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조금 전의 진형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가 봤으니 인상적이어도 심각하게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메이든 부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런데 저런 진형은 변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있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사실 너무 컸지만 그 부분은 생략해주기로 했다.
보면 알 테니까!
“변수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메이든 부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난 그녀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병사 개개인의 기량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 같아서요.”
엿이나 먹으라고 지도 모퉁이에 병사를 하나씩 세워 놓는 것도 진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난 동제국 쪽에도 예쁘게 웃어주는 걸 잊지 않았다.
“……!”
그러자 동제국 놈들의 얼굴이 일제히 새하얘졌다.
왜? 미래가 보여?
난 그런 그들에게 속으로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그래서 한 번쯤 더 실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말을 끝내자마자 동제국 사람들과 연결된 장난감 말을 들어 지도의 귀퉁이에 각각 올려놓았다.
―탁! 탁! 탁! 탁!
음, 소리 경쾌하고!
“똑같은 진형으로요.”
내 말에 지도가 연둣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메이든 부인이 동제국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연둣빛 빛무리가 감싼 손을 휙 휘둘렀다.
좋아, 쏘세요―!
“!”
동제국 놈들은 새하얘진 얼굴로 연둣빛에 휩싸였다.
당황한 게 분명한 그들이 급히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 봐야 별 방법 없을걸?
저놈들이 아무리 넷 중 셋이 마법사이기로서니, 이 미션에 성공할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지도 모서리에서 시작했으니 몬스터가 몰려오는 대로까지 날아가거나 뛰어가는 데에만 시간이 장난 아니게 소모될 것이다.
잘해봐, 파이팅!
“예리하네요.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볼까요?”
메이든 부인은 흥미로운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리펜은 마지못해 허공에 떠 있는 지도를 보고 있었다.
지도 위에는 이제 막 특수공간에 들어선 4명의 동제국 중생들이 떠 있었다.
[100]
우리랑 똑같이 몬스터 숫자도 떴다.
저쪽이 호감도 높다고 몬스터 숫자 에누리해주지 않는 메이든 부인, 제법 양심 있어요.
호감상이야!
내가 웃음을 삼킬 때였다.
지도에서 동제국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할 필요 없는 게 분명한 쓸데없이 긴 이름 네 개가 검은 점 위에 쓰여 있는 게 보였다.
[…….]
지도 위의 검은 점은 표정까지 보여주진 않았기에 그들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순 없었다.
하지만 움직임만 봐도 상황은 짐작이 갔다.
딱 특수공간에 떨어지자마자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은 제자리에서 움찔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마법사들부터 하나둘씩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괜히 동제국에서 게이트 처리반으로 데려온 건 아니었는지, 마법사들은 나름 잘 날아가기 시작했다.
날아간다는 게 지도에 표시되진 않았지만, 언덕이나 물 위도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는 걸 보면 분명했다.
반면 날지 못하는 기사 한 놈이 있었다.
난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오.”
그리고 고전하는 기사의 움직임에 순간 웃을 뻔했다.
웃으면 품위 경고다! 웃으면 안 된다!
“…….”
난 애써 심각한 얼굴로 놈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마법사 세 명은 소예리 헌터를 따라 할 생각인지, 빠르게 대로 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만났던 지도의 중앙 부근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마법사들은 심각하게 실수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너무 느린데.”
소예리 헌터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그랬다. 저들은 소예리 헌터에 비해 비행 속도가 너무 느렸다.
하긴, 쟤들이 소예리 헌터님만큼 비행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으면 1인용 비행기로도 먹고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게 불가능한 놈들은 점점 속도가 처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산 넘고 물 건너 뛰어와야 하는 기사 쪽은 위치가 거의 바뀌지도 않고 있었다.
“아이고, 저렇게 가면 제시간에 가기 힘들 텐데…….”
최대한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기!
난 안타깝다! 쟤들이 곧 탈탈 털리고 능력치 까일 미래가 보여서 너무 안타깝다!
그러게 마법사 셋 중 하나라도 기사 좀 픽업해주지 그랬냐!
“……아.”
그렇게 생각하던 난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쟤들은 마법사가 기사한테 간다고 해도 못 들겠네?
소예리 헌터가 아무리 보조계라지만 S급은 S급이었다.
딜러나 탱커 정도는 아니라도 S급에게 주어지는 기본적인 근력은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S급 기본 스탯이면 사람 한 명 드는 게 어려울 리가 없었다.
반면 저 마법사들은 헌터각성을 안 했으니 될 리가 없었다.
“…….”
난 필사적으로 다시 웃음을 참았다.
흐으으읍! 웃으면 안 된다!
“흐음. 몬스터들이 빠르게 오고 있는데…….”
메이든 부인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눈에도 몬스터들이 저택으로 빠르게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과연 동제국 놈들은 저걸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어느새 흥미 없던 리펜마저 조금 관심이 생겼는지, 지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편 몬스터를 뜻하는 빨간 점 100개는 옹기종기 모여 거의 사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오, 빠르다, 빨라!
[…….]
동제국의 마법사들도 그걸 봤는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인생에 다시없을 속도가 나는 건 아니었으므로, 우리가 보기에는 지지부진한 속도로밖에 안 보였다.
게다가 마법사들은 중간중간 주춤하고 있었다.
잘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건가?
방향이야 몬스터 뛰어가는 방향이 안 보고 싶어도 보일 수밖에 없을 텐데?
“음…….”
그때 소예리 헌터가 목을 가다듬는 게 보였다.
눈썹이 열심히 꿈틀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표정관리에 힘쓰고 있는 듯했다.
이 표정은?
경고 때문에 차마 웃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확신이 들었다.
