.

그럼 수련은 물 건너가는 거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난 파티창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채팅창에다가 도와달라고 하긴 좀 그랬다.

주이안 헌터는 보나마나 도움 안 된다고 미안해할 거고, 무엇보다 날 쭉 도와준 소예리 헌터에게 미안한 일이 아니겠는가.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몰래 찾아가기!

***

Q. 내 나라 황궁을 잠입하는 현실이 실화입니까?

A. 네.

Q. 그것도 황성 주인이 소꿉친구인데 잠입해야 하는 현실이 정말 실화입니까?

A. 네에에에.

나는 믿기지 않는 자문자답을 이으며, 밤을 틈타 검은 로브를 입고 황성으로 숨어들었다.

“……가서 뭐라고 하지?”

난 작게 중얼거렸다.

마침 경비를 도는 기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A]

같은 A급이었지만 이쪽은 스탯이 S급이랑 비등한 A급이었으므로, 내가 춤이라도 추지 않는 한 발각될 위험은 없었다.

―탁, 탁.

기사가 절도 있는 발걸음을 뽐내며 자리를 지나간 후, 난 신재헌이 있을 법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지금은 저녁 9시. 이 시간엔 간단한 수련을 했던 놈이니까 연무장 비슷한 곳에 있지 않을까?

황제라고 일하느라 수련을 안 할까?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일단 연무장부터 뒤져보고 없으면 더 찾지, 뭐.

난 빠르게 움직이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신재헌 마주치면 뭐라고 하지? 방어검술 제대로 익히게 좀 도와달라고?

그럼 신재헌이 할 말은 뻔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면서?’

……그러면서 신나게 놀리겠지, 뭐.

하지만 어쩌겠는가?

놀림 받더라도 제대로 수련하는 게 낫지.

“문제는…….”

연습이라고 하면 그놈이 제대로 안 도와줄 것 같다는 거다.

L급 상자를 발견했으니 상대가 L급 이상의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S급인 신재헌이 휘두른 진심도 아닌 공격을 받아내고 연습이라고 해 봐야 소용없을 터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

―후웅!

신재헌의 붉은 대검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가상의 적을 상정하여 검을 휘두르는 그의 눈에는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언제나 이 시간이 되면 했던 수련이었다.

이건 던전 공략 중이거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지 않으면 변치 않는 그의 일정이었다.

여기도 L급 던전 안이긴 했지만, RP던전이니 수련을 거를 이유는 없었다.

‘그럼 잠시 다녀오지.’

황제가 같은 시간에 자리를 비운다는 건 황궁의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신유리가 들으면 놀랐겠지만, 그는 의외로 황제로서의 일을 재깍재깍 처리했다.

‘네가?! 일을!?’

그렇게 물을 것이 분명한 신유리를 생각하며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라고 일이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언제 돌발상황이 터질지 모르는 게이트에서,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쓸데없는 것에 발목 잡히기 싫을 뿐이었다.

“하아!”

기합 소리와 함께 강하게 검이 찔러져 들어갔다.

그의 상상 속에서, 앞에 있는 적은 죽여도 죽지 않는 적이었다.

상대가 완전히 쓰러져 검은 재로 화할 때까지 그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그녀에게 위험이 가해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아무리 강한 공격을 한 직후라도 그는 충격에 대비하려고 했다.

대검으로는 보통 잘 선택하지 않는 찌르기 형식의 공격을 사용할 때도 그랬다.

대검으로 전방을 찌르는 것.

무게가 굉장한 무기인 만큼 찔러져 들어가면 엄청난 데미지를 자랑했지만, 그만큼 리스크가 큰 행동이기도 했다.

찌른 직후에 다른 공격을 하기가 어려운 동작이기에 더 위험했다.

덕분에 그는 말레티아의 검뿐만이 아니라 다른 검을 몇 개 들고 다녔다.

―탁!

말레티아의 검을 찔러 넣고 곧바로 다른 검을 들어 공격할 수 있도록.

[말레티아의 검(SS+)이 인벤토리로 회수됩니다.]

그의 근처에 있는 한, 언제든 마음대로 인벤토리에 회수할 수 있다.

어차피 그의 귀속 아이템인 말레티아의 검은 다른 놈이 들 수도 없겠지만.

