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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44)화 (144/218)

144화

던전 등급이 높아질수록 특수 던전이든 RP던전이든 괴상한 조건이 많아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또 새로운 패턴이었다.

“피아노…….”

아이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조금 전까지 즐거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이 피아노로 향했다.

그리고 뚜껑을 여는 아이의 손은 피아노에 비해 너무나도 작았다.

이대로면 리펜이 괴로워하는 것은 물론 호감도도 팍팍 깎일 것이다.

진짜 뒷모습에서 연습하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났다.

피아노를 즐겁게 치게 하는 방법은 없는 건가?

SS급 던전이라고 별 걸 다 요구하네, 진짜!

난 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나도 한때 공부에 시달리던 사람이라 알고 있었다.

싫은 건 진짜 싫은 거다!

생강 싫은데 사탕으로 만든다고 해서 먹는 거 아니고, 게임으로 알아보는 수학 이딴 것도 결국 재미없는 거랑 똑같은 이치다!

어떻게 싫어하는 걸 재밌게 만들어!?

우리의 얼굴에 오만 가지 번뇌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다들 한 번쯤은 떠올렸을 것이다.

메이든 부인이 보스로 변하는 게 쉬울까, 리펜이 보스로 변하는 게 쉬울까?

아무튼 둘 다 보스가 되면 망하는 거다. 어떻게든 하나만 보스가 되게 해야 해!

두뇌 풀가동!

……을 해도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기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신재헌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뭔가 방법이 있단 말인가?

나와 비슷한 상태였던 게 분명한 소예리 헌터와 주이안 헌터의 시선까지 그에게로 돌아갔다.

우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리펜의 시선까지 받은 신재헌이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때려치우자.”

“?”

돌으셨습니까?

목구멍에 병목현상이 생겨서 욕지거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려는 때였다.

신재헌이 리펜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놀자!”

그리고 메이든 부인은 상상도 못 할 불량한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피아노 연습해도 혼낼 것 같은데 그냥 놀고 혼나자!”

혹시 메이든 부인이 보스화가 되는 게 더 상대하기 쉽다고 결론내린 거?

나와 주이안 헌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주이안 헌터도 놀란 얼굴이었다.

그의 시스템창에 버프 스킬이 올라오기 시작할 때였다.

“으음.”

소예리 헌터가 진정하라는 듯이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렇죠! 연장자로서 말려 보세요!

“하긴, 하기 싫은 거 하면 원래 효율도 안 나와요.”

말리는 게 아니라 불붙이려고 한 거였냐!

난 흔치 않게 모범생 주이안 헌터와 같은 처지가 되어 머리를 싸맸다.

“엄마가 피아노 안 치면 화내는데…….”

그때 어른들의 유혹에 흔들리던 리펜이 중얼거렸다.

잠깐, 피아노 안 치면 화내?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새까만 공간에는 우리뿐이다.

그리고 분명 아까 리펜이 그랬다.

여긴 어른은 못 온다고.

우리가 갑자기 어른이 아니게 된 건 둘째 치고, 리펜이 말하는 어른은 십중팔구 메이든 부인이나 그녀의 말을 따르는 사용인들이 분명했다.

그럼 피아노 소리만 울리면 된다는 거네?

난 표정을 폈다. 그리고 재빨리 ‘불량 친구들’ 대열에 합류했다.

“그래, 놀자! 괜찮아!”

그러자 혼자 남은 모범생 라인 주이안 헌터가 이마를 짚었다.

그의 시선이 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 어디가 가장 피해가 적을지 살펴보는 것이 분명했다.

자자잠깐! 다 방법이 있다고!

“피아노는 우리가 치면 될 것 같거든요?”

그 말에 신재헌이 나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생각이라는 듯했다.

그러자 리펜이 멈칫했다.

“누가 치는데?”

자연스레 시선이 신재헌에게 몰렸다.

그리고 관상을 보는 자질이 뛰어나다고 자신하는 게 분명한 리펜이 곧바로 말했다.

“못 치면 엄마가 화내.”

신재헌의 이마에 순간 내 천(川) 자가 생겼다.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때 리펜이 불쑥 주이안 헌터를 가리켰다.

