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으아악!]
용케 찢어지는 것을 피했는지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 장막(L)’ 스킬을 사용합니다.]
[헌터팀 파티원에게 스킬 버프 상태가 공유되지 않습니다.]
굳이 버프창에 스킬을 띄워서 걱정시킬 필요는 없겠지.
소리 없이 웃은 그가 감춰진 상태창 아래에서 스킬을 사용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 S급(딜러)
- 버프 : 화염검(SS)]
인벤토리에서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온 말레티아의 검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그림은 불에 닿아 새까맣게 그을렸다가, 순식간에 불이 붙어 재로 화해 버렸다.
[…….]
RP던전 페널티 위기 창도 당연히 사라져 버렸다.
당연했다.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이 바깥에 알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졌으니까.
그는 검을 집어넣으면서 생각했다.
신재헌이라는 이름에 걸고 약속했어도, 얼마든지 약속을 어길 수 있다고.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결심했다.
진실하게 살다가 죽을 바에야, 거짓말쟁이 생존자가 되겠다고.
너는 어떻게든 살아 있는 나를 좋아할 테니까.
그렇지?
―달칵.
신재헌은 서재 문을 열면서 생각했다.
신유리는 변한 내 모습을 싫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았다.
네 옆에 있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습이든 할 수 있어.
그러니 네가 좋아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내게 보여줘.
들리지 않을 속삭임이 서재 안에 울렸다.
―쿵.
그리고 문이 닫혔다.
***
신재헌, 27세. 남. 헌터 10년 차.
이놈은 던전 클리어만 하면 한없이 늘어지는 습성이 있었다.
던전 클리어 판정이 뜨면 던전 내의 존재들이 헌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크게 문제는 없었다.
뭘 하다 나왔느냐 물으면 허무맹랑한 핑계를 대는 게 수상할 뿐이지.
하지만 이번엔 문제가 좀 달랐다.
아직 이 ‘저택의 손님(SS)’ 던전의 클리어 판정은 뜨지 않았다.
아무래도 파티원이 모두 저택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 같은데…….
“역작을 그리고 있나 본데요?”
난 결국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뱉어 버렸다.
이놈이 일생일대의 역작을 그리느라 늦는 건가?
사실 메이든 부인이 초대한다는 화가가 신재헌 놈이었나?
하지만 소예리 헌터는 고개를 저었다.
“곧 나올 거예요. 신중해서 그래, 사람이.”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가 아! 하더니 나한테 쪼르르 달려왔다.
난 아직도 그 모습이 꿈 같았다.
진짜 살아 있는 거지?
내가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소예리 헌터가 내게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유리 헌터님 거 맞죠?”
“어?”
그녀가 내민 건 다름 아닌 ‘체육선생님의 목검(SS)’이었다.
“이거 어디서 들고 나왔어요?”
이거 리펜이 안 준다고 했는데?
잔다더니 그 사이에 마음이 변해서 들고 가라고 줬나?
“그 오르골 있던 데에서 주웠어요.”
소예리 헌터가 눈을 찡긋했다.
“유리 헌터님 생각나서 가져왔지! 딜생딜사 유리 헌터님!”
그러면서 날 꼭 끌어안아 주었다. 못 살아!
이거 때문에 더 고생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고마워요!”
난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검은 없어도 되니까 소예리 헌터가 돌아온 것이 중요했다.
검이 있어 봐야 헌터팀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난 문득 깨달았다.
아.
내 인벤토리에서 검이 사라진 이유.
[체육선생님의 목검(SS)]
그건 검의 등급이 높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딜에 죽고 딜에 사는 딜뇌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헌터팀을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하니까. 무기가 있어야 하니까.
그뿐이었다.
이게 체육선생님의 목검이든 진검이든 그런 건 관심 없었다.
“아…….”
시스템창은 나도 몰랐던 내 속마음을 간파했던 모양이다.
내가 짧게 감탄하는 사이.
내 품에서 뿅 벗어난 소예리 헌터가 주이안 헌터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노트를 받은 주이안 헌터가 옅게 미소 짓는 게 보였다. 난 그들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거 전에 신재헌 헌터님이 그린 거 아니에요?”
그러자 노트를 인벤토리에 넣는 주이안 헌터의 행동이 빨라졌다.
“숨겨도 다 봤는데~”
“그림보다 우리를 아껴줘!”
우리가 앞다투어 외치자 주이안 씨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연히 두 분을 더 아끼고 있습니다.”
“진짜?”
나와 소예리 헌터는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물론 맞춘 건 하나도 없었다.
맞춘 건 단 하나, 주이안 헌터를 놀리겠다는 마음뿐.
“그럼 왜 가장 아끼는 것 뺏어갈 때 우린 안 사라졌지?”
“우리보다 그림을 더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연달아 놀리기 시작하자 주이안 헌터가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그건…….”
주이안 헌터를 놀리는 게 재밌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 사람은 놀리는 거 다 알면서 매번 당해준다는 점이 매력 포인트였다.
“제 마음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소예리 헌터와 내가 서로 손을 맞잡았다.
“들었어요? 들었어요?”
“이거 주이안 ASMR 채널에 제보하자!”
주이안 헌터가 이마를 짚는 게 보였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소예리 헌터의 모습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도 진짜였다.
진짜, 돌아온 거겠지?
“그런데 소예리 헌터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때 주이안 씨가 물었다. 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차마 내가 못 물어본 것이었다.
갑자기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지하로 순식간에 사라지던 모습이 아직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져서.
난 어느새 숨까지 멈추고 소예리 헌터를 보고 있었다.
“…….”
진짜 소예리 헌터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
사망 판정 시스템창이 안 떴다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어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던전 내의 변수에 따라 사망 판정이 안 뜨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니까.
