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던전에서 밥 벌어먹고 사는 S급이 보기에 저건 아주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너희도 목표물 가까워지면 막 동기부여가 팍팍 되지 않아?
몬스터들도 목적지가 코앞인데 더 빠르게 달려들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본 거야?
아니면 그런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온 거야?
우리가 혀를 차거나 말거나, 마법진이 발동한 후 남은 몬스터들은 저택으로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17]
이제 저걸 잡아야 하는데?
“저만한 마법진이면 마력을 거의 다 끌어올려서 만들었을걸요.”
소예리 헌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직접 위에서 봤으니 저게 어느 정도 크기인지 짐작이 가는 듯했다.
나도 마법진 그려본 적은 없지만 내가 보기에도 충분히 규모가 큰 마법진이었다.
아마 지금쯤 마력이 쪽쪽 빨려서 바다에 널브러져 있지 않을까?
이제 남은 건 저 17마리를 어떻게 해치우느냐였다.
[…….]
마법사 세 명은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지 제자리에 멈춰 있었고, 곧 17마리 네발짐승과 기사의 숨 막히는 레이싱이 시작되었다.
기사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저택 근처까지 거의 다 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S급에 준하는 몬스터 17마리를 숨도 못 돌리고 해치울 수 있는 사람으론 안 보였는데.
[…….]
아니나 다를까, 몬스터들 앞을 일단 막아선 기사는 곧 회색 점으로 바뀌었다.
사망 처리였다.
그리고 그 직후 17마리의 몬스터들이 저택을 둘러쌌다.
“저런!”
눈살을 찌푸린 메이든 부인은, 가상으로라도 메이든 저택이 박살 나는 게 싫은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파앗!
그러자 그녀의 손끝에서 반짝이던 연둣빛이 동제국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헉, 헉…….”
기사는 아직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마법사들은 녹초가 되어 널브러진 채 소환되었다.
넷 다 못 본 사이에 10년은 늙은 듯했다.
“과연 변수가 크긴 하군요. 이렇게나 결과가 달라진다니.”
메이든 부인은 널브러져 있는 네 명에게 눈살을 찌푸린 채 다가갔다.
“어째서 이런 진형을 만든 거죠?”
그리고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그…… 헉…….”
마법사 세 명은 말할 힘도 없는지 헉헉거리면서 뭐라고 말해 보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메이든 부인은 남은 한 명을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기사는 쩔쩔매기 시작했다.
“그…… 음…….”
물론 계속 뜀박질만 하다가 한 방에 사망했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서제국 놈들 죽어보라고 그랬습니다.’ 같은 소리를 했다간 그대로 경고일 테니까.
“설마 이유도 없이 이렇게…….”
하지만 입 다물고 있는다고 위기를 모면할 수는 없었다.
메이든 부인이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촤악!
그리고 부채를 펴서 입가를 가리고는 말했다.
“아주 불쾌하군요.”
맞아! 우리도 불쾌해!
저놈들에게 호감도 마이너스를!
내가 소리 없이 응원할 때였다.
[메이든 부인 호감도 –10]
동제국 사람들 머리 위로 빨간 글자가 떴다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메이든 부인 : 30
리펜 드 메이든 : -30]
놈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현재 호감도였다.
메이든 부인은 그들의 호감도에서 10을 깠을 뿐,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저게 끝이야???
내가 나도 모르게 분노하려는 순간, 시스템창이 떴다.
[파티원의 품격 없는 행동에 메이든 부인이 분노합니다!]
우리 말고 쟤들 말하는 거지?
놀라서 동제국 쪽을 돌아보니 그들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파티의 누군가가 경고를 받았습니다!]
똑같은 시스템창이 네 개 뜬 순간.
“……!”
그중 한 명이 검붉은 빛에 휩싸였다.
뭐뭐뭐뭐야?
[파티원 ‘레오스 필만’의 경고가 3회 누적되었습니다.]
[‘레오스 필만’이 저택의 지하에 갇힙니다.]
“아, 안 돼!”
저들에겐 시스템창이 없는데 어떻게 전달되는지 모르겠다.
어딘가로 귀를 기울이는 걸 보니 소리로 들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는 듯이 연신 귀를 흔들어 보는 놈은 공교롭게도 우리와 연결된 장난감 말을 지도 귀퉁이에 놓던 놈이었다.
“여기 지하는……!”
그렇게 말하던 그가 검붉은 빛에 완전히 휩싸이더니, 제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침묵 후.
[파티원 ‘레오스 필만’이 사망하였습니다.]
시스템창에 우린 눈을 크게 떴다.
지하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으니 그곳에 갇히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뭐, 무……!”
동제국 사람들도 같은 것을 들었는지 놀란 기사와 마법사 한 명이 급히 외치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저도 그렇게 될까 봐 몸을 사리는 게 분명했다.
‘죽는다는 얘긴 없었잖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저놈들은 독해력과 담을 쌓고 지낸 것이 분명했다.
상식적으로 밑바닥이 단단한 지반인데 거기에 강제로 이동되면 어떻게 되겠니?
“우리 메이든은 품격 높은 토론을 지향합니다.”
그렇게 말한 메이든 부인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왠지 살벌하게 빛나는 눈이었다.
“그럼 혹시 이쪽에서는, 좋은 진형을 제안해줄 수 있을까요?”
그러더니 마법사 쪽을 보다가 말했다.
“실험해보기에는 상태가 좋지 못하지만, 한번 살펴보고 싶군요.”
메이든 부인의 그 말을 듣고서야 동제국 사람들은 여기가 고랭크 게이트라는 걸 새삼 자각한 듯했다.
