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38)화 (138/218)

138화

처음엔 화염검을 켜길래 몬스터랑 조우한 줄 알았다.

그런데 멀리 메이든 저택으로 몰려가고 있는 100마리의 몬스터는 뭔가에 가로막히고 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

의아함에 시선을 위로 든 순간 난 황당한 꼴을 발견했다.

“오.”

같은 것을 발견한 소예리 헌터가 뒤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게, 멀리서 불붙은 막대기가 휘적휘적 흔들리고 있었다.

횃불이면 심각했겠지만 문제는 그 검이 화염검 스킬 영향을 받은 말레티아의 검이라는 사실이었다.

“저걸 횃불로 쓰네.”

SS+급 무기에 SS급 스킬을 붙여서 횃불로 사용하는 놈이 있다?

하긴, 저걸로 캠프파이어 불도 붙였는데.

여기저기 잘 쓰면 좋은 거지!

―쌔앵!

소예리 헌터가 나를 꼭 안아들고 신재헌과 주이안 씨가 있는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

“일단 모였네요.”

네발짐승 친구들은 A급이라 쓰고 S급 스탯을 가지게 된 친구들답게 빠른 속도로 저택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저 속도면 5분이면 닿겠는데?

우리야 빠르게 날아서 가면 저 진군을 막는 데 문제는 없겠지만,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린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저렇게 예쁘게 모여서 오면 광역기로 치는 게 낫겠죠?”

소예리 헌터님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우리 중에 광역 스킬이 있는 사람은 소예리 헌터와 신재헌뿐이었다.

“네. 길 따라서 오는 거 보면 그냥 제가 화염검으로 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신재헌이 몬스터들의 진군 속도와 저택까지 남은 거리를 가늠해보더니 말했다.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내리찍으면 새는 놈은 거의 없겠는데요?”

“혹시 모르니까 내가 허공에서 새는 놈 있는지 체크할게요.”

그럼 나랑 주이안 씨는 버프만 걸어주고 드러누우면 된다는 소리다.

하필 몬스터가 예쁘게 모여서 몰려오는 형식이라 상대하기가 쉬웠다.

“와, 근데 SS급 던전에서 A급 잡몹이라니 인심 좋네.”

신재헌이 감탄했다. 주이안 씨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달리 보면 심상치 않습니다. 여긴…… 어린 아들이 병법 수련을 하는 연습장이니까요.”

……그러네? 나도 내심 A급이라 다행이라고 여기던 차라 이건 또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었다.

그 말에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

그러더니 말을 바꾸었다.

“어머님이 살벌하시네요.”

그리고 그 살벌한 지도에 엿 같은 위치로 우리를 올려놓은 건 동제국 놈들이었다.

“참 한 치 앞밖에 못 보는 친구들이네.”

투덜거림이 절로 나왔다.

우리가 나가면 다음 순서가 누구인지 짐작되지는 않는 건가?

아니, 설마 우리가 못 나올 거라고 생각했나?

“동제국 애들 말이죠?”

그때 소예리 헌터가 불쑥 물어 왔다. 아까 날아올 때 잠깐 보였던 심각한 표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옛날 얘기…… 뭐였을까.

말하기 곤란한 거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었다.

어릴 때는 나도 지금보다 철이 없어서 소예리 헌터의 과거를 주저 없이 묻곤 했으니까.

‘진짜 옛날에 뭐 했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했어요.’

‘에이, 사람이 어떻게 숨만 쉬고 살아.’

깔깔 웃은 어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진짜 안 알려줄 거예요? 비밀이에요? 엄청 비밀이면 안 알려줘도 돼.’

궁금한 걸 참지 못하면서도 정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 건 나름 어린 시절의 배려였다.

거기서 그냥 깠으면 그냥 말하기 싫은 과거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텐데.

소예리 헌터는 의외로 다른 말을 했다.

‘내가 30살…… 아니지, 35살 되는 해에 알려줄게요. 그 전까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30살까지는 얼마 남지 않아서 급히 5살을 늘린 게 분명했다.

그리고 소예리 헌터가 35살이 되던 해.

어릴 때보다 눈치가 좀 더 생긴 나는 궁금해도 그녀에게 과거를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소예리 헌터는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조심스럽게 오더니 말했다. 밑도 끝도 없이.

‘……40살 되면 말해줄게요.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됐거든.’

대체 무슨 기억이길래 그럴까.

‘말하기 곤란한 기억이에요? 그럼 말하지 않아도 돼요. 궁금한 건 맞는데 굳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 되짚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내 말에 소예리 헌터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저었다.

‘곤란하다기보단, 음, 괜찮을 것 같은데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거예요.’

그러더니 그녀는 기꺼이 말했다.

‘그러니까 마음껏 궁금해해도 돼!’

