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에델바이스 영지는 적대관계인 동제국의 국경과 아주 가까웠다.
그런데도 굳이 카르만 내부에서 여기로 피난 오는 사람들이 누군가 했더니.
“……포를랭 사람들이라고?”
난 황당을 넘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포를랭 상황이 개판이라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영지민들이 단체로 탈주할 정도란 말인가?
게다가 영지민들만 온 것도 아니었다.
“손등에 낙인이 찍힌 검사들도 함께 왔다고 합니다. 기사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헬렌의 말에 난 입을 떠억 벌렸다.
‘낙인이라면……. 기사들이 이탈한 게 아니라 추방당했단 말이야?’
포를랭의 기사들은 실력 있는 편이었다.
윗대가리들이 죄다 빡대가리라 그렇지 실력은 출중한 기사들이었는데, 그 기사들을 추방한 거야?
왜 쫓겨났는지는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포를랭 자작이 이상한 억지를 부렸을 거고, 세니아를 닮아 기사도 정신이 철저하게 박혀 있는 포를랭의 기사들이 거절했을 가능성이 컸다.
……아, 여기서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세니아는 물론 날 말하는 게 아니다.
“영지민들 말은 들어봤대?”
“예. 자작이 저택만 방어하고 그에 불복하는 기사들을 추방했다고 합니다. 영지민들도 견디다 못해 기사들을 따라 피난을 온 것이고요.”
급보를 전해온 기사의 말에 따르면, 영지민들 모두가 하나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포를랭 자작은 더 이상 저희의 목숨에 관심이 없습니다!’
포를랭 자작이 영지의 몬스터 관리를 거의 안 한다는 말들.
영지민들이 자경단을 꾸려 버텨왔지만 자작은 그마저 외면하고, 게이트를 방어하던 기사단 병력도 축소했다는 말까지 들려 왔다.
듣고 있자니 아주 가관이었다.
오죽하면 그들이 먼 길을 거쳐 에델바이스까지 왔겠는가?
중간의 다른 영지들을 거르고 온 건, 아마 에델바이스가 가장 게이트 관리에 뛰어난 영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이사할 거면 안전한 곳이 좋으니까.
다행인 건 다른 짭중세 배경의 던전들과는 달리, 이 세계는 영지민들의 이주가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헬렌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음…….”
다른 영지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일단 받아주고 나서 그 영지에 사람을 보내보았을 것이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포를랭 영지는 알아볼 필요도 없을 듯했다.
갑자기 게이트가 터져서 폭삭 망한 것도 아니고, 그냥 포를랭 자작의 지능 때문에 천천히 망해가다 일이 터진 것이다.
‘어차피 곧 반역죄로 모가지 날아갈 거, 그렇게 되면 영지민들이랑 기사단은 내가 거두려고 하긴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영지민 내팽개치고 기사들까지 추방해?
그 지능에 그 실력으로 저택은 어떻게 지키려고?
신재헌 손에 목 떨어지기 전에 먼저 죽어버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일단 임시 거처를 마련해서 사람들을 받아줘. 난 황성에 보고부터 올려야겠어.”
포를랭 자작이 얼마나 빡대가리냐와는 상관없이, 영지민을 지키는 건 영주의 의무다.
그 책임을 나몰라라 했으니 황제도 보고를 받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지시하고 서류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응.”
난 헬렌에게 손짓했다.
물론 신재헌에게 가는 서류는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여러분 내 영지로 피난민이 왔거든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피난민이요? 동제국에서 건너온 자들 말씀이십니까?]
주이안 헌터도 당연히 나와 똑같은 사고절차를 거치는 듯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동제국 피난행렬 끝났던뎅]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모두 의아해하는 가운데 난 당당하게 말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포를랭에서 왔대요]
잠시 침묵하던 채팅창이 폭발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또를랭 망했어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이건 또 새로운 정보야 나 팝콘 남은 거 얼마 없는데]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모든 영지민들이 다 온 건가요? 남은 영지민들은…….]
각자 자신의 관심사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세 사람에게 난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
당연히 내가 황성으로 보낸 보고서는 채팅보다 늦게 도착했다.
덕분에 신재헌은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상태로 내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내가 마음에 쏙 들어 할 답변을 내놓았다.
[영지민들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영주의 의무.
그런데 포를랭에서 이탈한 영지민들이 한 마음으로 포를랭 자작이 영지민들의 안전에 무관심하다 외치고 있으니, 이에 특별 조사를 명한다.
포를랭에서는 황가에서 파견될 특별조사관이 도착하기 전에, 속히 근 반년 이내의 게이트 관리 상황과 피해 상황 보고를 마무리하라.]
신재헌의 명령은 포를랭으로 보내졌지만, 당연히 채팅창에 먼저 공유되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자기 영지에 게이트 몇 개 떴는지도 모를 것 같은데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바로 그겁니다 이제 먼지털이 준비하시면됨]
신나게 털어보자 이거였다.
거참, 역모죄로 잡아넣으려고 가만히 입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설쳐서 건수를 만들어주네?
***
포를랭 자작가.
오늘도 포를랭 자작은 바빴다.
그의 앞에는 웬일로 전술용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 전술용 지도는 ‘포를랭 저택’ 근처만 복잡한 고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요컨대 그는 포를랭 저택만 지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병력이 부족한데…….”
그야 당연했다.
얼마 전에 명령에 불복종하는 기사 놈들을 싹 내보내 버렸으니까.
덕분에 기사단이 깨끗해진 건 좋았다.
