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리카스는 순한 제 동생을 떠올렸다.
분명 사람이라면 포를랭에 쌓인 게 없을 수가 없다.
그 증거로 그 착하디착했던 세니아가 돌연 에델바이스 백작가로 분가 선언을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래 봐야 어린 귀족일 뿐.”
리카스 자신은 세니아보다 훨씬 어렸을 때부터 동제국의 첩보원으로 활동한 자였다.
당연히 여러 종류의 경험상 세니아를 앞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시 세니아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갔다.
“세니아는 사람을 너무 믿는단 말이지.”
세니아, 신유리가 들었으면 기도 안 차 했을 소리를 늘어놓으며 리카스가 세니아의 방을 뒤적거렸다.
물론 신유리는 중요한 서류는 A급 기념으로 넓어진 인벤토리에 모조리 넣고 다녔기 때문에, 리카스가 건질 수 있는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인벤토리의 존재를 알 리 없는 리카스는 자신했다.
“네가 아무리 서류를 숨겨 봐야 거기서 거기지.”
자신의 첩보 활동이 어디 한두 해인가?
귀족들이 서류를 숨기는 곳은 다 정해져 있다, 이 말이다!
그는 신유리가 정리하기 귀찮아서 책 사이에 끼워 놓았던 서류철을 꺼내면서 눈을 빛냈다.
“역시 이런 곳에 넣어 놨군.”
[1분기 게이트 관리 기록]
관리 기록이라면 분명 게이트 관리법에 대한 내용도 있겠지?
뿐만 아니라 기이하게도 에델바이스 영지에 관심이 많은 마탑과 황가, 신전에서 어떤 대가를 받고 병력을 빌려줬는지도 빠짐없이 나와 있을 것이다!
역시 세니아는 귀족들 간의 간계에 익숙하지 않아서 경계심이 별로 없다니까?
―펄럭!
리카스가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그러면서 포를랭 자작을 생각했다.
‘정보 길드를 동원해도 그 애에 대해선 알 수 있는 게 없어! 네가 직접 가서 에델바이스 영지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라.’
‘어떻게 게이트를 막는지, 물자 같은 건 어디서 공수하는지 어떤 정보든 좋으니 가져와!’
분명 아버지인 포를랭 자작은 그렇게 말했지만, 리카스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얼마나 멍청한 정보 길드를 썼길래 아무것도 못 알아본 거야?”
그러면서 그는 1분기 게이트 관리 기록 서류철을 접었다.
“……일단 여긴 별것 없군.”
하지만 실망하긴 일렀다.
서류가 어디 이거 하나뿐이겠는가?
그는 능숙하게 인기척을 감춘 채 세니아의 방을 뒤적거렸다.
검은 잘 못 써도 잠입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였다.
―사락, 사락.
방 안에는 그가 종이 넘기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 마탑이나 신전, 황가와 오간 문서가 남아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렇게 잦은 연락을 할 순 없다!
그것만 있으면 에델바이스와 그 세 세력이 어떤 관계로 얽혀 있고, 어떻게 이토록 긴밀해졌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눈을 빛내며 종이를 넘겼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아차.”
중요한 걸 잊을 뻔했군.
세니아가 없어 상대적으로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편지를 보내야 한다.
그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기이한 모양으로 말아 피리를 만들어냈다.
―휘이익!
그리고 창문을 살짝 열어 불었다.
피리에서는 바람 소리와 비슷한 기이한 소리가 났다.
전서구용 새를 부르는 비밀스러운 방법이었다.
“…….”
그는 새가 오길 기다리며 재빨리 편지를 작성했다.
물론 마법 잉크로 쓰인 것이었다.
하나는 동제국의 킨나에게, 다른 하나는 리카스 자신을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더 멍청한 포를랭 자작, 아버지에게.
멍청하기가 도토리 키 재기라는 걸 알 리 없는 그는 포를랭 자작을 비웃으며 편지를 썼다.
[에델바이스 영지에서 붉은색 게이트를 상대하는 방법은, 기사 셋과…….]
편지를 쓴 그가 씩 웃었다.
새빨간 게이트를 상대해본 영지는 카르만에서도 몇 없다.
당연히 동제국에는 귀하디귀한 정보가 될 것이다.
이걸로 킨나에게 리카스 자신의 효용 가치를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삐이!
그는 창문으로 조심스럽게 날아 들어온 두 마리 새의 발목에 마법 잉크로 쓰인 편지를 묶었다.
그리고 제각기 동제국과 포를랭 방향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 창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세니아가 돌아오기 전에 어서 증거를 찾자!
“…….”
하지만 그가 편지를 보낸 후 한참 동안 세니아의 방을 뒤져도, 눈에 띄는 서류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쯤, 신유리는 소예리의 공격을 막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리카스가 이때다 하고 제 방 가서 삽질하고 있지 않을까요?”
정답이었다.
매우 안타깝게도 리카스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는 신유리의 인벤토리와 채팅창에만 있었지만.
***
수련은 밤까지 이어졌다.
그런데도 좀처럼 매크로를 만들 수 없었다.
“쉬울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지금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도 다급한 상황에서 만들어졌던 걸 생각하면 쉽게 생길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얼음 결정 막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냥 나와 주면 안 될까?
―쩌저적! 쨍!
