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꿀잠 잤다.
눈을 떠도 세상이 까맣길래 잠깐 새벽인 줄 알았다.
이 기분 나쁠 정도로 상쾌한 느낌은 뭐지?
“어?”
난 푹신한 하늘……이 아니라 침낭을 젖히고 얼굴을 바깥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차가운 공기를 느끼기도 전에 짙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신재헌이었다.
“어우.”
난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반사적으로 침낭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갔다.
그러자 신재헌이 손을 뻗어 침낭을 슬쩍 걷었다. 그러더니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일어났어?”
“?”
짙은 푸른색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뭐야, 이 분위기?
내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푹 자서 그런지 몸에 힘이 좀 안 들어가는 것 같았다.
SS급 던전 공기에 눌려서 그런가?
다행스러운 건 여기가 특수규칙이 적용되는 던전이라 SS급 공포 디버프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마 공포 디버프까지 있었으면 훨씬 피곤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신재헌이 날 부축해주면서 말했다.
“이틀 만에 일어났어, 너.”
“?”
엥? 진짜?
난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신재헌의 어깨 너머로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 주이안 씨가 보였다.
그는 손으로 ‘X’까지 그려 보이고 있었다.
소예리 헌터가 소리 없이 포복절도하는 게 보였다.
얼씨구?
난 신재헌의 이마를 찰싹 내리쳤다.
“그딴 농담 할래?”
놀랐잖아! 내가 얼굴을 구기자 신재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빨리 일어나.”
이틀은 아니어도 오래 잔 건 사실인 듯했다. 벌써 동이 터오는 걸 보면.
그가 비켜서는 사이 난 그의 침낭을 정리해서 건네주었다.
그가 침낭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는 사이 난 몸을 풀었다.
“불침번 시간은요?”
그러면서 슬쩍 미안한 마음에 물었다.
진짜 잠 한 번 안 깨고 자는 바람에 뒤늦은 상쾌함이 몰려왔지만, 그와 미안한 감정은 별개였다.
어차피 RP에서 한 명이 랭크가 낮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침번 서는 건 사실상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말 한마디 없이 퍼질러 잤던 건 좀…….
내가 볼을 긁적일 때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없었어요. 중간에 소란이 좀 있긴 했는데.”
“소란이요?”
SS급 소란? 그런데도 나 안 깬 거야?
내가 멈칫하자 신재헌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찌나 잠버릇이 심하신지 침낭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나 또 낚인 거임?
난 그 말에 인자하게 웃어 주었다.
“느그스슨승스즈믄드즌으.”
나가서 신상 사주면 되잖아!
***
새벽은 조용했고 아무 일도 없었으며, 난 평범하게 8시간만 잤다고 했다.
아침부터 신나게 낚인 내가 신재헌을 쏘아보는 사이, 우리는 저택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경비병한테 안 들키고 갈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당연히 근처 경계도 심해졌다.
우릴 발견한 경비병이 우릴 공격했는데, 우리가 저 한가운데에 굳이 나가야 할까요?
하지만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필 던전의 이름이 저택의 손님이었으니까.
“우리 손님 맞긴 한 거죠?”
내 질문에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초대장을 주진 않았을 거예용!”
근데 이 동네 손님 대접이 왜 이래?
“일단 던전 진행을 위해서는 접근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주이안 헌터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재헌이 말을 받았다.
“일단 들이대보고 공격하는 것 같으면 튀어서 다른 방법 생각해 보죠.”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책임감(S)
- 디버프 : 저택의 강력한 규율(L) 감시(L) 경고1(L)]
가벼운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의 스킬창엔 책임감 스킬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일행의 선두에 있을 때 받는 데미지가 감소하는 스킬. 하지만 일행의 선두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받는 데미지가 커진다.
이 스킬을 쓴다는 것은 여차하면 공격을 받아내겠다는 뜻이었다.
그에게 몇 가지 버프가 더해진 후 우리는 천천히 저택으로 다가갔다.
한 손에는 초대장을 든 채였다.
“!”
우리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연미복을 입은 집사처럼 보이는 자였다.
설마 댁도 우리한테 뭐 집어 던지는 거 아니지?
“어서 오십시오.”
잠깐의 긴장 끝에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럴 거면 아까 그 경비병은 왜 공격한 거야?
“손님들이 더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가문은 집사도 모르는 초대장을 마구 발부한단 말인가?
황당한 일 처리로 정신을 쏙 빼놓은 집사는 우리에게 당연하다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소지하고 계신 무기는 저희에게 주시면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집사의 시선이 내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가리켰다.
에페와 함께 박살 난 수룡의 가시비늘 대신 들고 있던 에델바이스 가의 검이었다.
이거 내놓으라고?
이걸 줘도 인벤토리에 무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체육선생님의 목검(SS+)]
랭크 차이 때문에 제대로 못 쓴다는 게 문제지.
“…….”
SS급 던전에서 무기를 회수당하라고?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여기 있습니다.”
각자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고 검을 하나씩 꺼냈다.
한두 번 뺏겨보냐?
‘RP던전 제출용’으로 미리 맞춰 만들어 인벤토리에 항시 준비해 두는 검들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세 자루의 검이 검집째 나란히 앞으로 내밀어졌다.
소예리 헌터나 주이안 헌터가 검을 쓰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무기만 주면 되니까.
