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58)화 (158/218)

158화

[…….]

신재헌의 말에도 그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안 나와?”

[…….]

그림은 여전히 조용했다.

신재헌은 그림을 가만히 보다가, 메이든 부인이 나갔음을 다시 확인하고는 그림 가장자리로 손을 가져갔다.

―찌익.

그림 구석의 하늘이 아주 조금 찢어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곧바로 나타났다.

[잠, 잠깐!]

뒤늦게 두 사람이 그림 구석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재헌은 먼지투성이의 마법사 두 명을 보면서 놀라지도 않았다.

아까 부인이 L급 보스로 개화하기 전부터 그는 이 그림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서재를 그린 그림은 품격을 따지는 부인의 공간에 전시된 것치고는 너무 정신없었던 것이다.

일단 박살 난 책장이 책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부터, 깨져 나간 창문들까지.

처음엔 메이든 부인 내면의 폭력적인 성향, 뭐 이런 건 줄 알았다.

그래, 사람이 어둠 하나쯤 안고 있는 거지.

신재헌은 제가 그렇게 편협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넘기려고 했지만, 그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평범한 그림이 아니었다.

서재였던 그림이 복도로 변하더니 흔들리면서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 가운데에는 두 명의 마법사가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택 밖까지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하지만 저택의 정원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

마치 그림 속과 현실의 경계에 단단한 유리창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림에 크게 클로즈업되어 얼굴을 들이밀던 그들이 탈출을 포기하고 엎어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메이든 부인과 싸우던 그들이 저곳으로 이동되었구나, 하고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신재헌과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이 바깥을 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들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을 때.

그리고 신재헌이 그들의 존재를 알았을 때.

[……?]

그때쯤 마법사들은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재헌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저곳에서 이 공간이 모두 보인다면?

메이든 부인과 싸우는 세 사람의 모습도, 중간에 끼어든 소예리 헌터의 모습도, 오르골을 켜고 지켜보는 그들의 모습도 모두 보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창이 번쩍 떴다.

[RP던전 페널티 위기! : 서제국 실세 4명의 비정상적인 친분 관계]

[RP던전 페널티 위기! : 기이한 호칭으로 불린 서제국 황제(‘헌터?’)]

주이안 헌터의 외침 이후로는 ‘이상한 호칭’이라는 페널티창까지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주이안 헌터는 저들을 인식하지 못해서인지, 페널티 창을 보지 못한 듯했다.

신재헌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 뒤로 저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차였다.

다행인 건 저들이 그림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꼴을 보니 바깥에서 꺼내주기 전엔 살아 나올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좋은 기회였다.

신재헌이 위험을 감수하고 세 헌터를 먼저 보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저들이 갇힌 곳이 특수 공간이라 그런지, 아직 세 사람에게는 페널티 위기가 뜨지 않은 듯했다.

그러니 최대한 그림에서 빨리, 멀리 떨어뜨려 놔야 했다.

그리고 그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세 사람이 나갔으니, 이제 일이 잘못되더라도 페널티는 그에게만 미칠 터였다.

물론 일이 잘못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림을 바라보았다.

[우, 우리가 보이나?]

마법사들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멍청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신재헌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물론. 아까부터 너희가 아주 신경 쓰였어.”

놈들과 눈이 마주치자 흐려지다 말았다 했던 RP던전 페널티 위기 창이 선명해졌다.

역시 저놈들이 우리를 수상하게 여길수록, 이쪽의 상황을 보고 들은 것을 ‘실제’라고 생각할수록 페널티창이 진해지는 것이 분명했다.

“그 안에 있는 건 너희 둘이 다인가? 기사가 가장 오래 살 줄 알았는데, 의외네.”

신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마법사들이 발끈했다.

[그놈은……!]

[능력 없는 검사가 이런 곳에서 설쳐 봐야 방해일 뿐이지!]

그러다가 멈칫했다.

자기들 목숨 줄을 잡고 있는 서제국의 황제도 검사라는 걸 뒤늦게 떠올렸나 보다.