문제는 생각보다 많은 기사들이 한 번에 나가면서 병력에 공백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이들을 내보내시면 방비할 병력이―’
‘비켜! 그럼 주인에게 검을 들이댈지도 모르는 기사놈들을 저택 주변에 놓으란 말이냐!’
쫓아내려고 하자 집사는 반대했지만, 그는 강경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바뀌어 막 일에 적응하고 있던 그 집사는, 어디론가 다시 도망쳐 버렸다.
‘놈을 잡아!’
그만두겠다고 인수인계하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도망치다니!
명령에 불복종한 기사들과 다름없는 놈이었다.
게다가 가문의 집사는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은가?
도망친 집사가 나가서 입을 놀렸다간 포를랭의 치부가 이곳저곳에 퍼져 나갈지도 몰랐다.
아무도 포를랭에 관심이 없다는 싸늘한 현실은 포를랭 자작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자작님!”
그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인상을 팍 썼다. 바빠 죽겠는데!
“무슨 일이냐!?”
―벌컥!
예의 없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건 전 집사의 하인이었던 자였다.
집사가 업무에 적응하다 말고 튀어 버리는 바람에 집사 일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자가 없어, 그나마 일을 좀 배운 전 집사의 전속 하인을 집사로 임명해 버린 것이다.
‘예? 제가요?’
하인에서 집사로 갑자기 승진한 본인은 물론이고 저택의 모두가, 심지어 키칼마저 경악한 인사 조치였지만 포를랭 자작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나마 집사 일을 아는 놈이 저놈밖에 없는 걸 어떡해?
“황, 황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
뭔 연락? 포를랭 자작이 눈을 깜빡였다.
“당장 보고서를 올리라는 황명이십니다!”
황가에서 온 종이를 황송하게 두 손으로 들고 온 초보 집사가 그의 책상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뭔 보고서를? 아니, 근데 이걸 펼쳐본 게냐?”
장난해? 황가에서 온 편지는 귀족이 펼쳐보는 것이 관례였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하인, 아니 집사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죽,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납작 엎드렸다.
포를랭 자작이 인상을 썼다.
“그 입 다물고 썩 나가거라. 넌 아무것도 못 본 게다.”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황족기만죄로 목이 날아갈 걸 걱정해야지, 쯧쯧.
다행히 아는 건 둘뿐이니 저만 입을 다물면 집사를 또 바꿀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집사가 더 바뀌면 정말 저택 내부의 일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사락.
대체 뭘 보고하라시는 거지?
설마 기사들을 내보낸 것?
포를랭 자작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차피 그건 변명거리가 충분했다.
“명령에 불복종한 기사 놈들을 내보내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검에 살고 검에 죽는 카르만에서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포를랭에서는 황가에서 파견될 특별조사관이 도착하기 전에, 속히 근 반년 이내의 게이트 관리 상황과 피해 상황 보고를 마무리하라.]
황가의 명령을 본 포를랭 자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상, 상황 보고?”
그런 건 정리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일단 사상자 파악을 하려면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인원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살아 돌아오는 인원도 거의 없어서 아예 기사들을 저택 주변에만 배치했으니, 당연히 게이트가 얼마나 나타났는지 따위를 알 턱이 없었다.
매달 보내야 하는 게이트 정기 보고도 그냥 지금까지의 포를랭 평균 수치에 맞춰 대충 보낸 것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조작한 서류로 보고한 것이었다.
어차피 황가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게이트 상황을 어떻게 일일이 알고 가짜 보고를 잡아낸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이걸……!”
그는 차마 황가에서 보낸 명령서를 찢어버리지 못하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영지민들이 어디로 튀었길래 이런 보고를 올리라는 거야!”
극대노한 그는 탈주한 놈들의 행방을 알아 오라고 아랫사람들을 들들 볶았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영지민들과 기사들이 오순도순 손을 잡고 에델바이스 영지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을 뿜었다.
“이놈드으으을!”
하지만 황가의 특별조사관이 오기 전에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 그가, 이미 영지를 떠난 영지민들에게 신경 쓸 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가 급히 서류를 준비하는 사이, 포를랭의 영지민과 기사였던 자들은 에델바이스 영지에 정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도 다 세니아 그것이 손을 쓴 게야!”
만물 세니아설을 주장하기 시작한 포를랭 자작이 이를 갈았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껏 에델바이스에 한 짓은 죄다 실패하거나 소식이 없다는 게 포를랭 자작의 화를 더 치밀게 했다.
“완벽해 보이는 건물도 한쪽만 무너지면 우르르 무너지는 법!”
제가 우르르 무너졌다는 건 애써 외면한 포를랭 자작이 이를 갈며 외쳤다.
“세니아……!”
기다려라!
본가를 이렇게 만들고도 너만 멀쩡할 줄 알고?
***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포를랭 자작도 발악할 것 같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발광한 결과가 우리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가 그걸 채팅에 전하자, 반응은 하나같았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정말 지치질 않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가만히 있어도 죽여 줄 텐데]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죽기 전에 버킷리스트 하고 있나봐]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죽음이 가까워지는데도 경솔한 행동을 하는 걸 보면, 여러 모로 신기한 자입니다.]
포를랭 자작이 건드린 건, 다름 아닌 연합 미야였다.
[연합 미야에서 게이트가 없는데도 병력을 움직이는 등 수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어떻게든 나를 멕여 보려는 노력이 가상했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수도 없는 헛소문과 기사에 시달려 본 사람들이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언론에 시달린 세월을 얕보지 마라ㅋㅋ]
덕분에 반격은 바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