헌터채팅이 됐으면 아마 헌터채팅이 터져나갔을 것이다.
그녀는 간신히 표정관리를 한 다음 냉철한 관찰결과를 내어놓았다.
“아무래도 날아가다가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서 당황한 것 같아요.”
그 말에 메이든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조금 전에는 마법사가 충분한 기량을 가지고 있어 이동할 수 있었지만, 이 파티는 그렇지 않았나 보군요.”
그러고는 조곤조곤 품격 있게 동제국을 까기 시작했다.
바아로 그겁니다!
“보통 날아가거나 뛰어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거리이긴 했습니다.”
주이안 헌터가 말을 얹었다.
물론 우린 보통이 아니었으므로 따라 하면 곤란했다.
가끔 TV에 나오는 그 문장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비각성자나 어린이는 따라 하지 마세요]
우리도 말할 걸 그랬나?
※S급 미만은 따라 하지 마세요?
물론 늦은 일이었다.
저들은 소예리 헌터와 자신들의 수준 차이를 너무 작게 본 것이 분명했다.
“음.”
신재헌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난 저 자세를 알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몰래 만화 보다가 웃길 때 얼굴 가리는 자세 아니냐?
요컨대 이쪽도 기술 좋게 웃고 있었다.
“자신 있게 날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때 주이안 헌터가 입을 열었다.
메이든 부인이 그를 돌아보는 게 보였다. 그의 감상을 더 듣고 싶은 게 분명했다.
주이안 씨는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확신이 있지 않으면 저런 작전은 생각해 내기 힘들 텐데요.”
“크흠!”
난 그 말에 웃음을 참기 위해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여기서 웃으면 안 된다!
하지만 저렇게 욕 안 할 것처럼 말하다가 돌려 까는 게 어딨어!
웃기려면 깜빡이 켜고 웃기라고!
한마디로 저건 능력도 안 되는 놈들이 자신감만 넘친다는 소리였다.
[…….]
그 사이 지도는 빠르게 움직였다.
동제국 마법사들은 드디어 몬스터들이 오가는 길로 접어든 상태였다.
문제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점이었다.
“저거 따라잡을 수 있으려나?”
나랑 같은 생각인 듯 메이든 부인도 지도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몬스터들이 앞서가는 것에 당황했는지, 잠시 주춤하다가 저택 쪽으로 비행경로를 꺾었다.
몬스터들 앞을 가로막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기사는 아직 못 온 것 같네요.”
신재헌은 그렇게 말하고는 학창시절 내내 다년간 수련된 표정 감추기 기술로 웃음을 감추었다.
일부러 안 보고 있었는데 말하지 마! 봐버렸잖아!
내가 애써 무시하고 있던 기사는 이제야 목적지의 1/3 거리를 간신히 이동했을 뿐이었다.
그래, 보통 산 넘고 물 건너는 게 쉬운 게 아니라니까?
그 사이 마법사들은 기사와 합류하는 걸 포기했는지, 몬스터들을 뒤로하고 저택 근처로 날아갔다.
그리고 삼각형 모양을 그린 채 움직임을 멈췄다.
“오…….”
쟤들도 뭐, 한 방에 처리할 마법 쓰려는 건가?
그럴 파괴력이 나오나?
우리야 버프 떡칠에 신재헌이 광역기 데미지가 나오는 딜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다.
하지만 저쪽은 그런 구성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흐음.”
메이든 부인이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지도 위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세 마법사 사이에 그려진 마법진은 한눈에 봐도 고급 마법진이었다.
오, 뭔가 하나?
설마 성공하나?
저들이 성공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나쁠 건 없었다.
‘날카롭게 변수를 짚어낸’ 우리도 그럭저럭 점수를 받을 것이다. 문제는 저쪽이 만점을 받을 거라는 점.
난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때 소예리 헌터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저기서는 한 방에 몬스터들을 처리하기가 힘들 텐데…….”
아주 걱정스러워 하는 눈과는 달리 손으로 가려진 입은 웃고 있었다.
소예리 헌터의 과거는 모르지만, 이 사람도 수업 시간에 딴짓 좀 해본 사람이 분명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기사는 열심히 기를 쓰고 뛰어오고 있었다.
저 불쌍한 기사 좀 어떻게 해 보렴, 애들아!
[…….]
안타깝게도 기사에게는 쥐뿔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마법사들은 빠르게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
점점 지도 위가 환한 노란색 마법진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과연?
생각보다 있어 보이는 게, 성공할 것도 같은데?
하지만 마법진의 선 하나하나가 빛으로 채워지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사이.
몬스터를 뜻하는 붉은 몬스터들은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음.”
미래는 소예리 헌터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신재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연스럽게 입가를 쓸어내리며 웃고 있었다.
이게 바로 세월의 짬이란 말인가?
감탄하던 내가 지도에 시선을 돌렸을 때.
“……!”
지도에선 분명 소리가 안 난다고 했지만, 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순간 내가 들은 소리는 이거였다.
빼꼼!
어디서 나는 소리냐면, 마법사들이 그린 마법진 아래에서 나는 소리였다.
거기선 마법사들의 마법진이 구축되는 걸 기다려 줄 이유가 없는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마법진의 범위를 탈출하고 있었다.
빼꼼빼꼼빼꼼!
“저걸 계산을 안 하네.”
신재헌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딜러에게조차 계산으로 밀린 마법사 셋이 주춤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제국이 기사라면 동제국은 마법사라더니.
동제국의 차기 황제가 킨나 발탄이든 킨나 발탄 할아버지든 동제국이 망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주 미래가 눈이 부셨다.
[……!]
그리고 그들의 미래만큼 눈부신 노란빛 마법진이 곧 지도에서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