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금빛은 소예리 헌터의 손 안으로 쏙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오.”
조용한 가운데 눈을 감았던 소예리 헌터가 눈을 떴다.
마치 아까의 금빛이 눈동자에 흡수된 것처럼 눈을 빛내던 그녀가 밝게 웃었다.
“시간의 힘 20 충전됐대요.”
“오…….”
생각보다 모으기 쉬울 것 같은데?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인벤토리에서 ‘흘러간 시간을 나타내주는’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음식은 안 되나?”
신재헌이 물었다.
“되겠어요?”
음식으로 시간 인증하려는 놈이 어디 있어?
역시 고등학교 때 ‘냉동실은 시간이 멈춘 곳이라 두 달 지난 피자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한 놈다웠다.
냉장고가 무슨 시간과 정신의 방이야?
그냥 냉장고를 갖다 넣지 그러냐?
그러는 사이 난 인벤토리에서 좋은 물건을 발견했다.
“이건 안 될까요?”
내가 꺼낸 건 다름 아닌 몽당연필이었다.
저번에 학교 RP던전 가서 얻은 물건.
어디다 쓰나 했는데 여기서 쓰임을 찾을 줄이야.
몽당연필도 따지자면 오래 쓴 물건의 대명사 아닌가?
“오!”
소예리 헌터가 눈을 반짝이며 인벤토리에서 몽당연필을 꺼냈다.
넷 다 받은 보상이라 금세 우리 가운데에 몽당연필 네 개가 보였다.
“어디 한번…….”
눈을 빛낸 소예리 헌터가 집게손가락으로 몽당연필을 잡았다.
아무리 소예리 헌터가 힘 쓰는 클래스는 아니라지만 S급은 S급.
―빠각!
소예리 헌터가 거침없이 몽당연필을 부러뜨렸다.
―파앗!
심장이 부서졌을 때보다는 작은 금빛이 소예리 헌터의 손 안으로 쏙 사라졌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소예리 헌터가 외쳤다.
“5점!”
“오.”
4개면 20점이란 소리였다.
우리 셋이 건넨 몽당연필이 소예리 헌터의 손에서 부러져 나갔다.
―사아아…….
부러진 몽당연필은 금빛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려 버렸다.
“총 40점 됐어요.”
“또 할 만한 거 없나?”
다들 인벤토리를 뒤적여봤지만 나오는 건 별로 없었다.
물론 들고 다니는 아이템들이 있으니 넣을 물건들이야 많았지만, 문제는.
“점수…… 엄청 짠데요?”
이거였다.
물건 몇 개를 더 박살 내 본 소예리 헌터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대부분이 0.05점이나 0.01점 같은 짠 점수를 주는 탓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이 RP던전에 있는 물건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신재헌은 누가 불속성 딜러 아니랄까 봐 벽난로에서 불타던 장작을 가져오기도 했다.
분명 굵고 튼튼하게 자란 나무가 시간과 무관하진 않을 텐데도, 부서진 장작에서는 금빛 가루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여기 물건으로 됐으면 진작 100점 채우지.”
소예리 헌터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여러 가지 물건을 실험해본 결과는 이랬다.
“적어도 여기 말고 다른 던전에 있었던 물건이어야 하는 것 같네요.”
주이안 헌터가 말했다.
이 ‘연약한 시한부 영애에 빙의해버렸다(L)’ 던전에서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안 되고.
몽당연필이나 심장처럼 다른 게이트에서 구해온 물건 중에서도, 그 던전에서 구하기 힘든 물건만 시간의 힘을 주는 듯했다.
보스 클리어 보상이나 던전 클리어 보상 같은 거.
와중에 의외인 물건이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도 되는 것 같은데요?”
소예리 헌터가 부러뜨려 본 건 주이안 헌터가 필기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던전산 필기구였다.
아, 물론 주이안 헌터 허락받고 박살 냈다.
“필기구가 시간 흐르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점수가 5점이나 됐어요.”
“많은 게이트에 들고 다녀서 그런 거 아닐까요?”
게이트마다 흐르는 시간은 다르다.
우리가 이번 저택 던전에서 수일을 보냈는데도 여기선 한나절 반밖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그럼 많은 던전을 다녀온 물건이 ‘많은 시간을 경험’했다는 것도 말이 되었다.
“스킬이 편식이 심하네.”