“이 형이 잘할 것 같아.”

“……제가요?”

주이안 헌터님은 조심스럽게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제게 반말하는 아이에게도 존댓말을 잊지 않는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이었다.

“응.”

리펜은 아주 자신 있게 말했다.

“제일 재미없어 보여.”

주이안 헌터님이 멈칫했다.

한두 마디로 주이안 씨를 빡치게 하는 인재는 흔치 않은데?

“……일단 제가 해 보죠.”

화(?)를 다스린 주이안 헌터님이 피아노를 향해 다가갔다.

“주이안 씨도 피아노 칠 수 있었어요?”

내가 작게 묻자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는데?”

피아노 앞에 앉으니 명화 한 장이 뚝딱이었다.

주이안 헌터가 고개를 기울이자 연갈색의 머리칼이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면서 은은한 방의 조명을 받아 단안경의 금빛 줄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건반 위로 올려진 섬세한 손은 그림 같다고 평하기 충분했다.

문제는 명화에는 스피커가 안 달렸다는 것이다!

주이안 헌터님이 피아노를 잘 치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그때 소예리 헌터님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잘 쳐요.”

그 말에 우리 둘의 시선이 소예리 헌터에게로 돌아갔다. 소예리 헌터가 눈을 찡긋했다.

“같이 봉사활동 갔을 때 봤거든.”

봉사활동?

나와 신재헌의 시선이 마주쳤다.

사실상 목숨 걸고 게이트를 처리하는 게 봉사나 다름없는 고랭크 헌터들에게 또 다른 봉사활동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봉사활동을 굳이 찾아서 하는 헌터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주이안 씨였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게이트 사태로 생겨난 고아원들을 후원하거나,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당연히 S급인 그의 파급력은 대단해서, 그와 함께 방송을 탔던 고아원은 순식간에 기부금으로 돈방석에 올라앉기도 했다.

[‘진정한 힐러’ 주이안, 섬마을 ‘M’ 고아원에 깜짝 등장]

[주이안, 각성 이후 후원 끊은 적 없어…… S급 헌터의 또 다른 사회 환원]

뉴스기사도 수도 없이 떴다.

헌터넷에는 괜히 주이안 헌터를 욕하는 놈들도 있었다.

[제목 : 주E안말인데

글쓴이 : 비암

너무 가식적이지 않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급 힐러 + 고아원 출신(동정심유발) + 힘든 사람들한테 계속 후원함 + 익명임 = ???

이미지메이킹 개오짐 인터뷰 나와서 어색하게 구는 것도 다 연기인듯; 솔직히 주이an정도 되면 돈 쓸어담을텐데 후원좀 한다고 통장잔고에 스크래치라도 나겠음?]

└[헌협공시생 : 그 돈 있어도 후원 안하는 놈들이 더 많음]

└[비암 : 그렇겠지 근데 익명이라면서 은근히 정보 흘려서 사람들 다 알게 하는거 봐라 ㅋㅋㅋㅋㅋㅋ 다옴 뉴스댓글 보면 다 백의의 천사 ㅇㅈㄹ 찬양하는것밖에없음]

└[헌협고시생 : 최대한 감추고 싶었는데 하도 사람들 들러붙어서 어쩔수없이 들킨거겠지 ㅇㅇ 세상을 왜 그렇게 삐뚤어지게 보냐]

└[비암 : 주2안팬클럽에서나옴? 변호사났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니가그래봐야 주E안이 니네집에 후원안해줘요ㅠ 지금처럼 3대옹기종기단칸방에서살다가 지하에 게이트터져서뒤질듯ㅠㅠ]

S급 헌터를 괜히 험담하는 놈들은 한두 명이 아니라서, 그냥 헌터협회 담당자한테 사이트 주소만 넘겨줘도 알아서 처리해줄 정도였다.

하지만 주이안 헌터의 경우 헌터협회까지 찌를 필요가 없었다.

곧 어느 커뮤니티에선가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이 댓글창을 점령해버리기 때문이었다.