신재헌은 그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그가 찢어버린 하늘에 박혀 있었다.

세상이 종잇장처럼 찢긴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신재헌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가 보면 안 되고 들으면 안 될 것을 보고 들었다는 걸 알아.”

그 말에 마법사들의 얼굴이 파래졌다.

[뭐, 뭘?]

뒤늦게 잡아떼도 이미 RP던전 페널티 위기 창은 선명했다.

신재헌은 그들을 더 추궁하는 대신, 그림 구석을 조금 더 찢었다.

―찌이익.

그러자 마법사들이 기겁하며 그림 구석으로 도망갔다.

[그만!]

[찢지 마!]

다급히 말한 그들이 손을 내저었다.

[우릴 죽여 봐야 좋은 일은 없을 거다!]

[절대 비밀은 말하지 않을게!]

신재헌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림을 좀 더 찢어 보았다.

균열이 그림 속 저택에 닿자, 놀랍게도 균열이 닿은 저택 한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

신재헌은 신기하여 감탄하는 게 다였지만, 그 모습을 본 마법사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새하얗게 떠 버렸다.

[멈춰주십시오!]

[폐하!]

급하긴 급했는지 존대로 바뀌어 버렸다.

너희 폐하냐, 내가?

신재헌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잠깐, 그들이 연이어 말했다.

[저희를 살려주신다면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래 봐야 내가 아는 거겠지.”

신재헌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서제국의 정보력을 동제국이 무시한 건 오래된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건 동제국에서도 극비입니다!]

[저와 계약을 맺으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들이 마구잡이로 외치다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동제국의 마법사들은 각자도생에 익숙한 듯했다.

[저하고도 계약하시죠!]

계약을 제안한 갈색 머리 마법사 옆에 서 있던 검은 머리 마법사가 외쳤다.

[내가 먼저야!]

그러자 갈색 머리 마법사는 발끈했다.

그 뒤로 그들은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오래 살 관상들은 아니었다.

신재헌은 그들이 경쟁(?)하면서 말을 뱉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앞으로 동제국이 어떻게 움직일지 압니다!]

[뭘 말하려고!]

[계약 안 하려면 넌 빠져! 동제국의 게이트 계획에 관한 겁니다!]

갈색 머리 마법사의 말에 검은 머리가 당황했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계약 안 할 거면 빠지라고!]

갈색 머리는 매우 급해 보였다.

신재헌은 그들이 충분히 정보를 흘리길 기다렸다가, 슬쩍 떡밥을 던졌다.

“게이트 계획?”

흥미롭다는 것처럼.

그러자 화색을 띤 두 마법사가 한마디씩 뱉어내기 시작했다.

[예! 앞으로 동제국이 게이트를 어떻게 관리할지!]

[지금 동제국은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를…… 읍읍!]

[뭔 말을 하려고!]

[너도 말하려고 했잖아!]

서로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제가 더 ‘쓸모 있는’ 정보를 주려고 애쓰는 마법사들을 신재헌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슬쩍 재촉했다.

“지루한데.”

―찌익.

저택 한쪽의 벽돌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법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를 모을 생각입니다!]

[동제국은 지금 한계입니다! 게이트가 반 이상 터져나가서 이곳에도 올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희도 사실 도망쳐온 겁니다!]

[여기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쉬지도 못하고 게이트를 연달아 들어가고 있었을 겁니다!]

[여기 게이트가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왔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다가 신재헌이 물었다.

“게이트 몬스터를 모아?”

그가 흥미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마법사들은 침을 튀기며 앞다투어 정보를 늘어놓았다.

아직 신재헌이 ‘정보를 주면 살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공포에 질려 마비된 머리가 어떻게든 제 쓸모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신재헌은 그런 자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읍!]

[놔!]

몸싸움을 벌이는 그들을 신재헌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이 더 쓸모 있는 정보를 말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마법사들이 총력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게이트를요!]

