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타닥, 탁.
불꽃이 고즈넉한 소음을 냈다.
“…….”
넷 중 셋이 잠든 시간, 신재헌은 그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는 말레티아의 검을 대충 바닥에 꽂아 놓은 채였다.
다른 검이었다면 날이 상하니 쉽게 하지 못할 장난이었지만, 말레티아의 검은 SS+급 아이템답게 날이 상하는 법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검이 꿰뚫고 베는 것들이 이런 땅보다는 딱딱한 것들이었으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불꽃을 바라볼 때였다.
“유리 헌터님 시간인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재헌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안 깨우려고요.”
그의 옆으로 눈을 비비면서 다가온 건 소예리였다.
침낭을 인벤토리로 던져 넣은 그녀가 하품을 했다.
“왜요? 랭크 때문에?”
SS급 던전에서 불침번을 서기에 B급은 너무 낮아서 그러느냐는 뜻이었다.
물론 신유리가 B급으로 던전에 들어온 이상, 그녀의 불침번 시간은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대신 서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끝난 뒤였다.
“……제가요?”
그 말에 신재헌의 시선이 소예리에게 돌아갔다.
소예리는 방금 잠에서 깬 사람답지 않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에는 잠기운이 조금 있는 듯했지만 금방 깰 터였다.
“응, 신재헌 헌터님이.”
―털썩.
소예리가 그의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제가 그러면 안 되죠.”
랭크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할 때부터 C급인 신재헌을 데리고 위험을 감수했던 신유리였다.
그녀가 잠시 B급이 되었다고, 신재헌이 그녀를 무시할 리가 없었다.
“피곤한 것 같아서 그냥 안 깨우려고요.”
“오늘 쌩쌩해 보이던데?”
소예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신유리를 돌아보았다.
원래 인벤토리가 없는 탓에 신재헌의 침낭을 빌린 그녀는 고롱고롱 단잠에 들어 있었다.
“피곤한 날엔 뒤척이면서 자잖아요.”
신재헌은 신유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 말대로 신유리는 침낭이 아니라 침낭의 탈을 쓴 애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소예리가 픽 웃었다.
“나중에 다른 던전 가서 불침번 잔뜩 서라고 해요.”
신재헌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요. 밑지고는 못 살잖아요, 제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소예리는 그런 그를 보다가 작게 웃었다.
“진짜 그럴 거예요?”
잠이 완전히 깬 그녀는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불꽃 사이를 쑤셔 댔다.
―탁, 타탁.
신재헌은 그녀가 내는 작은 소음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아내는 걸 못 봤는데~?”
소예리의 눈이 장난기로 예쁘게 접혔다.
신재헌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소예리는 불쑥 물었다.
“신유리 헌터님 좋아하죠?”
그 말에 신재헌은 답보다도 먼저 신유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깰까 봐 걱정하진 말고요. 실컷 뒤척이면서 잘 자고 있잖아.”
소예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결국 소리 없이 웃었다.
“티 나요?”
그 말에 소예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티 내는데 못 알아채면 이상하지~”
소예리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신재헌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왜 신유리만 모르지?”
그 말에 소예리의 웃음소리가 좀 더 커졌다. 신재헌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신유리는 그때까지도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주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친구 같아서 그래요.”
그 말에 신재헌이 다시 소예리를 돌아보았다. 소예리가 말을 이었다.
“너~무 친구 같아서, 다른 사이로 안 보이는 거야. 그리고 유리 헌터님은…….”
소예리는 신유리를 돌아보았다.
소예리와 신유리.
한국의 집에서도 두 사람은 자주 따로 시간을 가지는 편이었다.
가장 자주 서로의 방에 들락거리는 사람이기도 했고, 서로의 방에 장난을 쳐 놓기도 했다.
소예리는 신유리의 방 책장에 꽂혀 있던 중학교 졸업 앨범을 생각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헤어지는 거 싫어하잖아요. 변화도 싫어하고.”
신재헌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헤어지는 걸 싫어하는 거야 알았지만 변화를 싫어한다고 보기엔, 신유리는 지나치게 버라이어티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처음 보는 건 해 봐야지!’
