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누구 오는 것 같지 않아요?”
소예리 헌터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우리 셋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시너지(A) 메이든 부인의 흡족함(A) 귀는 어디에나 있다(B)]
스킬을 쓴 직후 소예리 헌터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발소리 죽인다고 죽이고 있는데, 기사들은 아닌 것 같아요.”
소예리 헌터의 말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저택에서…… 우리 방에 몰래 들어오는 마법사들?
하녀나 사용인들이면 몰래 들어올 이유가 없다.
그럼 결론은 하나였다.
―탁.
신재헌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말레티아의 검을 손에 쥐었다.
소리 없이 움직인 그가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문틈으로 보이는 건 아니나 다를까, 동제국의 마법사들이었다.
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는 생각을 안 하는지, 발소리만 열심히 죽인 그들은 베란다로 향하고 있었다.
시선 끝에는 하나만 있었다.
……신재헌이 그린 그림?
저들이 신재헌의 숨은 팬은 아닐 테니 정답은 하나였다.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나 본데? 우리 거 훔쳐서 주게?
아니, 동제국 놈들은 자존심도 없냐?
잠시 황당했지만 난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목숨줄 앞에 자존심이 어딨겠느냐마는…… 고놈들 참…….
“…….”
“…….”
우리 사이에 빠르게 시선이 오갔다.
저놈들 털어버리는 거야 쉬운 일이지만, 아무리 우리 넷이 이 던전에서 한 묶음(?) 처리가 됐다고 해도 이렇게 친근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는 걸 들켜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럼 이 ‘저택의 손님’ 던전의 경고를 걱정할 게 아니라, RP던전의 페널티를 걱정해야 할 테니까.
같은 생각을 했는지 신재헌이 손을 들어 보였다.
자기가 나가보겠다는 뜻이었다.
“…….”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난입하면 된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재헌은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
검을 든 채였다.
“거기, 뭐 하는 거지?”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살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자 동제국 놈들이 화들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서, 서제국 황제?”
“네놈이 어떻게 여길!”
마법사들이 놀라 외쳤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우리 방이야, 얘들아…….
“우리에게 제공된 방인데, 내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가?”
신재헌의 말에 마법사들은 잠깐 멈칫했다가 외쳤다.
“애초에 이 게이트에 네놈이 있는 게 이상한 것이다!”
“교황과 마탑주는 어떻게 들어온 거냐!?”
“역시 간악한 서제국 놈들이라 합심해서 우리 발탄을 속인 것이로군!”
남의 그림 훔치러 온 주제에 뭐라는 거냐?
쟤들 경고받고 싶나? 저렇게 말해대는데 경고 안 받아?
설마 저쪽은 메이든 부인 손님이라 호감도가 높아서 봐주는 건가?
내가 눈썹을 치켜올리는 가운데, 신재헌이 열 받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네놈들도 곧 지하에 묻히게 될 것이다!”
동제국 놈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
신재헌은 그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서제국 놈들은……!”
그가 듣고만 있으니 기고만장해진 마법사들의 입이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소예리 헌터와 나, 주이안 헌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신재헌…… 열 받고 있는데……?
말려야 하나? 근데 여기서 나가면 페널티 아닌가?
하지만 같은 방에 있었던 거야 어떻게든 핑계를 댈 수 있다지만 저놈이 날뛰기 시작하면 경고를 다발로 먹지 않을까요?
신재헌은 조용했지만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 끓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끝마다 놈, 놈…….”
안 돼, 욕 박지 마! 참아야 한다! 경고와 페널티가 패키지로 네 입에 달려있어!
내가 긴장감에 주먹을 꽉 쥐는 순간이었다.
“존칭과 예의는 지하에 내려간 자가 들고 있었나?”
요컨대 3층에서 막돼먹은 짓 하다가 죽은 놈이 너희 중에 가장 예절이 바른 놈이었느냐는 뜻이었다.
한 문장으로 죽은 놈까지 끌고 와서 패는 실력이 일품이었다.
우리의 불안한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열, 열렸다! 재앙의 주둥아리!
[…….]
다행히 경고는 없었다.
“뭐, 뭐라고?”
“당장 방에서 나가면 즉결처분하지는 않지.”
신재헌이 정말 많이 참고 있었다.
잘한다, 신재헌!
“우리는 동제국인이다! 너희 하등한 서제국의 법에 따를 것 같으냐!”
그러면서 동제국 마법사가 다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난 슬슬 신재헌의 생각이 읽히는 듯했다.
경고나 페널티 받기 전에 증인(?)을 없애 버리면 되는 게 아닐까?
그냥 일격에 목을 날려 버리면 되는 게 아닐까요?
아아아니야!
“서제국 법을 우리가 따를 이유는 없지! 멍청한 것!”
마법사는 약 오르는 목소리로 헛소리는 줄기차게 쏟아놓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신재헌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가 이 방에 들어온 것도 여기가 게이트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웬일로 그는 오랫동안 참고 있었다.
