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그때는 몰랐지만 당시는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생겼을 때였다.
그게 게이트인지도 몰랐을 때.
서울을 제외한 다른 곳의 소식은 늦어 그때는 그저 은령고의 문제라고만 생각되었을 때.
당시의 그녀는 후회했다.
해맑던 두 아이의 모습이 자꾸 기억나서.
제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웃는 모습이 생각나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 해주고,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건넨 호의가 싸늘한 냉대로 돌아와 서운했을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
두 사람은 오후부터 같이 등교한다고 했다.
만일 내가 여기서 점심시간까지만이라도 붙잡았으면 두 사람이 저기에 휩쓸릴 일은 없었을까?
아픈 김에 학교 가지 말고 집에 돌아가라고 했으면, 신유리 헌터는 가족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날 좋게 대해준 애들한테 나는 뭘 한 거지?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아니, 늦지 않았다.
“하실 말씀 있으신 거죠?”
신재헌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어보는 게 보였다.
신유리가 좀 기다리라는 듯 그의 머리를 팍팍 누르는 것도 보였다.
수십, 수백 번을 꿈에서 보았기에 알았다.
원래 자신이 차갑게 말한 후에 두 사람은 병실에서 멋쩍은 얼굴로 나가 버린다. 그럼 그대로 끝이었다.
그런데 이건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아.”
말할 기회가 있는 상황. 두 사람은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살짝 입 밖으로 낸 음성은 생동감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과거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게 다라면, 지금은 아예 이 상황에 속한 것처럼.
그래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애써 열었다.
그래야 했다.
“고마워요.”
그녀가 작게 말했다. 신유리와 신재헌이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꿈속에서 수십 수백 번을 말하길 원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꿈속에서조차 하지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새삼 창문을 돌아보았다. 아예 밀어 버린 머리는 모자도 쓰기 귀찮아서 던져 버렸다.
앙상하고 보기 싫은 모습이라고 생각해서 거울도 보지 않았다.
남에게 이름도 보이기 싫어서, 커튼도 꼭 침대 아래에 붙어 있는 이름표가 가려질 만큼만 걷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병실 앞에 붙어 있는 ‘이진아’라는 이름표에 줄을 직직 그어놓기까지 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도록.
지금의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패시브 스킬 ‘화려한 변신(L)’이 개화됩니다.]
얼마나 그 모습이 싫었으면 각성하자마자 그런 패시브 스킬이 생겼을까.
그때는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미안했다. 두 사람이 병실을 나가고서야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병원에서 받았던 호의를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
가장 힘들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한 호의를 내밀어준 신유리에게 그 귀한 마음을 돌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마음은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10년이 지나도록 말하지 못했다.
내 인벤토리에 아직도 구멍 난 양산이 있다고.
그때 신유리 헌터님이 도와줬던 그 성질 더러운 사람이 나라고.
“뭘요.”
신유리가 머리를 긁적이는 게 보였다.
멋쩍은 듯한 미소는 근래에 본 것과 닮아 있었다.
기억에는 없는 미소였다.
하지만 분명 신유리에게 그때 고맙다고 말했다면 저렇게 인사했을 것이다.
이 말이 뭐가 그리 무거워서 입 밖으로 내지 못했을까.
“조심해요.”
소예리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병실을 나가려던 두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소예리는 미래를 알았기에 마음이 아팠다.
이제 저들이 돌아갈 은령고에는 게이트가 터질 것이고, 그 지옥에서 두 사람은 헌터로 각성할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올 즈음에는 은령아파트가 게이트화되면서 그들의 가족이 행방불명될 것이다.
학교에 가지 마.
아니면, 집에 전화해서 가족이라도 나오라고 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것까지는 이 공간에서 허락되지 않는 듯했다.
소예리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눈가가 젖었다.
미안함과, 안쓰러움과, 고마운 마음이 결정이 되어 흘러내렸다.
“앞으로 힘들겠지만, 힘내요.”
그녀가 쥐어짜듯 말했다.
[‘헤어나올 수 없는 과거(L)’가―]
[―니다.]
시스템창이 오류가 걸린 것처럼 뒤틀렸다.
그 너머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그들은 웃으며 인사해 왔다.
“네, 꼭 쾌차하세요!”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이번에는 날카로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디버프 ‘헤어나올 수 없는 과거(L)’가 ‘반복(L)’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디버프 ‘헤어나올 수 없는 과거(L)’가 해제됩니다.]
선명한 시스템창과 함께, 소예리의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
쿵.
마음속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소예리가 눈을 떴다.
[과거의 오르골(L)]
손에 들린 물건의 이름이 보였다. 방금까지 그녀에게 과거를 보여주었던 아이템이었다.
정확히는 과거에 그녀를 묶어두려던 아이템이었다.
“…….”
소예리는 원래 높이 올려 묶고 다니던 붉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거울이 있다면 반짝이는 금안도 보일 것이다.
각성하면서 머리 색이 바뀌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에는, 이 머리카락이 염색이라고 거짓말하고 다녔다.
헌터팀 사람들은 아직도 내 머리가 염색인 줄 알까?
“…….”
거짓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유리 헌터와 신재헌 헌터에게만큼은, 제가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일 수가 없었다.
보이기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언젠가는 말해야지 싶으면서도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때 그 양산, 정말 고마웠다고.
그리고 붙잡아 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소중한 기억(A)]
소예리는 오르골을 내려놓고 구멍 난 양산을 집어 들었다. 양산의 이름은 익숙했다.