소예리 헌터가 얻은 회귀 스킬은, SS급 스킬 주제에 아주 까다로운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다들 앞으로 게이트 가면 재밌는 거 주워올 것.”
소예리 헌터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좋아, 그럼!”
그녀가 만세 하듯 기지개를 켰다.
이 행동이 말하는 바는 한 가지!
“부어라, 마셔라!”
뒤풀이 시작이었다.
***
밖에는 회의라고 해 뒀지만, 어차피 여기 온 목적은 치료와 뒤풀이 말고는 없었다.
회의 같은 머리 복잡한 건 나중에 채팅으로 해도 돼! 괜찮아!
밖의 서제국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할 만한 생각을 나만 하는 건 아닌 듯했다.
그 증거로 우리 넷 중 누구도 일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 당연하다.
어딜 신성한 뒤풀이 현장에서 일 같은 더러운 이야길 꺼내?
“그래도 이번 뒤풀이는 건강하게 진행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주이안 헌터는 온화한 얼굴로 웃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앞에는 간단한 음료와 주전부리 등이 놓여 있었다.
주이안 헌터가 오랜만에 솜씨를 뽐낸 덕에 여러 가지 음식이 늘어져 있기도 했다.
“나…… 감동스러워요.”
소예리 헌터는 던전산 재료로 만들어진 김치찌개 앞에서 감동받고 있었다.
“서제국 음식 너무 입에 안 맞았다고요!”
나와 신재헌은 옆에서 감탄하고 있었다.
“인벤토리에 온갖 것 다 갖고 계시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김치찌개 레토르트 식품도 아니고, 김치찌개 재료가 다 들어있지?
“짭쪼롬하게 끓여줘! 짭쪼롬하게!”
소예리 헌터가 앉은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소주 한 병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입맛을 다셨다. 주이안 헌터가 웃었다.
“아쉽게도 술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없을까요?
난 신재헌을 돌아보았다.
“진짜 없어요?”
그 말에 긴장(?)한 주이안 헌터와 소예리 헌터의 시선이 신재헌을 향했다.
신재헌의 얼굴의 의문의 미소가 맺혔다.
내 확신이 좀 더 짙어졌다.
저 자신 있는 얼굴.
“지하 한번 가 봐요.”
난 확신에 차서 말했다. 신재헌은 이 별장에 익숙해 보였으니까.
그렇다는 건 당연히?
“지하는 왜요?”
소예리 헌터가 눈을 깜빡였다.
“와인 창고가 있을 게 분명해.”
“?”
주이안 헌터의 미소에 금이 갔다. 모두의 시선이 신재헌을 향해 쏠렸다.
“어라.”
없어용!
근데 신재헌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탁, 탁.
그리고 들으란 듯이 계단 딛는 소리가 나더니 지하로 향하는 계단 쪽에서 신재헌이 걸어 나왔다.
그의 품에 안긴 열 개의 술병을 보고 소예리 헌터와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아니, 술은 아직…….”
주이안 헌터는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야전병원에 집중치료까지 받았는데 컨디션이 안 좋을 리가 없다는 걸.
하지만 그는 ‘S급 헌터라도 안 좋은 것을 굳이 찾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힐러답게 우리를 만류했다.
그러자 소예리 헌터가 씩 웃었다.
“이런 날엔 아껴뒀던 것도 꺼내야지.”
그러면서 던전산 소주를 꺼내들었다. 그러면서 와인병을 땄다.
아아아니, 어디에 뭘 말려는 거야?
“아니, 그걸…….”
주이안 헌터도 당황한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소예리 헌터가 꺼낸 소주는 알코올 함량도 높기로 유명한 소주라 그런 듯했다.
그러자 소예리 헌터가 비기를 썼다.
“나 부활 기념.”
“…….”
이……건 못 이기지.
결국 주이안 헌터는 입을 다물었다.
“되지? 가능하지? 마셔도 잔소리 없지?”
소예리 헌터가 기쁜 얼굴로 물었다. 주이안 씨가 이마를 짚다가 결국 웃는 게 보였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야호!”
소예리 헌터가 환호성을 질렀다.
어휴, 못 살아.
지금이야 웃음이 나오지만 정말 소예리 헌터가 사라졌을 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한잔 주세요.”
결국 주이안 헌터마저 술을 깠다.