‘궁금해해도 안 알려줄 거라면서요!?’

‘40살 전까지만 그런다니까!’

그렇게 웃음과 함께 끝났던 대화였다.

문득 과거의 실마리를 잡고 보니 궁금증이 더해졌다. 대체 무슨 과거일까?

……구멍 난 양산과 함께하는 과거라니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개쓰레기 놈과의 일방통행 로맨스뿐이란 말인가?

내가 머리를 싸매는 사이, 스킬창이 번쩍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검의 수호자(B) 뜨거운 피(A) 화염검(SS) 준비된 일격(S) 기혈개방(S) 책임감(S) 육참골단(SS) 극대화(S) 보호막(S) 안전지대(S) 회복의 발걸음(S) 보호의 손길(A)]

언제 봐도 풀버프 상태는 짜릿했다.

난 주이안 씨와 소예리 헌터님의 버프까지 잘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그를 돌아보았다.

음~ 잘 준비된 신재헌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줍니다.

[잔상(SS+) 스킬을 국소 범위에 적용합니다.]

[적용 범위 : 헌터 신재헌의 ‘말레티아의 검(SS+)’]

[헌터 신재헌, 잔상(SS+)효과 승인.]

이걸로 신재헌의 검에서 뻗어 나가는 검기는 잔상과 함께 전방을 휩쓸 것이다.

준비가 끝났다는 뜻으로 두 팔로 원을 그려 보이자, 이쪽을 보던 소예리 헌터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즐거운 얼굴을 보니 이 버프둘둘 S급 폭탄을 어디다가 떨어뜨릴지 위치를 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폭탄이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체적으로 제 미래를 가꾸어가는 동안, 난 주이안 씨를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엄청 빨리 왔네요?”

숲을 뚫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우리야 날아왔다고 치지만 이쪽은 신재헌이 움직였으니, 산 넘고 물 건너 뛰어야 했던 거 아닌가?

신재헌이 아무리 S급 딜러고, 소예리 헌터가 나를 배려해 느리게 날아오다가 막판에만 속도를 높였다지만 따라잡힐 만한 속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신재헌은 주이안 씨를 업고 있었을 테니까 빨리 뛰는 것도 불가능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할 때, 주이안 씨가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재헌 헌터님께서, 음…….”

그러더니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달리기 가장 편한 자세로 옮겨 주셔서요.”

“?”

달리기 편한 자세?

그거야 당연히 사람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거다.

그렇게 들고 온다고 S급인 주이안 씨의 허리가 부러지지는 않았을 테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이! 인권이!!!

난 신재헌이 자신보다 조금 작은 주이안 씨를 막대기처럼 들고 뛰어오는 장면을 상상하기가…… 미안했다.

상상할 수는 있었지만 주이안 씨한테 못할 상상이었다!

“설마 이렇게요?”

내가 옆구리로 손을 가져가며 흔들어 보이자 주이안 씨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행이었다. 하긴, 어지간히 급한 거 아니었으면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잠깐, 근데 그 자세 다음으로 뛰기 편한 자세면?

“그럼 설마…….”

난 공주님 안는 포즈로 두 팔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주이안 씨가 눈을 감았다.

난 분명 그 눈이 감기기 전에 보았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 천만 가지의 고뇌가 떠오르는 것을.

“안겨 왔어요???”

진짜??? 내 말에 주이안 씨는 답하는 대신 마른세수를 했다.

‘네’보다 더 진솔한 답이었다. 난 웃음을 터뜨렸다.

“비행 스킬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애절하게 말씀하시는 게 정말 스킬 발현이라도 할 기세였다.

“와, 진짜 이렇게?”

여러분! 제가 건수 잡았습니다! 앞으로 한 달은 이거다!

내가 두 손으로 허공을 안은 채 흔들어 보이자 주이안 씨가 귀까지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이거 헌터 각성하시던 날 제가 안아준 거 이후로 처음 아니에요?”

헌터협회 앞에서 곤란해하던 그를 빼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말에 주이안 씨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안겨 다닐 일은 없으니까요.”

하긴, 보통 이렇게 멀리 떨어질 일이 잘 없으니까.

난 곤란해 보이는 주이안 씨의 표정에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어때요, 누가 승차감 더 좋았어요?”

나야, 신재헌이야?

내가 속닥속닥 묻자 주이안 씨가 다시 마른세수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얼굴을 물들인 붉은 기가 가시는 건 아니었다.

“신세를 졌는데 그런 걸 비교하기는 좀…….”

그 와중에 매너를 지키는 주이안 씨는 정말 메이든 가에서 높이 평가할 품격 있는 인재였다.

“그럼 이거만 물어볼게요. 신재헌 헌터님이 잘 옮겨 줬어요?”