물론 수도 없이 얼음 결정을 막아내면서 내가 매크로를 못 얻는 이유를 알아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써야 하는 스킬은 잔상과 받아치기, 흘려보내기.
세 가지 스킬을 중심으로 여러 상황에서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는 방어계 검술 매크로를 만들어야 했다.
일단 내게 방어 스킬이 별로 없으니 익숙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스킬 여러 개를 한 번에 묶어 사용하려다 보니 검로가 꼬이는 건 당연했다.
“으음.”
아무래도 받아치기는 동작이 크니까 흘려보내기를 위주로 해야 하나?
그럼 데미지 감소 효과가 줄지 않을까?
딜러도 스킬 생각할 땐 두뇌가 풀가동된다는 사실을 내 머리로 직접 확인하면서 난 점점 말이 없어졌다.
“…….”
소예리 헌터도 내가 집중하는 걸 알았는지, 말없이 얼음을 쏘아 보내주었다.
―쨍!
물론 얼음은 같은 각도로 날아오는 법이 없었다.
멍 때리고 있다 보면 뒤통수가 싸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보면 어김없이 날카로운 얼음 결정이 내 뒤통수로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
―파삭!
그걸 쳐내면서 난 머릿속을 다시 가다듬었다.
얼음 결정을 저렇게 다양한 경로로 쏘아 보내주는 것도 노동이다.
소예리 헌터는 정말 신경 써서 도와주고 있는 거였다. 그만큼 나도 열심히 해야 했다.
―쨍!
다시 검과 얼음 결정이 부딪혔다.
“아.”
흘려보냈어야 했는데. S급 스킬과 정면으로 검이 맞부딪히자 확실히 손이 저릿했다.
다시 한번 검을 내뻗으면서 난 입술을 깨물었다.
리카스 그놈도 그렇고, 포를랭 자작도 그렇고.
이 세계의 사람들이 자꾸 나를 노리려 든다.
물론 포를랭 쪽이야 내가 잘되면 본인들 가문이 망신이라 그런 것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덤빌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콰직!
난 아래로 날아 들어오는 얼음 조각을 밟아 없애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놈들이 자꾸 날 노리는 이유는 결국 하나다.
내가 약해서.
자꾸 건드리는 거야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헌터팀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저택의 손님 던전에 다녀온 후 확실히 느낀 게 있었다.
‘이번 던전은 쉬어간다고 생각하시고…….’
‘에이, 저번 던전에서 열심히 하셨으니까 시스템이 쉬라고 하나 보다~’
간혹 RP나 특수던전에 들어가면 스탯이나 스킬에 사용 제한이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 던전에서의 나처럼.
그때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세 헌터도 그렇고, 스탯이 깎인 사람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놀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셋이 더 신경 써서 공략하면 되니까.
……그래, 지금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러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은 안일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런 후회를 한 게 벌써 10년 전이었다.
10년이나 지났다고, 그리고 주변에 강한 헌터가 세 명이나 있다고, 잊고 있었나 보다.
내가 강해져야 하는 이유를.
내가 강해야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를.
내 행복을 지키려면 끊임없이 강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사실을 명백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히든 퀘스트 : 보다 강한 힘]
[진정 힘을 깨우쳐야 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나를 위협하는 적을 철저하게 짓밟으세요.]
[‘지정된 상대’의 사회적 평판, 심신 안정과 재산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때마다 점수가 쌓입니다.]
[클리어 목표 : 100점 이상]
지정된 상대라고?
난 순간 눈을 반짝였다.
이거 상대를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다음 순간 난 눈을 크게 떴다.
[보상 : S급 각성]
“……!”
내가 멈칫하는 바람에 소예리 헌터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그녀는 마침 내 이마로 얼음 결정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챙!
지척까지 다가온 얼음 결정과 이마 사이로 검을 들이미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 늦게 막아! 놀라 자빠질 뻔했잖아요!”
소예리 헌터가 한숨과 함께 안도가 묻은 잔소리를 해댔다.
“수련하다가 멍 때리기 있기 없기?”
소예리 헌터의 말에 난 손을 들어 보였다.
“있기.”
“뭐어어?”
소예리 헌터가 허리에 손을 얹었을 때, 내가 씩 웃었다.
“방금 S급 각성 히든 퀘스트 떴거든요.”
“앗.”
소예리 헌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엄지를 척 올려 보였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놀랄 만했죠? 멈출 만했죠?
난 시스템창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지정된 상대가 누군데?
짓밟고 싶은 상대를 골라 오라 하면 목록도 뽑아올 수 있었다.
일단 헌터협회부터……. 아, 얘네는 이 던전 밖이라 안 되나?
그때, 시스템창은 친절하게도 상대를 지목해 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상대는 너무나도 당연한 놈들이었다.
[지정 상대 : 포를랭 일가]
……이놈들을 조져버리는 건 너무 당연해서 목록에서 잠시 빠져 있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저 S급 각성 히든퀘 떴어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축하드립니다]
주이안 헌터의 채팅이 곧바로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조건이 뭔데요?]
난 눈앞에 뜨는 시스템창을 보면서 말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포를랭 완벽하게 조지기]
정확히는 내 안전을 위협하는 놈들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
그리하여 헌터팀에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는 것.
난 시스템창의 포를랭이란 이름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