설마 눈앞에 있는 게 소예리 헌터의 사념, 뭐 이딴 건 아니겠지?
갑자기 소예리 헌터가 아련한 표정 지으면서 ‘이제는 같이 나갈 수 없어요…….’ 하는 고전적인 전개 나오는 거 아니지?
“…….”
그때 소예리 헌터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자자잠깐만. 난 멈칫했다.
설마?
“멀쩡하죠? 살아있는 거죠?”
난 소예리 헌터의 어깨를 꽉 잡았다. 으디도 못 가!
내가 묻는 사이 주이안 씨도 거듭 파티창을 살폈다. 이 사람도 비슷한 불안을 느낀 게 분명했다.
“그게, 사실…….”
소예리 헌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사실???
그렇게 아련한 표정으로 불길하게 만들지 말아 줄래요?
내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자 소예리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뭐뭐임?
“나 진짜 살아 있어요. 놀리려고 했더니 너무 걱정해서 안 되겠어.”
깔깔 웃음을 터뜨린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나 스킬 중에 지하 탐험이라는 스킬 있었던 거 기억나요?”
지……하……탐……험?
소예리 헌터는 스킬이 워낙 많은 사람이라 주로 쓰는 스킬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쓰지 않는 스킬도 많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하 탐험이라면…… 최근에 들어본 적이 있는 스킬인데?
아, 전에 멧돼지랑 마주쳤을 때!
신재헌이랑 주이안 씨 바닥에 30분 묻을 수 있다고 했던 그 스킬 아니야?
“…….”
순간 굳었던 내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아련한 얼굴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던 것도 잠깐, 이제 배신감이 머릿속을 터뜨리려고 했다.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아련한 표정으로 사라졌어요!?”
난 그녀의 어깨를 짤짤 잡아 흔들었다.
진짜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사라졌잖아! 죽는 걸로 장난치지 마!
풀어져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소예리 헌터의 붉은 머리칼이 하늘로 퐁퐁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소예리 헌터는 장난친 대가로 아주 희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
무려 주이안 씨의 말없이 원망스러운 시선 받기.
‘걱정했잖아요’ 내지는 한숨 한 번도 없이 아련하게 쳐다보는 눈빛은 저쪽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큼큼, 그게…….”
이내 소예리 헌터가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 변명해 보시지!
“그걸 이동된 즉시 쓸 순 없었어요.”
그녀가 손을 펴 보였다.
그녀가 있었던 일을 설명해준 후, 나와 주이안 씨는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요컨대 소예리 헌터도 살아 나올 수 있을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머리를 풀고 오셨던 거구나.”
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아차 했는지 소예리 헌터는 머리를 주섬주섬 모아 묶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높이 올려 모아 놓고는 주머니를 뒤졌다가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머리끈이 주머니에 없는 모양이었다.
“묶어줘요?”
나야 자주 묶었다 풀었다 하는 사람이지만, 소예리 헌터는 늘 묶고 다니던 사람이니 풀고 다니면 불편할 게 분명했다.
내가 내 머리에서 머리끈을 빼려는 때였다.
소예리 헌터가 불쑥 물었다.
“……풀면 어때요?”
그녀가 붉은 머리칼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주이안 씨가 고민도 없이 말했다.
“예쁘십니다.”
그러자 소예리 헌터가 고민도 없이 받아쳤다.
“영혼을 좀 담아 봐요.”
주이안 헌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예쁘십니다.”
주이안 씨의 영혼은 표정에 담기는 것이로군.
깨달음을 얻은 나와 소예리 헌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예리 헌터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답을 원하는 것처럼.
머리를 푸나 묶으나 그냥…… 소예리 헌터님이지, 뭘.
예쁘다고 말하려다가 영혼 담으라는 말 할 것 같아서 취소했다.
결국 내가 답했다.
“……그냥 소예리 헌터님이죠?”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눈을 깜빡였다.
이 답을 원하는 게 아닌가?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 내가 너무 무심했나?
하지만 이거 말고 뭐라고 해야 돼? 예쁘다고 했다가 까인 사람도 있는데? 나도 얼굴에 영혼 담아야 돼?
영혼 어떻게 담는 거임? 난 늘 영혼을 담아서 말하고 있는데?
두뇌풀가동 직전에 소예리 헌터가 예쁘게 웃었다.
“그럼 앞으론 자주 풀고 다녀야지.”
그녀는 뭔가 후련한 얼굴이었다.
“?”
나와 주이안 헌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뭐가 후련한 건지 아세요?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소예리 헌터가 우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끼익.
시야에는 있지만 다소 먼 곳에 있는 저택의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으로 신재헌이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저놈을 콱!
“혹시 부인께서 차 한잔하고 나가라고 하셨나요?”
다 끝냈으면 빨리 나와야지, 뭘 느긋하게 걸어 나오고 앉아 있어?
내 말에 신재헌이 볼을 긁적였다.
“아뇨, 그건 아니고 예술혼을 좀 불태웠더니 그만.”
예술혼을 불태워야 할 정도로 부인의 기준이 까다로웠단 말인가?
믿을 뻔한 순간 신재헌이 소예리 헌터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머리끈에 스킬이 부여되어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소예리 헌터의 지하 탐험 스킬을 이야기하는 것이……었…….
잠깐.
“듣고 있었냐!”
난 존대도 까먹고 발끈했다. 그 순간 시스템창이 떴다.
[던전 ‘저택의 손님(SS)’ 클리어!]
[클리어 보상 정산 중…….]
이것만 보고 저놈을 흠씬 패 줄 것이다.
우리 넷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과연 이 X랄맞은 SS급 던전의 보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