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가자!”
경비병들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갔다.
다행히 수색 관련 스킬이 정말 없었던 듯했다.
신재헌처럼 추적 스킬을 갖고 있는 경비병들이었으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튀어나오는 건 다 적으로 간주할게요.”
신재헌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말레티아의 검을 든 채였다.
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주변을 경계하며 저택으로 다가갔다.
대로가 아닌 숲 쪽을 통해 가려고 보니 속도가 좀 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냐, 우리가 마차가 아닌데!
“마차 탔어야 했나?”
난 던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그 후회는 몇 초 만에 쏙 들어갔다.
[현재 파티에 경고를 받은 사람은 5명입니다.]
시스템창이 마차를 타고 간 동제국 팀의 상태를 친절하게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신재헌 헌터님만 받았죠?”
“그럼 저쪽은 네 명이 다 받았다는 거네?”
내 말을 받은 소예리 헌터가 깔깔 웃었다.
“보나마나 마부 변신이야.”
“마차 변신일지도 몰라요.”
신재헌이 말을 받았다.
저쪽도 만만치 않게 험난한 공략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그렇게 몇 시간을 갔을까.
“곧 해지겠는데요?”
난 노릇노릇 익어가는 하늘을 가리켰다. 그때까지 저택은 아주 조금 가까워진 상태였다.
“원래 이렇게 멀었나?”
분명 몇 시간이면 도착할 만한 거리 같았는데?
내가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주이안 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택이 일정 시기부터 전혀 가까워지지 않아요. 정상적인 거리에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던전 진행상 이쯤에서 쉬어야 하나 본데요?”
신재헌도 같은 의견인지 저택과의 거리를 재어 보며 말했다.
“그으럼 일단 잘 데부터 찾을까요?”
소예리 헌터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물론 몇 시간 전 동제국 사람들이 영양가 없게 주변을 둘러본 것과는 달리 날카로운 눈이었다.
던전 돌면서 노숙이 하루 이틀도 아니니 익숙한 게 당연했다.
“저택에 초대받았는데 늦게 들어가도 될까요?”
문제는 던전 진행이 어떻게 되느냐는 점이었다.
내 말에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찍 오길 바랐으면 손님용 마차를 더 보냈겠죠. 그리고 이미 손님 몇 명은 가 있기도 하고.”
하긴.
그때 시스템창이 불쑥 떴다.
[파티의 누군가가 경고를 받았습니다!]
“또?”
가만히 있는 우리 넷이 아니면 동제국 쪽이 경고를 받은 게 분명했다.
아까 경고를 받은 사람의 숫자가 뜬 후.
시스템창은 누군가 경고를 받을 때마다 친절하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아마 입장 인원 전체의 경고가 몇 회 이상이면 뜨게 되어 있었던 듯했다.
그 후로 두 번은 더 뜬 것 같았다.
아주 신나는 좌충우돌 공략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쯧쯧.
역시 마차는 타는 게 아니었다니까?
“그럼 일단 불 피울 것부터 찾아볼게요.”
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리를 찾은 소예리 헌터가 결계 스킬을 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 둘씩 움직이기!”
그러다 말고 벼락같이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서 다른 결계 스킬을 쓰던 주이안 씨가 날 돌아보았다.
“제가 같이 다녀올게요.”
그때 신재헌이 내 옆에 다가와 섰다. 확실히 이럴 땐 딜러끼리 기동성을 확보하는 게 나았다.
하루 이틀 하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주이안 씨도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자.”
난 신재헌의 등을 툭 쳤다.
***
“SS급 던전이라고 감추기 천 너머로 꿰뚫어 보진 않겠지?”
감추기 천.
야외에서 노숙할 일이 많은 던전에선 필수 아이템이었다.
아무리 S급 헌터라도 불이 있는 곳에서 자는 것과 없는 곳에서 자는 건 컨디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뜨끈하게 자겠다고 불 피웠다가 주변 몬스터들에게 빛과 연기를 다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때를 대비해서 나온 게 바로 던전용 감추기 천이었다.
