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포를랭의 선임기사 이디스는 또 다른 선임기사 밀리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보나마나 단장님은 듣지도 않고 끊으실걸.”
“그럼 역시 듣기 좋은 말부터 해야 하나?”
밀리샤의 말에 이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칭찬만 듣고 뒷얘기는 잊어버리실 거야.”
“…….”
“…….”
본인들의 상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줄 아는 그들은 침묵했다.
“그럼 뭐라고 하지?”
밀리샤의 그 말 이후로 침묵은 더욱 짙어졌다.
그들이 논의하고 있는 건, ‘어떻게 해야 영지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이 상황을 기사단장이 대응하게 하는가’였다.
머리도 없고 의욕도 없는 주제에 권위의식만 출중한 기사단장은 절대 선임기사들이 병력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두지 않았다.
비상상황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상황이든 예외 없이 병력을 움직이려면 자신을 거치라는 게 기사단장의 명령이었다.
일반적인 귀족가였다면 납득할 만한 명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를랭은 아니었다.
기사단장에게 보고를 올리려면 일단 기사단장 찾기부터 해야 하는 이 동네에서 무슨 선보고 후처리란 말인가?
“으으음.”
이디스와 밀리샤가 머리를 싸맬 때였다.
―쿵쿵.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두 기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올 사람 있었어?”
“아니.”
이 방은 이디스의 방이었다.
아무래도 기사단장을 구워삶을(?) 계획을 짜는 중이었다 보니 방문자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이디스 경…….”
들려오는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이디스가 이마를 짚었다. 밀리샤의 표정 역시 떨떠름해졌다.
얼마 전, 본의 아니게 에델바이스의 마차를 약탈한 론의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훈련 빠져도 좋으니까 쉬라고 했는데, 또 왜 왔지?”
이디스는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달칵.
그가 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론은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상담, 아니, 이야기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포를랭 기사단에서는 기사단장에게만 면담 권한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똘똘한 놈인데 어쩌다가 이런 기사단에 와가지고…….
혀를 찬 이디스가 그를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야?”
“안, 안녕하십니까! 밀리샤 경.”
바짝 긴장한 론이 밀리샤에게도 인사했다.
밀리샤는 인사를 받아주면서 그를 살폈다.
어딜 다친 것 같진 않고, 훈련 빠진다고 누가 뭐라고 했나?
기사단에 그런 소리를 할 놈이 있던가?
이디스와 밀리샤가 비슷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였다.
―부스럭부스럭.
기사단 제복 주머니를 뒤지던 론은 별안간 주머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찰랑.
포를랭에서 흔치 않은 청렴의 상징인 이디스의 방에 돈 짤랑이는 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이디스는 당황했다.
“론 경?”
갑자기 울먹이는 얼굴로 찾아와서 돈은 왜 내민단 말인가?
하지만 론이 내민 건 돈주머니가 끝이 아니었다.
그는 편지를 하나 꺼냈다. 이미 열어본 흔적이 있는 편지였다.
―사락.
떨떠름한 표정으로 편지를 열어본 이디스의 표정이 변했다.
그 옆에서 함께 편지를 본 밀리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키칼 드 포를랭이 동제국에 망명을 요청하는 편지.
나름 비밀스럽게 쓴답시고 투명 잉크를 사용했지만, 불에 그을리면 편지 내용이 나오는 잉크는 10년 전에도 구닥다리라고 욕먹었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키칼이 당당하게 구닥다리 방식으로 비밀 편지를 쓴 바람에, 포를랭 기사단은 키칼이 뭘 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동제국으로 망명하겠다고?”
“이건 사실상 역모죄 아니야?”
이건 더 이상 포를랭 기사단에서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 어떡하죠?”
론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이디스를 올려다보았다.
이걸 전달했다간 론 역시도 역모죄로 사형이었다.
“일단 내 방에서 나가지 마. 키칼 님한테 모습을 보이면 곤란하니까.”
키칼은 게이트를 처리하러 갔지만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돌아와서도 론이 저택에서 보인다면 노발대발할 것이 뻔했다.
“알, 알겠어요.”
론을 안심시키며 밀리샤와 이디스가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이건 우리끼리 상의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결론 내렸을 때였다.
“이디스 경, 계십니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화들짝 놀란 론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키칼이 아무리 무능력해도 기사단에 그를 따르는 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가문의 실세였으니까.
……가문이 망해가서 그렇지.
“이쪽으로.”
밀리샤가 손짓했다.
론이 제 침대 안으로 슬라이딩한 걸 확인한 후 이디스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방 밖에 있는 건 공교롭게도 키칼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것으로 유명한 기사 중 하나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통보했다.
“가주님께서 영지의 기사단 수비 범위를 더 줄이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기사단장님께서도 허가하신 사항입니다.”
“뭐?”
이디스가 멈칫했다. 그러는 사이 기사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수비 범위를 줄이는 이번 건에 한하여 병력 움직임을 이디스 경에게 일임하시겠답니다. 그럼 이만.”
기사는 말만 전하고 가 버렸다.
―쿵!
문이 닫히고 이디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명령을 뇌까렸다.
그리고 화를 참지 못하는 밀리샤와, 이불 안에서 꼬물꼬물 기어 나와 당황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론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기서 수비 범위를 더 줄이면 영지민들 중 십 분의 일도 기사단의 보호를 받지 못해.”