병원이 게이트로 바뀐 날.
S급 보조계로 각성했던 날.
누구도 아팠던, 부끄러웠던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은 ‘화려한 변신(L)’이라는 비공개 패시브 스킬로 개화했다.
아픈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제가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면서 과거가 없는 것처럼 새로운 모습,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려던 그녀는 병원에서 보상 대신 다른 것을 들고 나왔다.
차마 두 번은 외면할 수 없어서.
[소중한 기억(A) - ‘헌터 소예리(S)’ 애장품 보너스 : 소지 시 획득하는 스킬의 랭크 1단계 증가]
그게 이 양산이었다.
소예리는 아주 가끔 꺼내보는 소중한 양산의 손잡이를 살펴보았다.
테이프로 단단히 붙어 있는 이름이 보였다.
[은령고등학교 1학년 1반 신유리]
양산을 챙긴 소예리가 그 옆에 있는 누군가의 도금 목걸이를 발견했다.
신유리의 목에 걸려 있던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소예리는 비밀을 알았다.
저건 신재헌 헌터의 애장품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웬 목검이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학교 RP던전 들어갔을 때 체육선생님이 갖고 있던 거다.
“이건 유리 헌터님 거고…….”
검 옆에는 노트가 곱게 놓여 있었다.
“이건 주이안 헌터님 거잖아?”
이 노트를 빼앗겼을 줄이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일 터다.
RP던전에서 나가면 얼른 이 그림부터 액자에 걸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
그렇게 뿌듯한 마음을 가졌을 때였다.
[‘헌터 신재헌(S)’의 체력이 20% 이하로 제한됩니다(치명상 페널티).]
파티창이 번쩍거렸다.
“!”
놀란 소예리가 파티창을 살폈다.
마치 멈춘 시간이 순식간에 흐르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파티창의 상태가 현재의 상황을 비추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이안님) - S급(힐러)
- 버프 : 시너지(A) 만독불침(SS) 안정(S) 보호의 손길(A) 통증 경감(A) 부목(S) 회복의 발걸음(S) 안전지대(S) 야전병원(L)
- 디버프 : 어딜 버릇없이(L) 독설(L)]
“……!”
유독 눈에 띄는 스킬이 있었다.
“야전병원?”
주이안 헌터의 L급 스킬로 근방에 있는 모든 파티원에게 최고 효율의 힐 스킬을 퍼부어줄 수 있다.
문제는 쓸 때마다 본인 스탯이 작살난다는 거지.
급할 때만 아주 잠깐 쓰는 스킬을 주이안 헌터는 원 없이 쓰고 있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터님) - S급(딜러)
- 상태이상 : 치명상, 중상, 다발성 골절, 출혈, 시야 혼란]
하지만 야전병원으로 효과가 좋아진 힐 스킬을 받고도 신재헌의 상태는 심각했다.
애초에 주이안 헌터가 한 번에 고칠 수 없는 치명상이 풀체력을 50% 이하로 유지시키고 있었다.
잘못 맞으면 한 방에 간다는 소리다.
“이이이게뭐야!”
소예리가 기겁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에 갇혀 있었던 거야?
신유리의 상태창도 만만치 않았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유리) - B급(딜러)
- 상태이상 : 중상, 마력부족]
셋 다 체력 게이지바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L급 디버프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건 물론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유리) - B급(딜러)
- 디버프 : 엄격한 훈계(L)]
그리고 그 디버프의 이름은 심상치 않았다.
‘엄격한 훈계’? ‘어딜 버릇없이’? ‘독설’?
어딜 보나 한 명의 이미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소예리 자신이 지하로 내려가기 전까지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는 마이너스였다.
그녀가 보스로 개화한 게 분명했다.
그것도 L급으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세 사람이 SS급 던전에서 L급이라 표기된 보스를 상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에페를 물리친 후 히든 루트로 접어들었으니 사실상 등급은 L급보다 한 단계 위.
그럼 대체 메이든 부인의 등급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아아아니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소예리가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넣고 뛰어나가려고 할 때였다.
「이런 품위 없는 것들을 집 안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메이든 부인의 노성이 소예리의 귀에까지 꽂혔다.
“품……위?”
아니, 본인도 만만치 않게 뛰어노셨을 것 같은데!
소예리는 발에 채던 장난감 칼을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물론 뛰어논다고 품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메이든 부인이 주장하기로는 그랬다.
뛰어놀면 품위 없는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부인의 옛날 물건들은 아무리 봐도 활동적인 아이가 뛰어노는 데에 썼을 법한 장난감들이었다.
옛날에 이러셨잖아요! 하고 보여주면 좀 나으려나?
그녀가 고민하면서 장난감 칼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넬라, 넘어져!
어른의 걱정 어린 목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녀의 다른 손에 들린 ‘과거의 오르골’이 들려주는 과거의 목소리였다.
“……!”
소예리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자들과 내 아들이 어울리게 할 수는 없어!」
「그 애는 품위 있게 커야 한다고!」
메이든 부인의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 왔다. 저택 전체를 뒤흔드는 듯했다.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가 5 내려갑니다.]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 : -99(최악)]
이런 식으로 내려가서 L급이 소환된 거였어?
호감도를 본 순간 소예리는 답을 찾았다.
L급 이상의 보스에게 시달리는 헌터팀과 자신이 무사히 이 던전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그녀가 오르골과 장난감 칼을 손에 꼭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