불빛과 연기, 냄새는 어느 정도 흡수하되 열기는 내보내서 주변 몬스터들에게 불을 피운 걸 들키지 않게 하는 천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넷 다 퍼질러 잘 순 없다. 경계용 스킬도 충분히 쓰고 불침번도 서야 했다.
“나뭇가지는 이만하면 됐고.”
난 팔 아래에 나뭇가지 다발을 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재헌도 비슷한 꼴로 인벤토리에서 라이터를 꺼내고 있었다.
던전용 라이터였다.
“그럼 가자.”
내가 손짓했을 때였다. 신재헌이 멈칫하고 멈춰 섰다.
“왜?”
돌아보니 신재헌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디버프가 걸린 건 아닌 것 같고. 설마 ‘품위를 위해서 숲에선 불을 쓰지 마십시오.’ 같은 어이없는 시스템창이 뜬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이고 어이없는 문제였다.
―탁.
신재헌이 던전용 라이터를 당겨 보더니 말했다.
“기름 다 떨어졌나 본데?”
“오.”
던전 들어오기 전에 입던용 아이템 체크는 필수로 했던 신재헌이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더니.
실화냐? 그를 돌아보았다.
“……일단 가자. 불이야 어떻게든 붙일 수 있겠지, 뭐.”
그도 좀 당황했는지 떨떠름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화염검으로 불붙이게?”
이놈이 화(火)계 헌터라고 불 귀한 줄을 모르네?
내 말에 신재헌이 잠깐 미간을 좁혔다.
“……범위 축소해도 텐트 날아갈걸?”
왜 심각한가 했더니 정말 붙여볼 생각 하고 있었냐!
“지금쯤이면 텐트 다 설치했을 거 아냐.”
신재헌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 작업 하고 있을 시간이지.”
미리 불붙여서 가야 하나? 그럼 텐트 대신 숲이 날아갈 텐데?
아니지.
“야, 휘두르지만 않으면 되잖아. 이따 말레티아의 검 끝에 불만 붙여봐.”
SS급 화염검 스킬을 이렇게 쓰는 놈들이 있다?
“성냥이냐, 내가?”
신재헌도 황당한 듯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스킬이 다양하게 쓰이면 좋은 거지.”
신재헌이 불속성 스킬이 있기 때문인지, 온갖 스킬이 다 있는 소예리 헌터도 불속성 스킬은 없었다.
불을 붙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예상대로 텐트가 다 지어져 있었다.
인벤토리에서 던전용 식량도 꺼내서 쌓아놓은 채 소예리 헌터와 주이안 씨가 수다를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정확히는 주이안 씨가 시달리고 있었다.
―우웅!
그 주변으로 다가가자 소예리 헌터의 방음 결계 스킬이 반짝이며 우리를 반겼다.
경계 스킬을 철저하게 깔아놓으면서 주변 탐사도 마쳤을 거고, 두 사람이 저렇게 있다는 건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뜻이리라.
“가 위 바 위 보!”
소예리 헌터가 손을 내밀자 주이안 씨가 곤란한 듯 주먹을 내밀어 보였다.
소예리 헌터가 내민 것도 주먹이었다.
“비겼네요. 다시―”
“아니죠.”
소예리 헌터는 별안간 주먹에서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그러더니 뻔뻔하게 주장했다.
“이건 라이터예요, 주이안 헌터님.”
“네?”
“불 방금 붙인 건뎅.”
소예리 헌터가 빙그레 웃었다. 주이안 씨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라이터 같은 게 어디 있―”
“우리 동네는 라이터라는 게 있었다니까?”
“저희 동네에는 없었습니다.”
“우린 있었다니까요? 쓰읍.”
소예리 헌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라이터면 다 이길 수 있어요. 불태우면 되니까!”