밀리샤가 말했다.
“할 수 없지.”
이디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병력 이동은 내게 일임됐으니까,”
아주 잠시 갈등하던 그가 말했다.
“수비 범위 축소 명령에는 불복한다.”
그 말에 론이 눈을 크게 떴다.
상명하복이 중요한 기사단에서 명령불복종은 큰 죄였으니까.
***
“아이고, 기사님들!”
이디스는 자작의 명령과는 반대로 수비 범위를 넓혀 버렸다.
자경단을 꾸려 간신히 살아남고 있던 포를랭 영지민들은 당연히 그런 그들을 반겼다.
하지만 이디스가 명령에 불복하고 멋대로 영지의 수비 범위를 넓혔다는 소식은, 곧바로 자작의 귀에 들어갔다.
“이놈들이! 가주의 명이 명 같지 않은 게냐!”
그러자 이디스와 밀리샤를 비롯한 정신이 제대로 박힌 기사들은 항의했다.
“저희는 창고에 처박힌 녹슨 검이 되기 위해 기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영지민들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전장에서의 명령불복종은 즉결처분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작에게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시가 아니었다.
게다가 어쨌든 저들의 명분은 ‘영지민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제 목숨이 중해 게이트에 죽어가는 영지민들을 포기했다는 게 귀족 사회에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명령에 불복한 기사들을 추방해라!”
“……!”
추방령은 포를랭 기사단을 뒤흔들었다.
이디스와 밀리샤를 비롯한 선임기사 대부분과 실력 있는 기사들이 대거 추방당했기 때문이었다.
“명령불복종으로 추방당하는 것이니 당연히 낙인이 찍힐 것은 생각하고 있었겠지?”
대노한 포를랭 자작은 추방된 기사들의 손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인두로 지져 버렸다.
명령에 불복해 추방된 기사들이라는 뜻이었다.
낙인이 남은 기사들을 기사단으로 들일 귀족 가문은 없을 것이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단체로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서 영지민들은 당연히 통곡했다.
하지만 추방당한 기사들은 더 이상 포를랭에 머물 수 없었다.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몬스터라도 처치하고 가겠습니다.”
기사들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영지민들에게 절망적인 현실을 전했다.
“포를랭 자작은 영지민을 지킬 생각이 없습니다. 저희가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은 영지의 수비 범위를 저택 주변으로 한정하라는 것이었고요.”
그 말에 영지민들 사이로 고성이 솟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경단으로 버틴 것도 언젠가는 영주님께서 지원을 해 줄 거라고 생각해서였는데……!”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영지민들 중 한 명이 물었다.
“기사님들은 어디로 가십니까?”
그 말에 기사들은 잠시 고민했다.
기사들을 이끄는 이디스와 밀리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에델바이스 영지였다.
물론 손등에 이런 흔적이 남았으니 기사단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의 용병으로라도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에델바이스 영지로 가고자 합니다.”
“뭐라고요?”
“에델바이스?”
“게이트 관리가 가장 잘 된다는 곳 아닙니까?”
“세니아 아가씨께서, 아니, 백작님께서 계신 그…….”
영지민들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저희가 짐도 들어드리고 잡스러운 일도 할 테니 함께 에델바이스로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
이디스가 눈을 크게 떴다.
포를랭 대탈주의 서막이었다.
***
[가문의 명예 : 19202(102▲)]
[‘가문의 명예’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보상 : 신의 상점 Coin 57606, 전체 능력치 +5%]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A)
체력 : 1837500 (+10000)
근력 : 63000 (+40000)
마력 : 313251 (+10000)
민첩 : 52500 (+31120)
지구력 : 21000 (+10000)
방어력 : 21000 (+10000)
특수 버프 "천상의 힘(S)" : 스킬 발동 속도 10% 증가, 받아들이는 버프 효과 10% 증가]
음, 능력치 업 좋고!
“캬.”
난 보람찬 얼굴로 신의 상점 창을 바라보았다.
[Coin : 110124]
잡스러운 퀘스트나 몬스터 처치까지 포함해, 이번 퀘스트 보상으로 코인이 10만이 훌쩍 넘어 버렸다.
다시 스킬 열쇠를 살 때가 됐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여러분 명예코인퀘 끝났어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오오 결과는~?]
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소예리 헌터님 주식그래프 거꾸로 뒤집으면 비슷할 듯]
요컨대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까지 연일 하락세였던 소예리 헌터와는 달리, 큰 폭으로 상승했다는 뜻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19202로 마감이요 ㅋㅋㅋㅋㅋ]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오]
불과 얼마 전까지 1.2만이었는데, 정말 폭증도 이런 폭증이 없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축하드립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내 주식도 해 줄래?]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도박은 정신건강에 안 좋은……]
주이안 헌터의 도박근절캠페인 11번 대사가 나올 때였다.
“가주님!”
헬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뭐야? 게이트라도 터졌어? 관리 안 된 게이트 없었는데?
“무슨 일이야?”
답하자마자 헬렌이 급히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피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피난민?”
아니, 어디에서 피난민이 몰려와?
“동제국 쪽 피난 행렬은 정리되지 않았어?”
내 말에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카르만 내부입니다!”
“???”
카르만에서 카르만으로 피난을 오는 사람들이 있다?
난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