그들의 얼굴이 새파래진 사이, 우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생각나는 진형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전투에 관련된 거라면 자신 있지.
“이런 진형을 기본적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난 간단히 기사가 앞에 있고 마법사들이 보조하는 역할로 장난감 말을 배치했다.
난 기사 장난감 말을 가리켰다.
“이 기사는 몬스터가 달려오는 내내 전속력으로 산을 탈 수 있을 정도로 지구력이 뛰어나니, 방벽 역할을 훌륭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굳이 기사가 몬스터를 잡을 필요는 없다.
그는 방어적인 검술만 펼치고 뒤에서 마법사들이 몬스터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마법사들의 역량에 따라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달라지겠지만요.”
그래도 방금 동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탈탈 털리진 않을걸?
내 말에 메이든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통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이군요.”
[메이든 부인이 만족하였습니다!]
[메이든 부인 호감도 +10]
좋았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리펜 드 메이든 호감도 –5]
아니, 너 왜 –5야!
설마 엄마랑 죽이 잘 맞아서?
[현재 호감도
- 메이든 부인 : -75
- 리펜 드 메이든 : 0]
암울한 호감도창이 지나가고, 시스템창이 반짝였다.
[던전 ‘저택의 손님’ : 메이든 저택의 3층으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3층으로 곧바로 이동되었다.
***
―파앗!
시야가 회복되자마자 보인 건 웬 방이었다.
동제국 놈들은 안주인네 손님으로 인식되기 때문인지 다른 방에 있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방은 아이들이 놀 만한 방이었다.
“다 장난감이네.”
놓인 가구며 물건들은 죄다 끝이 둥글둥글하고 작은 것들이었다.
아이, 딱 리펜 드 메이든의 눈높이에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는 식사도 있었다.
그 양도 당연히 아이용이었다.
“이래서 식사도 적게 준 거구나.”
아동용 식기에 담겨 나온 식사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우리를 아이 쪽, 리펜의 친구로 인식해 작은 걸로 보낸 듯했다.
근데 우리 딱 봐도 애들 아닌데 밥 좀 늘려 주지?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 S급(힐러)
- 버프 : 시너지(A) 메이든 부인의 흡족함(L) 독 감지(SS)]
우리가 식사를 하기 전에 주이안 헌터의 스킬창에 독 감지가 올라왔다.
순간 움찔했다. 또 독 먹은 건 아닌가 싶어서.
“적어도 SS급 이하의 독은 없습니다.”
근데 그냥 던전 밥이라 확인해본 것인 듯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
소예리 헌터가 외쳤다. 우리도 덩달아 식사를 들었다.
던전에선 어지간하면 식사를 안 하는 게 좋았지만, 이런 품격 따지는 집에서 식사를 거절했다간 또 무슨 경고가 올지 몰랐다.
다행히 밥은 맛있었다.
“SS급이라 그런지 맛은 끝내주네.”
신재헌도 감탄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양이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잖아! 이거 누구 코에 붙이냐!
그래도 우리가 식사를 나름 만족스럽게 마쳤을 즈음.
시스템창이 떴다.
[3층은 ‘자유로운 시간’입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빨간 시스템창이 연달아 떴다.
[하지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죠.]
별안간 책임을 설파하고 있었다.
이럴 때 눈치 빠른 헌터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대충 3층에도 함정은 있다는 뜻 같죠?”
내 말에 세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근데 소예리 헌터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경고 2회라 조심하시는 듯했다.
그때 신재헌이 불쑥 입을 열었다.
“대놓고 함정 있는 티 내는데 그냥 쉬자고 하려고 하셨죠?”
정곡을 찌른 말에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물론 저것보단 좀 더 (저택의 안주인 기준으로) 상스러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냥 여기 눌러앉아서 대기 타자! 날로 먹자! 같은…….
어휴, 이 던전은 진짜 살 떨려서 빨리 나가든가 해야겠다.
“어차피 함정이 있는데 많이 움직여 봐야 좋을 거 없잖아요?”
소예리 헌터가 손을 펼쳐 보였다.
“그게 이 저택 주인의 의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주이안 헌터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바로 모범생의 사고방식? 출제자(?)의 의도를 꿰뚫는 통찰력?
“그건 그래요.”
결국 우리는 저택 주인이 원하는 게 뭔진 몰라도 3층과 부딪쳐 볼 수밖에 없었다.
[감시(L)]
이 스킬이 있는 한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걸음을 옮기자마자 스킬이 하나 더 붙었다.
[디버프 ‘3층 감시(L)’ 효과를 받습니다.]
“오.”
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저택의 규율에, 감시에, 3층 감시가 추가로?
무려 L급 감시스킬이 3개야!
정말 자유로운 시간이에요!
3층 자유라며! 이게 자유냐!
“…….”
“…….”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여길 나가면 메이든 부인을 술안주로 자근자근 씹어주자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아무튼 돌아보죠.”
신재헌이 손짓했다.
분명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해놓고, 품격을 따지는 메이든 백작부인이 원하는 무언가를 달성하는 게 3층의 목표일 것이다.
“……?”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저택 3층을 쏘다닌 지 수십 분 만에, 기이한 상황과 맞닥뜨렸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메이든 부인의 의도와는 달라 보이는 상황이었다.
[감시(L) 디버프 효과가 사라집니다.]
[저택의 강력한 규율(L) 디버프 효과가 사라집니다.]
[3층 감시(L) 디버프 효과가 사라집니다.]
“어?”
3단 감시 디버프가 모조리 사라지는 공간을 발견한 것이었다.
우린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