물론 ‘헌터 신유리’의 인벤토리가 없는 나는 그냥 옆에 찬 에델바이스의 검을 건네주었다.
“분명히 받았습니다.”
집사는 검을 받아 기사들에게 건넨 후에야 안심한 얼굴로 우리 앞에서 비켜섰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메이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벤토리에 여전히 무기를 넣은 채 당당하게 메이든에 입성했다.
***
집사를 따라 들어선 저택은 묘한 분위기였다.
일단 손님을 본 사용인들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우리를 소 닭 보듯 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나 하면, 놀라 누군가에게 이르러 가는 사람부터, 그냥 손님처럼 모셔 주는 집사 같은 사람까지 가지가지였다.
더불어.
“그럼 앞서 오신 네 분은……?”
“안주인께서 부르신 분들이시겠지.”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자 하니, 동제국 사람들은 이미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던 듯했다.
근데 경고를 네 명 합쳐서 5번이나 받다니 대체 뭘 하고 다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리고.
“먼저 간단히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주이안 씨가 집사의 말에 대표로 답하는 사이.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더 들어 보니 저택 내부의 사정은 예상보다 좀 더 복잡한 듯했다.
“그럼 저분들은 리펜 님의 손님이시구나.”
“그러게. 분위기가 안 좋아지겠어.”
“얘, 눈 마주치지 마.”
리펜이 누군지는 몰라도 안주인하고 사이가 별로 안 좋은 듯했다.
설마 우리 부부싸움에 끼인 거야?
품위 따진다면서 부부싸움 하세요?
아니 물론 부부생활이 늘 마음대로 풀리진 않겠지만 사용인들은 품격 안 따져요?
황당해서 팀원들을 돌아보니 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
눈이 마주친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하는 동안, 우린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매우 당황스러운 모습과 마주해야 했다.
“간단히 준비해보았습니다.”
앉으라는 듯 가볍게 손짓하는 집사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눈앞의 광경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지 않는 듯했다.
“오.”
식탁을 본 소예리 헌터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신재헌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이안 씨도 조금 놀란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우리를 위해 준비했다는 식기며 앞접시들은 모두…….
“……아동용?”
내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을 텐데도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동으로 보여????
당연히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도 애들이 먹을 만큼 조금이었다.
간단한 식사라더니 너무 간단한 거 아니냐?
경비병이 사람 찌를 때부터, 아니 마차가 4인용일 때부터 알아봤지만 손님 모시는 매너가 남다른 격조 있는 집안이 분명했다.
이건 또 무슨 고품격 엿 먹이기예요?
난 그렇게 묻다가 경고를 받는 대신 주이안 씨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런 품격 있는 상황에 잘 대처하는 주이안 씨도 이건 좀 당황스러웠는지 멈칫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시스템창이 불쑥 떠올랐다.
[식사예절에 맞게 식사하세요.]
식사예절?
일단 사용인들에게 이끌려 앉으면서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예절? 뭐?
먹을 때 떠들지 말라고? 아니면 어른보다 먼저 수저 들지 말라고? 어른 수저 놔 주라고?
그것도 아니면 식사 속도 맞추라고?
이건 너무 K-식사예절인가?
이 동네 예절을 알 리가 없으니 섣불리 식기로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식사’를 시작합니다.]
그때 시스템창이 다시 떠올랐다. 마치 밥 먹여줄 것처럼 친절한 시스템창에 멈칫한 순간.
―파파파팟!
눈앞에 푸른색의 시스템창이 커다랗게 떠오르더니, 여덟 개의 식기를 나란히 띄워 보였다.
[지정된 식기로 순서에 맞춰 식사하세요.]
먹을 걸로 이럴 거야?
[다섯 번째 나이프와 첫 번째 포크를 들어 주세요.]
―달칵.
다 같은 시스템창이 뜨는지 우리 넷은 똑같은 걸 집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섯 번째 나이프를 내려놓고 여섯 번째 나이프를 올려 주세요.]
“?”
―탁, 타탁.
일사불란하게 나이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마자 다시 시스템창이 떴다.
[양손의 식기를 모두 내리고 스푼을 들어 주세요.]
리듬게임이 아니라 청기백기였냐? 청기 올렸다가 백기 내리지 말고 청기 내려?
시스템창을 볼수록 열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사람이 밥 먹을 땐 건드리면 안 되지! 나도 모르게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음…….”
주이안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밍 같기도 한 낮은 음색의 그 목소리에 멈칫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소예리 헌터와 신재헌도 멈칫하는 게 보였다.
우리 셋 다 생각은 똑같은 듯했다.
여기서 욕 박으면 안 된다!
그렇게 자제를 모르는 짐승 세 마리와 사육사 주이안의 살벌한 식사시간이 시작되었다.
―달칵.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게 맛있는 음식에 감동받은 지 10분 만에, 나를 포함한 세 마리 짐승에게 또 다른 시련이 내려졌다.
“생각보다 식사예절이 좋으시군요.”
그건 식사를 끝내고 나가려는 우리 앞에 별안간 떨어져 내린 집사의 한마디였다.
생……각……보……다?
요컨대 우리 식사예절이 개판일 줄 알았다는 소리?
“…….”
“…….”
“…….”
나와 신재헌과 소예리 헌터가 나란히 우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