“게이트의 무엇을?”

[몬스터를 모을 게이트입니다! 몬스터들의 귀소본능을 이용해 게이트로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죠!]

[그 게이트는 서제국으로 통하게 만들 겁니다!]

“오?”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정말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가 더욱 흥미를 보이자 마법사들의 말이 빨라졌다.

[이동용 게이트 연구도 마무리 수순입니다! 지금쯤 서제국에 게이트를 설치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킨나 전하는, 아니 킨나는 동제국 내부의 혼란을 수습할 수 없으니 서제국으로 화살을 돌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신빙성 없는 이야긴 아니었다.

신재헌이 턱을 매만졌다.

“그래서 그 정보를 줄 테니 살려달라?”

그 말에 마법사들의 입이 딱 다물렸다.

뒤늦게 너무 많이 입을 털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살, 살려준다는 계약을 하면 알려주지!]

반말과 존대를 자유롭게 오가는 영혼들이었다.

신재헌은 그들의 말에 간단히 답했다.

“황제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러자 마법사들은 잠시 갈등했다.

황제의 이름은 무겁다.

하지만 살려준다고 약속하진 않았잖아?

그들이 서로 눈치 볼 틈을 잠깐 준 신재헌이 그들에게 떡밥을 마저 던졌다.

“쓸 만한 정보를 주는 놈을 살려준다고, 말이야.”

그들이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내는 데에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제가! 제가 드리겠습니다!]

[접니다!]

발표 점수 준다고 할 때만 손드는 학생들 같네.

그렇게 생각한 신재헌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뭘 보고 너희의 말이 진실임을 알면 되지?”

증거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마법사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동제국 황궁 지하에 사람을 보내보십시오!]

[황궁 지하에서 마법사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하에 강력한 마력을 감추는 시설을 먼저 세웠습니다! 그 근처에 가면 마력이 빨려들어갈 정도입니다!]

잔뜩 당황해서 앞다투어 외치는데도, 두 사람의 말이 어긋나지 않는다.

그건 저 말의 신빙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뜻이었다.

“좋아, 확인해보지.”

신재헌이 답했다. 그러자 마법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들이 동시에 물었다. 신재헌은 그 답에 확인차 물었다.

“정보는 내게 다 준 건가?”

그러자 그들은 발끈했다.

[당연합니다!]

[목숨이 걸렸는데 감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신재헌은 저놈들의 머릿속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둘 다 살아 나간다면, 자신이 적국에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을 상대가 말하진 않을까 불안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명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이, 이놈보다는 저를 살려주시는 쪽이 이로우실 겁니다! 제가 동제국 마법계에서는 꽤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마법사가 충격받은 것처럼 입을 벌리는 게 보였다.

이야기를 꺼낸 마법사가 동제국 마법계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건 사실인지, 그는 반박하지도 못하고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추하기도 하지.

신재헌은 그들을 보다가 웃었다.

“들을 걸 다 들었으니 약속을 지켜야겠지.”

황제의 이름으로 한 약속 말이야.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서로를 돌아보는 것도 잠깐, 상대를 처리(?)하는 건 그림 속을 나가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황제의 이름에 걸고 너희의 생존을 약속하겠다고 했지.”

신재헌은 RP던전 페널티 위기 창이 여전히 떠 있는 걸 보면서 말했다.

그러자 마법사들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예! 입은 꾹 다물겠습니다!]

[서제국에 영광 있으라!]

참 얄팍한 충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신재헌은 추한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았다’는 안도감에 환호하다가, 그가 반응이 없다는 사실에 주춤거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 후,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나한테 그런 이름은 필요 없어.”

그러자 RP던전 페널티 위기 창이 다시 떠올랐다.

[RP던전 페널티 위기! : 서제국 황제의 자기부정?]

이런 게 떠 봐야 어차피 죽이면 끝이다.

[무, 무슨!]

당황한 마법사들을 보면서, 신재헌은 그림을 반으로 찌익 찢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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