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우릴 보고 동제국 쪽은 뒤늦게 박수를 쳤지만 메이든 부인은 그쪽을 영 탐탁지 않다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감사합니다.”
표정을 회복한 메이든 부인이 우리를 보다가 말했다.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메이든에서는 후계자의 교육을 위해 주기적으로 경연을 열고 있답니다. 올해는 리펜이 처음으로 연말 경연을 주최하는 해이고요.”
그런 세계관인 모양이다. 난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경연 전에, 연습 삼아 리펜에게 ‘좋은 친구들의’ 품격 있는 경연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여러분을 초청하였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좋은 친구(?)라는 것과 품격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놈의 품격, 품위 입에 붙겠네!
“그러면 바로 경연 주제 드리겠습니다. 이 경연은 공식적인 게 아니니, 편한 마음으로 토론에 임해 주세요.”
편한 마음으로 있으면 지하에 처박히거나 배드엔딩이 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저쪽은 우리에게 밤에 S급 몬스터 선물을 보내려 했던 사람이었다.
마음이 편해질 턱이 없었다.
“리펜의 친구인 여러분이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랍니다.”
우리가 의심하거나 말거나 밑밥을 실컷 깐 메이든 백작부인이 하녀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우리 앞에 의문의 네 조각 지도가 전달되었다.
어, 이거 아까 고른 거잖아?
“?”
이걸로 뭐 하는 건데? 받아든 순간 난 이상함을 느꼈다.
“……1번밖에 없는데?”
반면 동제국 쪽은 멀쩡한 네 조각 지도를 받아들고 있었다.
저게 아무래도 우리가 고른 지도 같은데?
저쪽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우리를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네 조각 따로따로 들고 나왔지?
우리 네 명의 시선이 마주쳤다.
쯔쯔.
저쪽은 우애를 보정해줄 스킬이 없었던 모양이다. 안타까운 놈들이로고.
지금쯤 경고 파티로 목이 달랑거리고들 있을 것이다.
“그럼 지도를 알맞은 모습으로 맞춰 주시고, 중앙 산맥을 가로지른 큰 길로.”
큰 길로? 다행스럽게도 1번밖에 없는 지도의 주변으로 반투명하게 전체 지도가 표시되었다.
[메이든 저택]
그리고 우리가 있는 메이든 저택도 표시되어 있는 게 보였다.
그 앞에 있는 게 큰길인 듯했다.
“……몬스터 100마리가 오는 걸 막아 보세요.”
메이든 부인이 말했다.
“?”
몬스터 100마리를? 뭐, 지도로 막으라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을 때 우리 앞에 장난감 말 네 개가 떨어져 내렸다.
[‘병력’을 지도 위에 배치하세요.]
아, 혹시 지도 안에 들어가서 막는 시스템?
근데 말을 집어 들고 보니 시스템창이 이상했다.
[마법사]
[마법사]
[마법사]
[기사]
이건 우리 쪽이 아니라, 저쪽 인원 구성인데?
동제국 놈들도 같은 걸 발견했는지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돌연 사악한 표정을 지은 한 놈이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놈이 들고 있는 건 분명 기사를 나타내는 검은 말 두 개와 마법사를 나타내는 진청색의 말 하나, 그리고 사제를 나타내는 게 분명한 하얀 말이었다.
―탁, 탁, 탁, 탁!
놈은 누가 봐도 우리를 나타내는 말을 지도의 이상한 곳에 올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S)의 위치가 정해졌습니다.]
[클로나 에이센(S)의 위치가 정해졌습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B)의 위치가 정해졌습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S)의 위치가 정해졌습니다.]
시스템창이 주르륵 떴다. 그리고 메이든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동제국 쪽으로 걸어갔다.
“이쪽이 먼저 완성한 것 같군요. 볼까요?”
그러면서 부인이 지도에 손을 얹는 순간.
―파앗!
눈앞에 반투명한 지도가 떠올랐다.
[메이든령 지도]
그렇게 쓰인 지도에는 우리 네 명의 위치가 각기 찍혀 있었다.
우리의 위치는 보란 듯이 메이든 저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네 곳에 있었다.
요컨대 멀리 떨어뜨려 놨다는 소리였다.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저 X끼들이!
빡치는 것도 잠깐,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놈들 머리는 이따 깨 주고 일단 눈앞의 문제를 처리하는 게 중요했다.
다년간의 게이트 경험이 이 다음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가 데리러 갈게요.”
소예리 헌터가 웃음기 없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하는 말이었다.
신재헌 역시 주이안 씨를 돌아보았다.
B급인 나도 그렇지만 주이안 씨도 만만치 않게 기동성이 떨어지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들고 가려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가 작전을 빠르게 세운 순간.
[5초 후 이동됩니다.]
불길한 예상은 왜 틀리는 법이 없지? 난 알림창을 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지!
갑자기 뜨는 홀로그램 3D 지도하며, 위치 찍히는 것하며, 게이트 N년차면 미래가 줄줄이 그려지는 법이었다.
―파앗!
[‘메이든령 지도’ 안으로 진입합니다.]
눈앞이 번쩍였다.
와! 이게 바로 RP던전 안의 특수던전 안의 특수공간!?
양파 같은 전개에 욕을 씹어 삼키는 사이 시스템창이 다시 떴다.