└[비암 : 불쌍한인생 ㅠ 주2안이 뭐해준다고 이렇게 핥아대냐 ㅠ]

└[길위에 : 주이안 헌터님이 비암님께 피해라도 주신 적 있나요?]

└[박애 : 말씀하신 것에 그리 떳떳하시면 서치 방지하지 마시고 ‘주이안 헌터님’이라고 명시하세요]

└[까망 : 그렇게 말씀하시는 비암님은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셨습니까?]

└[비암 : 어디서 좌표찍고 몰려옴? 또 ‘그 카페’임?]

그 카페. 다름 아닌 주이안 팬카페였다.

그들은 헌터협회가 헌터넷 모니터링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주이안 헌터에 대한 소식을 공유하곤 했다.

저렇게 욕하는 글이 나오면 몰려가서 헛소리하는 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는 건 기본이었다.

심지어 주이안 씨 팬이라 그런지 욕을 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사람을 밟아 주었다.

그렇게 몇 시간 털리고 나면 정의는 구현되어 욕하던 사람은 곧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논리적으로 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리고 간혹 주이안 씨 덕에 방송을 탄 고아원 원장이 뒷돈을 빼돌릴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주이안 씨는 어떻게 그걸 아는지, 그 고아원장을 자기 이름으로 고발한 다음 고아원을 자기가 사 버렸다.

물론 직접 관리할 시간은 없었으므로, 주로 은퇴한 헌터들에게 원장 자리가 주어졌다.

활동하던 시기에 논란이 없던 헌터들임은 물론이었다.

‘아이들을 다른 고아원으로 옮기시는 게 더 편할 텐데요. 왜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처리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기자의 말에 주이안 씨는 명료하게 답했다.

‘아이들을 다른 고아원으로 옮기면 필히 친한 다른 원생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거환경을 옮기는 건 아이에게 커다란 스트레스예요.’

신유리 헌터팀이 주이안 헌터를 통해 이미지 메이킹을 한다는 헛소리도 돌았지만, 우린 거기엔 대응하지 않았다.

주이안 헌터님이 좋아서 하신다는데 뭘 뭐라고 해?

아무튼 덕분에 주이안 씨가 고아원에 자주 오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나 신재헌도 가끔 가서 일을 도와주기도 했고.

그런데 피아노 치는 건 못 봤는데?

“나도 딱 한 번 봤지롱요.”

소예리 헌터가 빙그레 웃었다.

여유롭게 웃는 걸 보니 정말 괜찮은 듯했다.

우리의 시선이 주이안 헌터에게 몰렸다.

―♪

섬세한 손가락이 몇 번 어색하게 건반을 누르는 것도 잠깐, 악보를 살핀 그가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

곡은 부드럽게 선율을 이어갔다.

물론 다른 사람이 치고 있다는 티를 내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주이안 헌터는 일부러 다른 건반을 누르거나, 몇 마디를 반복해서 쳐 보기도 했다.

하지만 완성되지 않은 곡마저 완성되어 보일 정도로 그 모습은 그림 같았다.

“오…….”

왜 주이안 씨가 고아원에서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저게 방송을 탔다간 온갖 곳에서 방송 제의가 들어올 게 분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감탄할 틈을 줄 생각이 없는지, 리펜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이안 헌터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낸 거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지만, 그 목소리가 S급들에게 들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 말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이안 헌터의 손이 이상한 건반을 꾸욱 눌렀다.

당연히 불협화음이 울렸다.

주이안 헌터님은 난감한 듯 웃었다.

“아직 악보 보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안 익숙한 사람이 그렇게 칩니까?

주이안 헌터는 조심스럽게 리펜에게 물었다.

“……그만둘까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난 가끔 저게 주이안 헌터님의 패시브 스킬인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아, 아냐.”

패시브 스킬이면 L급 이상인 게 분명했다.

SS+급인 리펜에게도 바로 먹힌 걸 보면.

“좀 더 잘해줘. 이렇게 못 치면 엄마가 발로 쳤냐고 물어볼지도 몰라.”

“…….”

주이안 헌터(29, 앞발로 피아노 연주)는 좀 더 열심히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스템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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