웬일이지? 금방 욕이나 검 둘 중 하나는 날릴 줄 알았는데?
아니지.
잘 생각해 보면 주이안 씨가 좀 온화하게 돌려 깐다면, 얘는 수위를 넘나들며 때린 듯 안 때린 듯 사람 멘탈을 터는 언어의 마술사였다.
“다르게 말하면,”
그런 신재헌의 목소리가 느긋하게 방 안을 울렸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동제국도, 서제국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지.”
나긋한 목소리에 명백한 살기가 깃들었다.
아마 그는 지금쯤 검을 그들의 목에 들이댔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만들어줄까?”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냐는 말이 고급스럽게 튀어나왔다.
“으, 으아아!”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이 줄행랑을 쳤다. 아까처럼 인기척을 숨기지도 않았다.
“물건 훔치러 저렇게 허접하게 들어오는 꼴은 처음 보네.”
“기사는 어디 갔대?”
우리는 그제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밖에서 망을 보거나 한 것 같습니다.”
“잠입이면 몸 쓰는 일이잖아요. 왜 기사가 안 오고 마법사들이 왔대요?”
그 멍청한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헌터팀에 없었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상식인이었으므로.
―달칵.
그때 신재헌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난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용케 욕 안 하고 참았네요?”
그 말에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죽을 애들인데요, 뭐.”
불의의 사고는 어떻게든 만들어줄 셈인 듯했다.
하긴, 우리 멕인 것도 모자라 메이든 부인에게 줄 선물까지 훔쳐가려고 했던 애들한테 자비를 베풀어 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저택의 주인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재에 진입하세요.]
시스템창이 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 직전이었다.
“슬슬 출발하죠.”
비록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가 –30이지만 어떻게든 점수를 따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풀버프로 머리에 말레티아의 검부터 꽂고 시작하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결심하고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시스템창이 하나 더 떴다.
[저택의 어린 주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리펜의 방에 진입하세요.]
“엥?”
같은 시스템창을 봤는지 우리 넷의 시선이 한곳에서 마주쳤다.
둘 다 가라고?
“둘씩 갈라져서 가라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손님’ 내지는 ‘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가 아니라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니까.
둘 다 내가 오길 원한다는 뜻이다.
“둘 다 오라고 하는 거 저만 그런 거 아니죠?”
내 말에 세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좀 심각해지는데. 난 턱을 매만졌다.
“두 팀으로 갈라져서 갈 수도 없고…….”
보나마나 안 들른 쪽에선 호감도를 엄청나게 깎아댈 것이 분명했다.
그때 주이안 씨가 말했다.
“그럼 차라리 리펜의 방에 먼저 들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손을 펴 보였다.
“리펜은 호감도가 55인 상태이니, 그의 호감도를 일단 홀드하는 방향으로 공략을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건 맞는 소리였다.
메이든 부인 호감도는 이미 망했다고 치고 일단 살릴 수 있는 것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호감도가 6점만 떨어지면 리펜도 SS+급 보스로 변할 테니, 그가 보스로 변하지 않게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던전에서 최악의 상황은 두 명의 보스를 맞닥뜨리는 거니까.
“좋아요. 그럼 일단 리펜의 방으로 가는 걸로.”
소예리 헌터가 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우린 책임감 스킬을 켠 신재헌과 함께 4층 복도로 나왔다.
[리펜 드 메이든]
아깐 없던 복도로 가 보니 보란 듯이 명패가 달려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복도 끝은 문이 살짝 열려 있었는데, 안주인의 서재로 보였다.
저기에 메이든 부인이 있는 거다.
일단 그럼 리펜부터.
“…….”
시선을 마주친 우리가 리펜의 방 문을 열었다.
[‘리펜의 방 통로’에 진입했습니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난 건 웬 좁은 통로였다.
우리 넷이 두 줄로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너비에 높이까지.
아이를 위한 통로이기 때문인지 키가 큰 신재헌과 주이안 씨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기세였다.
그만큼 나와 소예리 헌터에게도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 좁은데.”
[디버프 ‘감시(L)’ 효과가 해제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창은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그렇다고 ‘저택의 강력한 규율(L)’ 디버프가 사라진 건 아니었기 때문에, 말조심을 해야 하는 건 여전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복도 저 안쪽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너희들은 누구야? 엄마가 보냈어?」
[디버프 ‘날카로운 의심(L)’ 효과를 받습니다.]
[날카로운 의심(L) : ‘리펜의 방 통로’에서, 통로의 주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
어딘가 불길한 디버프였다.
“놀러 왔어.”
그때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잠깐 조용해졌다가 말을 이었다.
「정말 내 친구들이야?」
보면 모르겠니? 라고 말하기에는 여기엔 CCTV가 없었다.
“응.”
소예리 헌터가 답하자, 통로가 컨베이어벨트처럼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앞으로 가고 싶지 않아도 앞으로 가도록.
들여보내 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
아이의 천진난만한 소리가 들렸다.
「그럼 진짜 친구인지 시험해볼게.」
……굉장히, 불길하게 들리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