내 말에 주이안 씨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본인도 키 훤칠한 남정네가 또 다른 남정네에게 공주님 안기듯 안겨서 돌아다니는 건 눈에 띄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주이안 씨는 이목이 집중되거나 눈에 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기가 특수 공간이고, 누군가 영상이나 사진을 찍을 걱정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예……. 편히 옮겨 주셔서.”

그런데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곤란해하는 주이안 헌터님은 정말로 숨 막히게 귀여웠다.

이 맛에 주이안 씨 놀리지!

“자꾸 놀리시면 곤란합니다.”

정말 곤란해요. 그렇게 말하는 주이안 헌터님은 손부채질이 절실해 보였다.

난 그런 그의 옆에서 열심히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후우.”

그리고 진정하겠답시고 심호흡을 하는 그를 보다가 결국 참던 말을 뱉고 말았다.

“이제 소예리 헌터님한테만 안겨 보면 되겠다.”

“네?”

조금 진정한 듯 안색이 돌아온 주이안 씨를 보자니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공주님안기 그랜드슬램 달성인데.”

“신유리 헌터님…….”

주이안 씨가 결국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제가 안겨 봤는데 소예리 헌터님 따뜻하고 좋아요.”

해보지 않겠는가? 응? 내가 깔깔거리면서 주이안 씨를 한참 놀릴 때였다.

뒤에서 번쩍 빛이 터졌다.

―쿠콰콰쾅!

뒤이어 들린 건 굉음이었다. 대륙을 반으로 쪼갤 것 같은 굉음.

그리고 분명 멀리 떨어진 곳인데도 여기까지 땅이 흔들렸다.

“어어.”

소예리 헌터가 투하한 신재헌 폭탄이 낸 결과였다.

근데 얼마나 풀파워로 때렸으면 여기까지 흔들려?

의문과 함께 몬스터가 몰려온 쪽을 돌아본 순간.

[‘헌터 주이안(S)’이 ‘순간집중(SS)’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헌터 주이안(S)’이 ‘보호의 손길(A)’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빠르게 올라오는 스킬과 함께.

―화악!

주이안 씨의 넓은 사제복이 나를 감쌌다.

그리고 근처로 사제복이 미처 막지 못한 열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것도 잠깐.

난 한숨을 내쉬었다.

B급은 충격파도 조심해야 하지.

“고마워요.”

내가 말할 때였다.

[0]

아까부터 [100]이라고 떠 있던 잔여 몬스터의 수가 0으로 바뀌었다.

[‘메이든 부인의 시험’ 클리어!]

[파티원 중 부상자가 없습니다.]

[히든 보너스 ‘메이든 부인의 흡족함(L)’ 버프를 받습니다!]

[메이든 부인의 흡족함(L) : ‘저택의 손님’ 던전에서 전체 능력치 +10%]

깎는 건 50%, 70%인데 주는 건 10%라니 감동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야! 정말 품격 있다!

내가 감탄하는 사이 시야가 일렁이며 바뀌었다.

***

“다소 실험적인 진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성공해내다니 대단하네요.”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가 들은 건 메이든 부인의 평가였다.

그녀는 우리가 아니라 동제국 놈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대단한 건 쟤들이 아니라 우리가 아닐까요?

“연구해볼 만한 진형이에요.”

연구는 진형이 아니라 이쪽의 딜량을 연구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만점입니다.”

메이든 부인이 [10]이라고 쓰인 종이를 들어 보였다.

만점도 우리 것이 아닐까요????

왜 쟤들이 가져가?

[메이든 부인 : +40]

[리펜 드 메이든 : -30]

동제국 놈들의 머리 위에 뜬 메이든 부인의 호감도가 치솟은 게 보였다.

“…….”

“…….”

우리 넷의 시선이 마주쳤다.

특히 소예리 헌터와 신재헌의 시선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만만치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저놈들 호감도를 보니 우리의 미래가 보였다.

우리가 복수한답시고 쟤들을 이상한 데다 처박으면 저놈들은 당연히 실패한다.

그럼 저놈들은 능력치 –50%나 –70% 디버프를 받겠지만 안 그래도 허접한 능력치 깎이든 말든 관심 없었다.

문제는 저놈들이 실패할 경우 우리에게 주어질 페널티였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진형에 배치하자니…….

“…….”

동제국 놈들이 쪼개는 것이 보였다. 얼씨구?

우리가 지들 좋은 일 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하지만 저놈들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내 말에 장난감 말을 부러뜨릴까 고민한 게 분명한 소예리 헌터의 손이 멎었다.

자자잠깐, 그런 폭력성 넣어둬요!

“우리 아주 품격 있게 해결합시다.”

딜하는 데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딜러를 믿으셔야 합니다.

마침 떠오른 좋은 생각에 난 메이든 부인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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