그가 그렇게 한참 동안 연습했을 때였다.

“…….”

검을 내린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려고 애쓴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들어가서 잠들 시간이다.

그렇게 그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

멈칫한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에서 묘한 인기척이 들린 탓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가릴 것 없이 곧바로 검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황제가 수련을 지켜보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걸 모두가 아는 황성에서, 이곳에 굳이 접근한다는 건 별로 좋은 목적이 아닐 가능성이 크니까.

애초에 급한 일이 있으면 멀리에서부터 그를 부르면서 나타날 테니, 급전은 아닐 터였다.

“…….”

하지만 신재헌은 검을 집어 던질 수가 없었다.

인기척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여기서 느껴질 리가 없는데.

드디어 내가 미쳤나?

‘원래도 제정신은 아닌 듯?’

질문하면 그렇게 답할 사람이 떠올라 그가 이마를 짚을 때였다.

“폐-하.”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신재헌은 몸을 굳힌 데에 이어 숨까지 멈춰 버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려고 했으니까.

“저기요?”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그가 홱 몸을 돌렸다.

진짜다.

진짜…… 신유리였다.

“!”

너무 홱 돌아보았는지 신유리도 놀란 눈치였다.

“아니, 오는 거 몰랐어?”

너라면 알 줄 알았는데?

그렇게 뇌까리는 목소리까지 정말 신유리였다.

신재헌은 잠깐 멍하게 서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알았어.”

“알았는데 왜 그렇게 놀라?”

그 말에 뇌를 거치지 않은 그의 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알았는데 아닌 줄 알았어.”

“?”

신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신재헌은 그런 그녀의 앞에서, 간신히 뒷말을 삼키는 데에 성공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드디어 미쳐버린 줄 알았거든.

그가 짧게 숨을 터뜨렸다.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려 애쓴 신재헌이 물었다.

“채팅을 하지. 몰래 온 거야?”

검은 로브를 입은 모습을 보니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었다.

그의 말에 신유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장난스레 웃었다.

“응. 내 나라 황성에 몰래 잠입하는 기분 끝내주더라. 이 묘한 배덕감은 마치…….”

그녀가 고민하는 모습을 신재헌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 그녀가 기상천외한 말을 뱉었다.

“……새벽에 학교 도서관에서 몰래 라면 먹는 느낌?”

그 말에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리 학교 도서관에 라면 먹을 데가 어디 있었는데?”

은령고등학교의 도서실은 신유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옹졸한 크기였다.

라면 먹을 데가 있을 턱이 없었다.

사서 선생님이 한 번 쓱 둘러보면 바로 걸릴 텐데?

그러자 신유리가 손을 내저었다.

“우리 학교 말고. 주이안 헌터님이 그랬거든. 대학 다닐 때 새벽에 너무 배고파서 라면 먹은 적 한 번 있다고.”

“오…….”

이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절대 규칙은 안 어기는 양반이?

“그때 정말 너무 죄송해서 일주일 동안 도서관 청소를 자처했대.”

……역시 힐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너는 왜 몰래 왔는데?”

이마를 짚은 신재헌은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도 신유리가 제 앞에 있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만져보면…… 안 되겠지?

평소엔 어깨도 짚고 등짝도 두드리고 잘만 장난쳤던 사이인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신유리는 그런 그에게 슬그머니 웃어 보였다.

“네가 보고 싶어서?”

……이것도 늘 하던 장난이다.

심지어 이건 자신이 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낸 장난이다.

언젠가 포를랭 가의 연무장에 있던 그녀에게 했던 말.

‘보고 싶어서?’

그 말에 이어지는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숨이 막혔다.

“오늘 컨디션 안 좋아?”

그때 신유리가 물었다. 신재헌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내 ‘이상한 상태’를, 네가 알아채길 원하지 않아.

“아니, 좋아. 매우.”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다행히도 신유리는 그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장난스레 뒷짐을 진 그녀가 그에게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럼 혹시 시간이 없으신가?”

“아니.”

시간 따위야 없어도 만들면 그만이야. 그가 생각했을 때였다.

“그럼 다행이다.”

신유리가 탁 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그럼 나 좀 도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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