[‘메이든 부인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이 특수 공간에서 사망할 시, ‘저택의 손님’ 던전에서 ‘못마땅한 시선(L)’ 디버프가 부여됩니다.]
아예 죽는 건 아닌가 보지? 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SS급치고 친절하게 나오는데?
[못마땅한 시선(L) : 전체 능력치 –50%]
……그냥 천천히 고통스럽게 뒈지라는 뜻이었군.
[메이든 백작저로 몬스터들이 도착할 경우 미션이 실패하며, 이 특수공간에 들어온 파티원 전체에게 ‘매우 못마땅한 시선(L)’ 디버프가 부여됩니다.]
[매우 못마땅한 시선(L) : ‘저택의 손님’ 던전에서의 능력치 –70%]
SS급이라 그런지 능력치 깎는 게 아주 통이 컸다.
이 특수공간에서 죽거나 미션에 실패하면 그냥 죽으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야…….”
감탄하는 사이 난 동제국의 친구들이 꽂아준 위치에 앉아 있었다.
―짹짹짹!
내 속도 모르고 맘도 모르고 울어대는 숲속의 새 소리를 들으면서.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시너지(A) 비행(A)]
소예리 헌터님의 스킬창에 비행이 뜨는 게 보였다.
지도상으로 메이든령이 지나치게 큰 영지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
기다리면 금방 올 것이다. 내가 한가하게 숲속을 살펴볼 때였다.
“예리택시 부르신 분~”
별안간 머리 위에서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난 당연히 기겁했다.
“여기서 그런 단어 쓰지 말라고!”
경고 받을 일 있어요!?
하지만 나를 발견하고 하강하는 소예리 헌터는 뭐가 어떻느냐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우린 지도 속으로 들어온 거잖아요. 지도에 스피커 달린 것 같지는 않던데~?”
“그으건.”
그렇긴 한데……
소예리 헌터는 자신 있는 얼굴이었다.
이런 종류의 함정을 파훼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는 보조계 헌터가 말하는 것이니 거의 확실했다.
“근데 여기 오자마자 서서 기다린 거예요? 움직인 흔적이 하나도 없네!”
하강을 마친 소예리 헌터는 내 등 뒤를 끌어안은 채 땅에 발을 디뎠다.
“원래 움직여 봐야 데리러 올 사람만 피곤한 법이죠.”
이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보통 내가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잔상 스킬을 쓰는 데 익숙한 나는 헌터팀 중 가장 몸놀림이 빨랐으니까.
찾아와 달라고 하면서 움직이지 마! 거기 헌터일보 기자 듣고 있니?
게이트 취재하러 들어왔다가 길 잃어버렸다고 울면서 숲 돌아다니지 마! 그럼 몬스터 주의만 끈다고!
“한두 번 당해 본 게 아닌 것 같은데?”
소예리 헌터는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하지 마세요, 아.”
난 손을 내저었다.
그런 나를 소예리 헌터가 뒤에서 꼬옥 끌어안았다.
“좋아요, 그럼 편하게 모시겠습니다아.”
[‘헌터 소예리(S)’의 ‘비행(A)’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소예리 헌터와 함께 내 발도 땅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왔다.
무사히 만났다는 것에 조금 안심했는지, 소예리 헌터가 입을 비죽였다.
“아니, 지도에 뭐가 있을 것 같긴 했는데 이렇게 들어올 줄은 몰랐지.”
그러면서 투덜거렸다.
“난 마지막에 알았어요.”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내 얼굴 옆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진짜요? 어떻게?”
그야…… 마지막에 진한 아이컨택 하면서 알았죠…….
난 좀 전처럼 인자하게 웃었다.
“들어오기 직전에 동제국 놈 하나가 보란 듯이 쪼개면서 이상한 데다가 말을 세우더라고요.”
“아, 그 마법사 세 개에 기사 한 개 있던 거?”
소예리 헌터는 우리 쪽에 주어진 말들을 살펴보느라 동제국 놈들이 뭘 하는지 못 본 모양이었다.
하긴, 보기엔 너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놈은 고민도 없이 우리를 X같은 데에 처박아 버렸거든.
“네.”
내가 동제국 놈의 이야기를 해 주자 소예리 헌터가 이를 갈았다.
“와, 그럼 걔네는 이럴 줄 알자마자 바로 우리를 이상한 데에 놨다는 거죠?”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의 입에서 오랜만에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어쩐지 싹수없게 쪼개고 있더라니. 이따 나가기만 해 봐! 내가 기가 막힌 자세로 처박아 줄 테니까!”
그러더니 한 손으로 나를 단단히 안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인벤토리를 뒤적였다.
“우리도 명당 찾자!”
열성적인 목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건 웬 망원경이었다.
엿은 더한 엿으로! 그렇게 외친 소예리 헌터가 망원경을 번쩍 들었다.
“그걸로 뭐 하게요?”
“탐사!”
소예리 헌터는 주변을 살피면서 말했다.
“아주 기가 막힌 곳에 박아 버려야지.”
역시 당하고는 못 사는 소예리 헌터다웠다.
이렇게 흥분한 팀원을 봤을 땐.
“바다에 처박아버리는 게 어때요? 여기 해안이던데?”
좋은 의견을 내서 얼른 딴생각을 못 하게 하는 것이 팀원의 도리다!
내가 엿 먹이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