‘원래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삽질해 봐야 나중에 쪽 안 당하는 거야.’
그러면서 처음 보는 것에 달려들기를 주저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좋은 건 집에 들여 놓았다.
그래서 집에는 신유리가 만들어 놓은 온갖 것들이 있었다.
L급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는 집 베란다를 미니 카페로 만들겠다며 손수 의자를 만들다가 다리 몇 개를 부러뜨려 먹기도 했다.
……그런데 변화를 싫어해?
신재헌의 표정을 보던 소예리가 불쑥 물었다.
“사랑에 결말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신재헌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결말이 굳이 있어야 돼요?”
“있다면.”
소예리가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다가 은근히 물었다.
“결혼? 아니면…… 이별?”
그 말에 신재헌은 고개를 저었다.
“행복이겠죠.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을 해 주는 것.”
그의 말에 소예리는 옅게 웃었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유리 헌터님은 다를 수도 있어요.”
신재헌은 소예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녀가 불꽃 사이를 쑤시던 나뭇가지를 꺼냈다.
나뭇가지 끝에 불이 붙은 걸 보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친구 관계랑은 달라지는 거잖아. 연인이 되면 지금과는 다른 관계가 되고, 좀 더 각별해지고, 좀 더 마음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그녀가 나뭇가지를 하늘 이곳저곳으로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사라지면 견딜 수 없이 큰 변화가 닥쳐오는 거예요.”
그 말에 신재헌은 단언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나는 그러기 위해 매 순간 간절하게 살아왔으니까.
소예리는 그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누군가와 깊이 친해지면, 그럼 어쩌면, 아주 어쩌면 우리 네 명이 틀어질지도 몰라.”
그녀는 불붙은 나뭇가지에서 불이 점점 제 손 가까이로 옮겨붙는 걸 보다가, 나뭇가지를 불꽃 속으로 아예 쑤셔 넣어 버렸다.
“우리 팀도, 신재헌 헌터님과의 관계도 달라질지도 몰라요.”
“안 그럴 겁니다.”
내가 그렇게 해요. 그 애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데, 내가 그렇게 만들 리가 없잖아.
신재헌은 단단한 결심이 담긴 시선으로 소예리를 돌아보았다.
소예리가 빙그레 웃었다.
“누군가는 확신을 갖죠. 하지만 유리 헌터님은 아직 무서운 거야.”
그녀가 두 다리를 모아 안은 채 말했다.
“그래서 애써 무시하는 거예요. 신재헌 헌터가 좋아하는 걸 알아도 모른 척할 거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 같아도 그럴 거고. 지금은 아마…….”
그러다가 신유리를 돌아보았다. 신유리는 아까와는 또 다른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무의식중에 모른 척하고 있지 않을까?”
그 말에 신재헌은 답할 수가 없었다.
신유리, 그가 아는 그녀는 눈치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팀의 존속에 더 신경을 쓸 사람이었다.
“…….”
그래, 맞아요. 신재헌이 뇌까렸다.
신유리는 변화를 싫어하지.
저 애가 집 베란다를 갈아엎거나, 전망은 트인 게 최고라면서 집 앞을 밀어 버린다거나, 뜬금없이 여행 일정을 잡는 건.
“…….”
그는 눈을 감았다. 그는 제 착각을 인정해야 했다. 한 군데에 시선이 박혀 미처 보지 못했던 주변이 이제야 보였다.
그건 신유리에게 변화가 아니었다.
사는 곳이 바뀌고 존재하는 공간이 달라지는 것 정도는 그녀의 세계에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녀의 세계는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기에.
그들과, 헌터팀과 지금과 같은 관계만 가지고 있다면 그녀는 변화 없는 세상에서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게이트가 열렸을 때, 가족으로 만들어져 있던 그녀의 세계가 무너졌던 것처럼 거대한 변화는 오지 않을 테니까.
신재헌이 소예리를 돌아보았다.
“…….”
이제 신재헌이 잠들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이 되레 깨는 걸 느꼈다.
“소예리 헌터님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에.”
소예리는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발끝으로 천천히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타닥, 탁.