그러다가 아예 병나발을 불 기세인 소예리 헌터를 보고는 슬그머니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대신 소예리 헌터님은 특단의 조치 수프를 한 번 더―”
소예리 헌터는 잠깐 멈칫했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술은 주이안 헌터님도 마시잖아.”
그러더니 예쁘게 웃었다.
“그니까 힐러님이 먹자.”
보, 보조계의 역습이다!
순간 주이안 씨의 얼굴이 하얘졌다.
나와 신재헌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호오.
지금껏 공포의 수프를 먹이기만 했지 먹은 적은 없는 주이안 헌터였다.
“힐하느라 고생하셨잖아요.”
나도 소예리 헌터의 말에 보탰다.
주이안 헌터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특단의 조치’가 든 팩을 다시 인벤토리로 집어넣으려고 했다.
―쓱!
그걸 알아챈 신재헌이 잽싸게 그의 손에서 팩을 뺏어 들었다.
모두 생각이 같은 게 분명했다.
주이안 씨도 이 공포의 맛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제가 직접 공격을 받은 건 아니라 괜찮습니다.”
주이안 헌터는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우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스킬 많이 쓰셨잖아요.”
술 마시기 전에 속 달래는 거야!
나와 소예리 헌터가 주장하는 사이 신재헌이 부엌으로 향했다.
“끓여 오겠습니다.”
“아니…….”
주이안 헌터가 말릴 틈도 없이 신재헌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수프 한 그릇을 들고 왔다.
우리가 평소에 먹던 것보단 좀 양이 적은 것 같았지만.
나머진 어디 갔지?
내가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드세요.”
신재헌이 웃으면서 주이안 헌터의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주이안 헌터의 양쪽 어깨는 소예리 헌터와 내가 한쪽씩 누르고 있었다.
탈출 금지!
“……특단의 조치를 많이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드세요.”
신재헌이 다시 말했다. 주이안 헌터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아무래도 제가 먹기에는―”
“드세요.”
“―아까운…….”
“드세요.”
신재헌이 기계처럼 반복했다. 무표정한 저 얼굴은?
나와 소예리 헌터는 웃으면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주이안 씨 화났을 때 얼굴이랑 판박이잖아!
“…….”
주이안 헌터는 결국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미래를 직감한 듯했다.
“후우.”
그러더니 두 손으로 그릇을 잡았다.
“어, 손 떨리는데?”
어깨를 잡고 있던 난 그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알아챘다.
“제가 먹기에는…….”
입가로 그릇을 가져갔던 주이안 헌터가 다시 거절의 말을 뱉으려는 때였다.
“드세요.”
신재헌이 다시 말했다.
“쭈우욱. 원샤앗.”
그리고 소예리 헌터가 그릇을 주이안 헌터의 입에 대고 기울여 주었다.
“아까웁.”
말하느라 입을 벌리고 있던 주이안 헌터의 입으로 수프가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 셋은 그 순간 보았다.
주이안 헌터가 인상 쓰는 것을!
“와! 못 먹는다!”
“인상 쓴다!”
“언젠 먹는다며!”
“자긴 잘 먹는다며!”
“사기꾼!”
우린 당연히 난리가 났다. 언제는 잘 먹으니까 우리나 먹으라며!
수프가 덜어진 양을 봐서는 거의 입에 대기만 했던 것 같은 주이안 헌터가 빠르게 변명했다.
“당황해서 그렇습니다. 보세요.”
그러더니 수프 그릇을 잡고 원샷했다.
“오~”
소예리 헌터가 감탄하는 사이 난 중요한 걸 알아챘다.
“숨 참고 마시는데?”
“쿠흡.”
주이안 헌터는 이번엔 사레가 들린 듯했다. 그가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더니 맛있게 먹은 것처럼 옅게 웃었다.
“이제 마셨으니,”
하지만 신재헌은 그 모습에 기다렸다는 듯이 부엌에서 들통을 들고 나왔다.
저 커다란 통은 또 어디서 난 거야?
그가 뚜껑을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특단의 조치로 만든 국(?)이 들어 있었다.
“그러실 줄 알고 준비했죠.”
사흘 밤낮을 먹어도 안 사라질 것 같은 양에 주이안 헌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결국 그가 실토했다.
“저도 많이는 못 먹습니다.”
“언젠 맛있다며!!!”
사기꾼!!! 몇 년 동안 우릴 속였어!
소예리 헌터가 방음벽을 쳐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저택이 떠나가라 아우성을 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