그 말에 주이안 씨는 의아한 얼굴로 의문의 가위바위보 규칙을 해석하려고 했다.
“라이터가 다 이길 수 있다고요? 그럼 바위랑 가위도 불타는……?”
논리적인 접근에 소예리 헌터가 미간을 좁혔다.
“으음, 가위는 녹이면 되고 바위는……. 아!”
그러더니 불쑥 이쪽을 가리켰다.
“저기 바위 태울 수 있는 던전용 라이터 온다!”
가리켜진 신재헌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그가 텅 빈 던전용 라이터를 던졌다 받아 보였다.
“기름 떨어졌는데요.”
그 말에 소예리 헌터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가 이겼네요.”
주이안 씨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소예리 헌터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봐요. 저기 인간 라이터 있잖아요.”
그러더니 뻔뻔하게 신재헌을 돌아보았다.
“화염검으로 바위랑 가위도 녹일 수 있죠?”
그 말에 신재헌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긴, SS급 스킬 성냥으로 쓰는 것도 영 아니올시다인데 가위랑 바위 녹이는 데 쓰라고 하는 건 좀―
“따지자면 전 라이터보단 화염방사기죠.”
취급이 문제였냐!
“아무튼 라이터는 아니라고 하시네요.”
그 말에 소예리 헌터가 머리를 싸맸다.
“윽.”
뭘 했길래 가위바위보에 저렇게 열을 올려?
“내기했어요?”
―탁.
난 두 사람 옆에 나뭇가지 무더기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소예리 헌터가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주이안 씨가 옅게 웃었다.
“그럼 이따가 ‘특단의 조치’ 드시는 거예요.”
그 주이안표 던전산 영양수프? 난 소예리 헌터를 돌아보았다.
어디 아파서 먹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주이안 씨의 말에 소예리 헌터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내가…… 먹이려고 했는데…….”
그녀가 머리를 싸맸다.
“만든 사람도 그거 먹으면 얼굴 구길 수밖에 없을 거라니까? 냄새부터 심상치 않았다고요!”
“저는 잘 먹습니다.”
주이안 씨는 반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보여줘!”
“가위바위보 지면 보여드리기로 했잖아요.”
소예리 헌터의 외침에도 그는 꿋꿋했다.
“데워서 먹으면 좀 더 맛있어요. 그니까 비켜 봐.”
보조계라고 던전산 도라지 사다 바칠 때부터 알아봤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을! 크하하하!
난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예리 헌터를 쿡쿡 찔렀다.
“왜, 뭐, 왜.”
소예리 헌터가 입을 비죽이며 비켜났다.
나와 신재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로 다가갔다.
“?”
주이안 씨와 소예리 헌터가 의아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동안, 나뭇가지를 정성스럽게 쌓기 시작했다.
“……불을 그렇게 대대적으로 붙여야 해요?”
소예리 헌터가 황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나와 신재헌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화염검(SS)
- 디버프 : 저택의 강력한 규율(L) 감시(L) 경고1(L)]
말레티아의 검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
이때쯤 되자 소예리 헌터는 뭘 하나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주이안 씨는 도저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불.”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신재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늘로 치켜세운 말레티아의 검 끝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화르륵!
검 끝에 불꽃이 생겨났다.
“나나나이스! 그대로 있어!”
난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성화 봉송하는 사람처럼 경건하게 불꽃에 갖다 댔다.
“왜 불을 그렇게― 아.”
주이안 씨는 그제야 우리가 라이터 기름이 떨어졌다고 했던 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가 이마를 짚는 사이 소예리 헌터가 박장대소했다.
물론 박장대소한다고 소예리 헌터님이 ‘특단의 조치’를 마시는 것을 피할 순 없었다.
“따뜻하게 드시라고 준비했어요.”
“윽.”
소예리 헌터의 얼굴이 던전산 영양수프 색으로 변했다.
난 내가 지금껏 먹었던 끔찍한 수프 맛을 생각하면서 소예리 헌터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