신재헌은 가만히 그런 그녀를 보다가, 불쑥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소예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뭘요?”
하지만 신재헌은 그녀가 짓궂다고 생각했다.
다 알고 계시면서.
그가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러자 의아함을 가장하고 있던 소예리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
“나한테 확인받고 싶어요? 누가 가능성이 높은지?”
역시 다 알고 계시는군.
신재헌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아셨을까? 암살자를 쫓던 날 하늘에서 나를 보았을 때?
아니면…….
그는 신유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이안을 생각했다.
네 명이 함께 있는데 세 명이 이러고 있으면 다른 하나가 모를 리 없다.
그리고 애초에 소예리 헌터는 눈치 없는 사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이마를 짚었다.
“……늘 죄송합니다, 정말로.”
하지만 이게 마음대로 안 돼요. 그가 뇌까리는 말에 소예리가 깔깔 웃었다.
“난 신경 안 써요. 엔딩만 잘 나면 돼.”
그녀가 어서 자러 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하지만 신재헌은 일어나지 않았다.
끝내 답을 듣고 싶다는 듯이.
잠시간의 침묵 후에 소예리가 물었다.
“진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해요? 신유리 헌터님이 둘 중에 누굴 더 좋아하는지?”
그 말에 신재헌은 답 대신 소예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예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몰라요. 나랑만 있을 때도 그런 이야기는 안 하니까.”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신유리 헌터님은 그런 이야기 할 사람도 아니잖아요. 특히 헌터팀 상대로.”
무엇보다 관계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그녀가 그 주제로 이야기를 먼저 꺼낼 리가 없었다.
바닥을 톡톡 두드리던 소예리의 발끝이 조금 느린 박자를 이루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딱 듣기 편안할 정도의 소리였다.
“난 다른 건 모르겠고 우리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그녀의 발끝이 멎었다.
팀을 아끼는 사람은 신유리 헌터님뿐만이 아니니까.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불편해 보여서요. 거추장스러워요?’
언젠가 보았던 교복 차림의 신유리를 생각하면서.
유난히 따가운 햇살이 들어오던 날.
창가 커튼을 쳐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도 너무 미안해서, 하염없이 창밖만 보던 날에 봤던 신유리는 선뜻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뇨, 예뻐요.’
그 마음이 너무 예뻐 보여서, 예민하던 그때에도 신유리를 내칠 수가 없었다.
소예리가 옅게 웃었다.
과거를 생각하던 그녀가 신재헌을 돌아보았다.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리죠?”
“아뇨.”
신재헌은 고개를 저었다. 소예리가 다시 불꽃을 돌아보았다.
어두운 곳에 있던 자신에게, 이 불꽃처럼 환하게 다가왔던 어린 신유리를 생각하면서.
“잘 생각해 봤는데, 난 신유리 헌터님한테 붙어있기로 했어요.”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검지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잘 봐요. 둘 다 결국 신유리 헌터님이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검지가 그와 주이안을 가리켰다.
“신유리 헌터님만 행복하면 셋 다 해피엔딩이지.”
신재헌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소예리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속 곪아 가면서 혼자 땅 파지만 마요. 속에서 생각 굴려서 엉뚱한 결론 내는 것만큼 감정 문제에서 난감한 게 없으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아주 잠깐, 그렇게 가라앉았던 목소리는 어느새 다시 장난기를 담아냈다.
“싸우지만 마요. 난 재밌게 구경하고 있으니까. 알았죠?”
신재헌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네. 조카 보는 표정이신데.”
“따지면 조카 맞지, 뭐.”
내가 마음으로 키웠다! 소예리가 두 손을 모아서 작게 외쳤다. 신재헌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안 깨, 안 깨.”
소예리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의 등을 팡팡 쳤다.
그때였다.
―바스락.
신유리 쪽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크게 났다.
“!”
두 사람은 숨도 못 쉬고 뒤를 돌아보았다.
제 침낭보다 큰 침낭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신유리는 아예 신재헌의 침낭에 쏙 들어가 있었다.
“…….”
신재헌과 소예리는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하던 사람들처럼,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비밀스러운 새벽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