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머릿속이 깨끗해지자 집중은 더 잘됐다.
―파앙!
얼음 결정이 부서지면서 격렬한 소리를 터뜨렸다.
[받아치기(C) 스킬을―]
[흘려보내기(A) 스킬을 사용합니다.]
사용이 익숙해지자 시스템창이 보이기도 전에 스킬이 연사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파아앗!
소예리 헌터도 내 컨디션이 좋아진 걸 느꼈는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거대한 얼음 걸정을 쏘아 보냈다.
“!”
맞으면 얼음 감옥에 갇히는 게 아니라 냉동인간이 될 판이었다.
이이렇게 세게 갈기는 게 어디 있어!
물론 따질 틈은 없었다.
[순간가속(SS)을 사용합니다.]
[잔상(SS+)을 사용합니다.]
[잔상(SS+)―흘려보내기(A)를 사용―]
[잔상(SS+)―받아치기(C)를 사용합니다.]
[……사용합니다.]
시스템창이 여러 번 겹쳐서 뜬 순간.
[스킬 매크로가 생성되었습니다.]
[‘매크로2(가제)’의 이름을 지정해주십시오.]
“!”
난 시스템창이 뜬 순간부터 열렬한 눈으로 소예리 헌터를 보기 시작했다.
“오?”
공격을 멈춘 소예리 헌터는 놀랍게도 내 사인을 알아들었다.
“드디어 매크로 만들어진 거구나!”
소예리 헌터가 목을 가다듬었다.
“소예리 작명소 갑니다!”
내게 후욱 날아온 소예리 헌터가 내 귀에 속삭였다.
“슈퍼울트라제네럴킹…….”
[‘방어1검식’ 지정되었습니다.]
난 내 뇌에 기괴한 작명이 들어오기 전에 간신히 매크로 이름을 지키는 데에 성공했다.
[스킬 매크로 :
- 지금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
- 방어1검식(A)]
“휴.”
간신히 이름을 지켜낸 순간이었다. 소예리 헌터가 눈을 빛냈다.
“어떻게 됐어요? 슈퍼울트라제네럴킹갓검술로 됐어요?”
“됐겠어요!”
또 이상한 거 할 뻔했네!
내 완벽한 시스템창에 버터관자구이 이상의 오점을 남길 순 없어!
“앗, 아깝.”
소예리 헌터가 내게서 다시 훅 떨어져 나갔다.
아무리 봐도 작명소 운운할 때부터 슈퍼울트라 어쩌고 하는 이름을 생각해둔 게 분명했다.
“아깝긴 뭐가 아까워! 이리 안 와!”
난 칼을 들고 소예리 헌터를 쫓아갔다.
깔깔 웃는 소예리 헌터가 바닥에서 살짝 떠올라 공터를 가로질렀다.
“소예리 작명소라면서요!”
“사업자 안 냈어!”
그걸 핑계라고! 이 웬수를 그냥!
내가 깔깔 웃으면서 도망가는 소예리 헌터를 쫓을 때였다.
“이게 다 신유리 헌터님의 자립을 돕기 위한 거라고요. 급한 상황에서도 몬스터 날아오는데 어쩌고 하는 이름을 짓지 않기 위해선 충분한 연습을―”
그녀가 손을 펴 보이며 설명하는 사이.
“뒤에!”
중간부턴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난 소예리 헌터에게 무지막지한 속도로 돌진해오는 엄청난 크기의 장수풍뎅이 이종사촌을 보고 기겁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몬스터였다.
게다가.
[?]
머리 위엔 랭크가 뜨지 않았다.
내가 A급이니 적어도 S급 몬스터. 게다가 전신이 딱딱한 외피로 덮여 있어 어지간한 찌르기는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응?”
소예리 헌터가 돌아보고 피하길 기다릴 틈은 없었다.
[순간집중(SS) 스킬을 사용합니다.]
[잔상(SS+) 스킬을 사용―]
[잔상(SS+)―]
[매크로 ‘지금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를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 에델바이스 검(C)]
[빠른 스킬 중첩으로 속도 보너스 적용(10%, 헌터랭크 상한)]
[빠른 스킬 중첩으로 데미지 보너스 적용(10%, 헌터랭크 상한)]
[버터관자구이 먹고 싶다(E) 스킬을 사용합니다.]
[포를랭 4검식(A)을 사용―]
[합니다합니다합니다]
급한 마음에 매크로까지 섞어 쓴 게 그대로 적용되어 버렸다.
시스템창이 뜨거나 말거나 난 검 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저 몬스터가 움직일 때 드러나는 부위.
그 부위에 정확히 검을 찔러 넣지 않으면 소예리 헌터가 저 뿔에 받히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매크로1(가제)’의 이름을 설정해주십시오.]
그때 시스템창이 눈앞을 가렸다.
비켜!
[‘비켜(A)’ 지정되었습니다.]
[매크로 ‘비켜(A)’ 사용합니다.]
[빠른 스킬 중첩으로 속도 보너스 적용(30%, 헌터랭크 상한)]
[빠른 스킬 중첩으로 데미지 보너스 적용(30%, 헌터랭크 상한)]
―푸욱!
놀란 소예리 헌터의 옆을 미끄러지듯 치고 들어간 내 검이 몬스터의 외피 사이를 찌르고 들어갔다.
“어어엄마야.”
소예리 헌터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숲딱딱벌레+(S)를 처치했습니다!]
[한 방 보너스 경험치+20%]
숲딱딱 뭐요? 성의 없는 이름 옆에 붙은 +도 수상했다.
그런데 더 수상한 건 내 매크로창이었다.
“헉, 뿔에 받힐 뻔했네.”
