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메이든 부인의 부채에는 깃털 장식만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촤르르륵!
그렇다고 부채에 붙어 있는 보석으로 원거리 공격을 할 줄은 몰랐지!
―쿠콰콰쾅!
보석 수십 개가 쏘아져 나가는 공격을 초근접거리에서 검으로 받아낸 신재헌은 전투 초반부터 엄청난 상태 이상에 시달렸다.
아예 신재헌의 체력바가 절반 이상으로 못 올라올 정도였다.
주이안 헌터가 아무리 힐을 쏟아부어도 중상으로 처리되었는지 체력바가 차질 않았다.
집중치료 같은 스킬로 치료하기 전에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주이안 헌터님, 장갑 주세요.’
검을 몇 번 부딪치고 나서 신재헌은 주이안 헌터에게 장갑을 받아갔다.
주이안 헌터는 멈칫했지만 그 장갑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들은 듯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에 히든 보스 에페를 잡고 얻은 장갑.
투쟁의 장갑(SS).
[특수버프 ‘투쟁의 의지(SS)’ : 골절이나 중상 상태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움직일 수 있다(사망 시까지 적용).]
그 살벌한 특수버프가 붙은 장갑을 가져간 것이다.
하지만 투쟁의 의지 버프를 가지고도 메이든 부인을 상대하는 건 어려웠다.
―쾅!
신재헌이 딛고 있던 바닥이 다시 한번 갈라지면서 부채와 말레티아의 검이 부딪혔다.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잔상(SS+) 효과가 해제됩니다.]
내가 이 알림창을 몇 번 봤는지 모르겠다.
신재헌의 체력바가 바닥을 치려는 걸 주이안 헌터가 살린 것도 몇 번인지 셀 수가 없었다.
[책임감(S)]
신재헌의 버프창에서 책임감 스킬이 사라지지 않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물론 그만 공격을 받아낸 건 아니었다.
[‘순간가속(SS)’ 스킬을 사용합니다.]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스킬을 사용합니다.]
메이든 부인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받아내려면 내 스킬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아끼는 것 앞에서 99% 데미지 감소]
99% 데미지 감소 스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못해!”
그렇게 날카롭게 외치며 휘두르는 부채를 정면으로 막을 때마다.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잔상(SS+) 효과가 해제됩니다.]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잔상(SS+) 효과가 해제됩니다.]
……
수도 없는 잔상 해제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새빨개졌다.
[잔여 체력이 5% 이하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헌터 주이안(S)’이 ‘손상 회복(A→S)’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야전병원(L)’ 스킬 효과 : 치유 계열 스킬 랭크 한 단계 증가).]
[‘헌터 주이안(S)’이 ‘회복의 손길(SS+→L+)’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야전병원(L)’ 스킬 효과 : 치유 계열 스킬 랭크 한 단계 증가).]
주이안 씨의 야전병원 스킬이 워낙 사기인 덕에 ‘손상 회복’과 ‘회복의 손길’ 두 개면 금방 되살아났다.
그럼 다시 몇 번이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문제라면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메이든 부인은 기계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지칠 줄을 몰랐다.
―쿠콰쾅!
그녀는 우리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도 멀쩡하기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서재는 물론 온 저택을 날려버렸어야 할 신재헌의 풀버프 공격을 맞고도 체력이 2% 깎인 게 다였다.
[메이든 부인(L) 94%]
체력 6% 깎았으니까 앞으로 이렇게 17번만 하면 죽일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희망찬 행복회로를 돌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만신창이였다.
애초에 지금까지 던전 공략을 다니면서, L급 보스와 스친 적은 있지만 랭크만 L급이지 분명 그 이상인 보스와 맞붙은 건 처음이었다.
이거 이러다가 싹 죽겠는데?
……이런 현실적인 걱정을 하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능력치 차이.
스킬 시너지 효과나 아이템으로도 쉽게 앞설 수 없는 능력치 차이 때문이었다.
“흥!”
메이든 부인이 다시 부채를 휘둘렀다.
하지만 신재헌은 고민 없이 검을 들어 막았다.
―파앙!
메이든 부인의 ‘어딜 버릇없이(L)’ 스킬 때문에 다시 신재헌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리고 한 번에 큰 데미지를 받았다는 뜻으로 파티창에 신재헌의 이름이 번쩍거렸다.
[육참골단(SS)]
신재헌은 공격할 때마다 육참골단 스킬을 쓰고 있었다.
잔여 체력의 50%를 소모하는 스킬이었지만 고민 없이 쓰는 이유는 한 가지뿐일 것이다.
안 그러면 데미지가 안 들어가니까.
하지만 그 스킬을 쓰는 데에도 그는 고민 하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힐하는 주이안 씨나 본의 아니게 탱킹을 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10년간의 헌터 생활 중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래도 난 메이든 부인을 상대하는 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이 깨끗했다.
[메이든 부인(L) 93%]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능력치 차이가 까마득하네요.”
주이안 헌터가 이내 말을 뱉었다.
절망적인 말은 잘 하지 않는 그였지만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었다.
“그러게요.”
신재헌이 스킬 하나를 막는 사이 내가 말을 받았다.
난 다시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스킬 사용을 준비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메이든 부인의 스킬 패턴이 단순하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곧 메이든 부인이 노성을 지르며 부채를 휘두를 거란 사실을 알았다.
그 공격은 데미지 감소 스킬이 없는 신재헌이 받아내기에는 버거웠다.
