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내 머리 위에 인내심 게이지가 있었으면 아마 지금 꽉 차 있을 거다.
오, 뚜껑 열린다, 열린다!
지들이 초대해 놓고 뭐가 어쩌고 어째?
아니, 그럼 우리가 무슨 예의범절 없어 보이는 관상이야?
이래 봬도 예의 바르게 생긴 얼굴인데?
그때 주이안 씨도 우뚝 걸음을 멈췄다.
갈색 눈이 순간 가늘게 뜨이는 게 보였다.
원래 딜러란 본능적으로 힐러의 감정 상태를 살필 수 있는 법이다.
이…… 이 사람 화났다!
하지만 화가 난다고 때려 부수거나 욕하는 일은 없는 사람이라 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신재헌과 소예리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화 안 내는 사람이 화내는 게 더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때 주이안 씨가 입을 열었다.
“메이든의 품격에 알맞은 손님이니 주인께서 초대하지 않으셨겠습니까?”
“…….”
잠시 무거운 침묵이 지나가고.
곧 집사는 잠시 뭘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난 그 말에 환호를 지를 뻔했다.
주이안 씨의 말은 요컨대, ‘너희들이 초대해 놓고 예절을 따진다면 초대한 너희 주인의 안목이 이상하다는 뜻인데 괜찮겠느냐’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고급 욕은 주이안 씨밖에 못 한다! 워후!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실언이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집사가 결국 제 잘못을 시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이안 씨는 못 들은 척 그 옆을 쌩 지나가 버렸다.
음, 마지막까지 멕이는 건 이렇게 하는 거로군.
쌩!
난 주이안 씨를 따라 집사의 말을 못 들은 척 그 옆을 지나 버렸다.
우리 넷이 스쳐 지나간 자리로 썩은 얼굴의 집사만 남았다.
주이안 씨 만세!
***
그날 밤.
저택 2층은 올라갈 수 없고, 나가는 길은 막힌 데다 1층에는 별다른 장치나 함정이 없다는 걸 우리가 알 때쯤 사용인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우리를 드디어 2층으로 안내하고는 다짜고짜 외진 복도로 밀어 넣었다.
“오늘 밤 지내실 방입니다. 부족해 보이실지 모르나 알차게 준비했으니,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위치도 그렇고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거였다.
“각방이네요?”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그야 당연하다.
귀족들이 같은 방에 머무는 걸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문제는 그건 귀족 이야기고, 우리는 SS급 던전에 들어온 헌터라는 점이었다.
SS급에서 각방???
“그럼 저택에서의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숙지하시고,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무슨 주의사항?
그렇게 생각한 순간 떠오른 게 있었다.
밤에는 나오지 말라던 규칙.
아니, 그럼 뭐가 올지 모르는 방 안에서 나가지도 말고 잠이나 자라고?
SS급 던전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채팅도 안 된다고!
그때 신재헌이 말했다.
“여차하면 벽 부수고 난입할게요. 벽에서 떨어져서 자요.”
너는 무슨 남의 집 벽 부순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
그렇게 말하기에는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난 그를 툭 쳤다.
“경고 조심하세요, 경고.”
대체 무슨 기준인지는 몰라도 저택 벽 부순다는 말은 품격 있는 건지 경고나 데미지는 없었다.
하지만 진짜 벽을 부쉈을 땐 틀림없이 경고가 올 것이다.
“그럼…….”
그 사이 우리 넷은 방 안으로 밀어 넣어지고 있었다. 하녀도 SS급이라 그런지 힘이 끝내줬다.
―달칵.
그렇게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우리는 격리당했다.
심지어 하녀도 같이 들어와 문을 닫는 게 보였다.
혼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녀랑 같이 있는 거였어?
골 때린다고 생각한 순간, 하녀가 더 골 때리는 소리를 했다.
“그럼 오시는 길에 준비하신 선물을 주시겠습니까?”
“네?”
준비? 내가? 뭘?
오는 길에 풀이라도 뽑아 왔어야 했어?
누가 그렇게 식물 줄기를 쥐어뜯어 놨나 했더니 그게 손님 역할이었어?
황당해하는 나와 하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음, 주인님께서도 좋아하시겠군요.”
그러더니 하녀가 내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좋아해?
내 손에는 선물은커녕 휴지 조각 하나도 들려 있지 않았다.
“?”
내가 눈을 깜빡였을 때.
[저택의 주인을 위한 선물을 제출합니다.]
[가장 아끼는 물건 하나가 사라집니다.]
뭐라고?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아이템창이 반짝였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있는 ‘무기’가 사라집니다.]
[‘체육선생님의 목검(SS+)’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 뜯어간다더니 하나만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장비하고 있던 ‘도금 목걸이(C)’가 해제되었습니다.]
[도금 목걸이(C)의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획득 경험치 50% 증가)’가 해제되었습니다.]