소예리 헌터가 한숨을 돌리는 사이 난 인생무상을 느끼고 있었다.
소예리 헌터를 구할 수 있었던 건 좋았다. 그런데.
[스킬 매크로 :
- 지금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
- 방어1검식(A)
- 비켜(A)]
“…….”
난 심각한 표정으로 스킬 매크로창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버터관자구이나 지금 몬스터 날아오는데 어쩌고보다는 정상적인 것이 아닐까?
“괜찮아요?”
난 일단 시스템창에서 눈을 떼고 소예리 헌터를 살폈다.
잔상에 익숙한 눈으로도 그녀의 몸에 몬스터가 스치는 걸 보진 못했으니, 다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예리 헌터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덕분에 멀쩡해요. 깜짝 놀랐지 뭐야. 근데…….”
그녀가 날 살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요? 무리한 거 아니죠?”
“무리한 건 아니고…….”
난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전에 급하게 스킬 쓴다고 공격 스킬 중첩되면서 매크로가 하나 더 생겼거든요?”
“오!”
신스킬에 눈을 빛내는 사람답게 소예리 헌터는 신규 매크로에도 눈을 빛냈다.
“근데 시스템창이 시야 가리는 게 거슬려서 비키라고 생각했다가 이름이 ‘비켜’로 설정돼버렸어요.”
“내가 못 살아!”
소예리 헌터가 깔깔대며 바닥을 굴렀다.
긴장이 풀리자 열이 받기 시작했다.
“아니, 급박한 순간에 나오는 매크로인데 이름 제대로 지을 수 있는 사람 없을걸?”
하지만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있는 법.
바닥을 구르던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이안 헌터님이면 가능할지도 몰라.”
“…….”
이……건 반박할 수가 없다!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있는 것도 모자라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어?”
소예리 헌터는 바닥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집어올린 건 웬 날카로운 돌조각 같은 거였다.
“뭐예요? 갑자기 뗀석기에 관심이라도 생겼어요?”
뗀석기치고는 하얗고 푸른 색이 섞인 것이 좀 고급스러워 보이긴 했다.
이게 바로 뗀석기 로얄패밀리 에디션?
“그게 아니라, 이거 마력석인데요?”
“네?”
뗀석기 로얄패밀리 에디션이 아니라 뗀석기 매지컬 에디션이었어?
난 우리가 올라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마력석은 광산 안에서만 나는 거 아니었어요?”
뭐, 산에서 조개껍데기도 발견된다는데 이 세계라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않나?
내가 가볍게 생각할 때였다.
의외로 소예리 헌터의 표정은 심각했다.
“마력석은 광산 밖에서도 나긴 하는데…… 이건 애초에 에델바이스에서 나는 마력석이 아니에요.”
메이드 인 어쩌고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눈으로만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감정 스킬을 쓰지도 않았는데?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소예리 헌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력석에 새겨진 마력 흐름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건…….”
말하던 소예리 헌터가 찜찜한 표정으로 말했다.
“포를랭 마력석 같은데요?”
“예?”
또를랭이요?
소예리 헌터의 말을 들은 난 심각하게 고민했다.
“혹시 제가 시스템의 일방적인 구애를 받고 있는 게 아닐까요?”
“?”
소예리 헌터가 끔찍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농담이거든요?
“아니, 아까 S급 퀘스트가 포를랭 조지기였잖아요. 근데 그게 모가지 따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문 평판 같은 것도 깎아야 클리어가 되는 모양이라.”
“오?”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포를랭의 마력석을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딱 굴러들어왔네요?”
그러게요? 난 마력석을 가리켰다.
“포를랭은 마력석 판매 안 하고 자기 영지에서만 쓰잖아요. 이거 포를랭 마력석이라는 거 증명할 방법 있을까요?”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게이트 사태 전이면 모를까, 전국 각지에 마법사가 널렸는데.”
그녀가 마력석을 흔들어 보였다.
“각 마력석 산지마다 마력석 무늬가 다르거든요. 게다가 이건 몬스터에 박혔던 흔적도 있으니 뭐…….”
포를랭산 마력석은 굳이 사는 놈도 없지만 애초에 팔지도 않는다.
지들 쓰기 바쁘거든.
애초에 포를랭 가에서 철저하게 관리하는 품목 중 하나가 바로 이 마력석이었다.
따라서 이 마력석이 뜬금없이 내 영지 한가운데의 몬스터 등짝에서 발견됐다는 건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포를랭이 에델바이스를 엿 먹이려고 했다는 것.
“뗀석기를 증거품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난 볼을 긁적였다.
리카스는 지금쯤 동제국과 포를랭으로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수련도 할 겸, 어디 마음껏 헤집어 보라고 저택도 비워줬으니까.
그러면 곧 ‘딜3탱2힐1보1’이라는 희대의 멍청이 조합으로 게이트를 공략하려는 멍청이들이 나올 거다.
그게 S급 전용이라곤 했지만 A급 상위에도 똑같은 공략을 사용할 테니까.
그리고 그 기가 막힌 공략법을 쓰는 곳은? 포를랭과 동제국뿐일 것이다.
그때쯤 리카스가 킨나와 내통했던 편지를 증거로 그놈의 모가지를 달아 버리면 아주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사교계에 소문부터 내야겠네요.”
포를랭 자작이 내 가문 몬스터 등짝에 뗀석기 매지컬 에디션 달아놨다고.
아마 근래 게이트 사태로 지쳐 있던 사교계 사람들에게 그 소문은 새로운 활력이 되어줄 것이다.
[포를랭 자작이 딸의 번영을 기원해주진 못할망정 더러운 뒷수작을 썼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