내가 막아야 한다.
―쾅!
“이것들이!”
아니나 다를까, 노성을 지른 메이든 부인이 신재헌과 거리를 벌렸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 B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순간가속(SS) 통증 경감(A→S) 부목(S→SS) 회복의 발걸음(S→SS) 순간집중(SS) 잔상(SS+) 잔상(SS+) 잔상(SS+)……]
버프를 둘둘 감은 난 메이든 부인 앞으로 뛰어들면서 이를 악물었다.
곧 까마득한 충격이 눈앞을 뒤덮을 것을 알기 때문에.
―투콰쾅!
부인의 부채와 내 검이 부딪히자 수도 없이 겹쳤던 잔상이 풀리면서 눈앞이 새까매졌다.
마력과 체력이 동시에 바닥을 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보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메이든 부인(L) 89%]
신재헌은 그 와중에 메이든 부인의 뒤를 쳐서 체력을 훅 깎아 버렸다.
와, 이 짓 9번만 하면 잡을 수 있다! 희망차다!
내가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힐을 받아도 눈앞이 깜깜하다고 생각한 순간.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시너지(A) 비행(A)]
갑자기 파티창에서 소예리 헌터의 이름이 번쩍거렸다.
없어졌던 버프창과 디버프창이 생긴 건 물론이었다.
“어?”
우리가 비명인지 감탄인지 환호인지 모를 것을 내지를 때였다.
“헌터님, 앞!”
주이안 헌터의 외침이 울렸다.
나와 신재헌이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쩡!
신재헌의 검과 내 검이 십자로 교차하며 부채를 막아냈다.
부채가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건지 날카로운 금속음이 귀를 찢을 듯이 울렸다.
“!”
그 순간 신재헌은 대범하게도 말레티아의 검을 놓았다.
그리고 빠르게 아래로 처박히는 말레티아의 검을 역수로 잡고 휘둘렀다.
―파앙!
예상치 못한 공격이 풀버프로 박혀 오자 메이든 부인의 몸이 서재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메이든 부인(L) 86%]
체력이 생각보다 희망차게 깎였다. 무엇보다 소예리 헌터가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히 보였다.
진짜 살아있을 줄 알았다니까?
시스템창이 사망 알림 안 줄 때부터 믿고 있었다니까?
미소가 절로 비어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L급 보스 앞에 두고 실성한 거 아니냐고 묻거든 그냥 실성했다고 할 거다.
기쁜 소식 덕인지 신재헌의 검에도 힘이 붙었다.
[메이든 부인(L) 83%]
승기를 잡은 신재헌의 검이 연달아 메이든 부인을 공격했다.
난 부인의 공격에 대비해 스킬을 준비해두면서 언젠가를 생각했다.
‘우리 넷이 각자 무인도에 떨어지면 누가 오래 살 것 같아요?’
언젠가 소예리 헌터가 들고 왔던 이야기 주제였다.
아무리 무인도여도 S급은 S급이니 사는 거야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예리 헌터는 무인도에서 오래 못 살 것이다’라는 내 생각엔 넷 모두 동의했다.
왜냐고?
‘소예리 헌터님은 무슨 방법을 써서든 무인도 탈출할 것 같아요.’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이 가능한 보조계 헌터니 당연한 일 아닌가?
소예리 헌터가 깔깔 웃는 동안 우리는 앞다투어 그녀에게 매달렸었다.
탈출하면 나 먼저 구해줘! 나도나도나도!
그렇게 끝난 우스갯소린 줄 알았더니, 정말 그때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시스템도 몰랐을 것이다.
SS급 특수던전 지하에 묻어서 즉사 판정을 줬는데도 살아 나오는 헌터가 있을 거라고는.
어떻게 한 건지는 나중 문제였다.
우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기서 튈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주이안 헌터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일단 소예리 헌터가 무사한 이상 메이든 부인과 정면대결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그녀와 합류해서 다른 방법을 꾀하거나, 적어도 이 서재에서 벗어나 유리한 환경에서 전투를 유도할 수 있었다.
“어딜!”
―쾅!
물론 부채질 한 번에 건물을 뒤흔드는 무지막지한 부채의 주인이 우리를 놔주느냐가 문제였지만.
그래도 동제국 놈들이 싸우다가 어디로 사라진 것처럼, 우리도 어디론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시너지(A) 비행(A)]
소예리 헌터의 비행 스킬이 사라지질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그녀가 가까이 왔다는 의미로 다시 한번 파티창에서 이름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서서서설마?
“이쪽으로 오는―”
공격을 막아내던 신재헌도, 힐 스킬을 연달아 올리던 주이안 헌터도, 나도 설마, 설마 한 순간이었다.
―달칵.
“메이든 부인?”
싸움으로 무너지지만 않았을 뿐 개판이 된 방 안에, 소예리 헌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어느새 우리가 들어왔던 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마치 눈앞의 싸움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평안한 표정으로 뭔가를 든 채.
“손님이 너무 늦었군요!”
흥분한 메이든 부인이 그런 그녀에게 부채를 휘둘렀다.
“!”
나와 신재헌이 그녀의 앞으로 뛰어들려는 때였다.
“음?”
메이든 부인이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은 소예리 헌터의 손에 들린 물건에 박혀 있었다.
[넬라 드 칼센
내 사랑스러운 딸에게]
그렇게 쓰여 있는 물건이었다.
메이든 부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