어?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B)
체력 : 1206632 (+25000)
근력 : 14024 (+10000)
마력 : 46291 (+40200)
민첩 : 10027 (+31120)
지구력 : 6948 (+10200)
방어력 : 4526 (+10000)
특수 버프 “천상의 힘(S)” : 스킬 발동 속도 10% 증가, 받아들이는 버프 효과 10% 증가]
분명 하나만 사라진다더니, 인벤토리에선 신재헌의 도금 목걸이까지 사라져 버렸다.
애장품인데 이렇게 사라져도 돼?
근데 난 왜 무기만 달랑 가져가?
내가 체육선생님 목검을 그렇게 아꼈나?
SS급 무기라서 마음을 좀 쓰긴 했지만 그뿐이었던 것 같은데?
한없이 떠오르는 의문에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하녀가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실화냐?
지금 삥 뜯어 놓고 편히 자라는 거야?
“잠이 오겠냐?”
주변은 삭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아무래도 이 방에 들어온 순간 눈에 띄게 조용해진 걸 봐서는 방에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바깥으로 뭔가 수상쩍은 게 와도 알아채기 힘들다는 거다.
B급한테 걸리는 SS급 던전 함정은 없겠지만.
“음…….”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이럴 땐 밤늦게 손님이 하나씩 오는 법이거든?
RP던전 다음으로 기상천외한 함정이 많이 깔려 있다는 특수던전이다.
밤을 고이 보내게 해줄 리가 없었다.
“나가는 게 낫나?”
경고 1회 먹더라도 여기서 1:1로 SS급 던전 몬스터 마주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좁은 방보다는 튀기 좋을 거 아냐?
“아니지.”
하지만 난 곧 고개를 저었다.
내 옆방은 신재헌 방이었다.
난 B급이라서 방음벽 영향을 세게 받고 있지만, S급인 신재헌은 옆방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근데 이놈이 내가 나가는 소리를 들으면?
벌컥 뛰쳐나와서 경고를 받을 미래가 보였다.
“안 되지.”
난 자리에 그냥 앉아 버렸다.
채팅도 안 되고 격리됐을 땐?
[‘경계 태세’를 사용합니다.]
[‘경계 태세’를 해제하였습니다.]
[‘경계 태세’를 사용합니다.]
[‘경계 태세’를 해제하였습니다.]
난 스킬을 껐다 켜기 시작했다. 그러자 파티창의 내 버프창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 B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경계태세(A)
- 디버프 : 저택의 강력한 규율(L) 감시(L)]
채팅이 안 돼도 스킬은 보일 거 아냐?
이건 우리가 밤에 잠들기 전에, 헌터채팅도 치기 귀찮을 때 하는 짓이었다.
대충 스킬창에 뜨는 스킬 이름으로 상대의 말을 유추하는 식이었다.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신재헌의 스킬창이 번쩍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검의 수호자(B)
- 디버프 : 저택의 강력한 규율(L) 감시(L) 경고1(L)]
저게 공격력 버프라고 해도 다른 스킬이 같이 안 올라오는 걸 보면 의사소통용(?)으로 쓴 게 분명했다.
수호. 대충 자기가 경계하겠다는 건가?
[검의 수호자(B)]
새삼 B랭크로 내려간 스킬이 눈에 띄었다.
근데 쟤 스킬랭크 내려간 거, 다 알고 있나?
그때 소예리 헌터의 스킬창이 번쩍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시너지(A) 불침번(SS)
- 디버프 : 강력한 저택의 규율(L) 감시(L)]
저 스킬 이름이 뜻하는 바야 확실했다.
그냥 자기가 불침번 서겠다는 거다.
그러자 신재헌의 스킬이 벼락같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책임감(S)]
대충 자기가 서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자 소예리 헌터의 스킬이 곧장 올라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시너지(A) 방음벽(S) 방음벽(S) 방음벽(S)]
세 개씩이나 한 번에 뜬 방음벽 스킬이 말하는 바는 확실했다.
‘안들림안들림안들림’
넌 닥치고 자라는 의미였다.
결국 잠시 후 신재헌의 스킬이 올라왔다.
[기분전환(A)]
저건 움직이면 풀리는 스킬이다.
요컨대 안 움직이고 자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자라, 자.”
그 사이 주이안 씨의 스킬이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 S급(힐러)
- 버프 : 시너지(A) 순간집중(SS) 안전지대(S)]
그도 잠들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득달같이 올라오는 소예리 헌터의 ‘불침번’과 ‘방음벽’ 스킬에 얻어맞기 시작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시너지(A) 방음벽(S) 방음벽(S) 방음벽(S) 방음벽(S) 방음벽(S) 방음벽(S) 방음벽(S)]
그리고 소예리 헌터가 방음벽을 7개쯤 겹쳐 쓰자 결국 주이안 씨의 스킬창에 스킬 하나가 떠올랐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 S급(힐러)
- 버프 : 시너지(A) 안정(S)]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결국 소예리 헌터의 ‘불침번’ 스킬만 남기고 모두의 스킬창이 조용해졌다.
소예리 헌터의 승리였다.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