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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26)화 (126/218)

126화

우리는 품격에 주의할 것을 새삼 다짐하며 다시 풀숲 속으로 들어갔다.

대로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걸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정원의 훼손 정도는 점점 심해졌다.

“흐음.”

이 동네 와서 본의 아니게 귀족가 정원을 좀 봐서 아는데, 이렇게 망가져 있는 정원을 내버려두면 정원사가 실직하게 된다.

다른 세 명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더불어 소예리 헌터는 눈을 반짝이면서 추가 의견도 내놓았다.

“이렇게 된 지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끝이 다 말라비틀어져 있잖아. 봐봐.”

소예리 헌터가 죽은 식물의 줄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갈색으로 말라비틀어진 줄기는 과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누가 잡아 뽑은 흔적하고 밟은 흔적 같은 게 있는데.”

나는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줄기는 확실히 누가 예리하게 베었다기보다는 힘줘서 잡아 뽑은 흔적이 나 있었다.

그 주변 바닥은 식물하고 척진 사람이라도 있는지 꾹꾹 눌려 밟혀 있었다.

“손으로 쥐어뜯은 것 같죠?”

소예리 헌터가 내 옆에 쪼그려 앉더니, 손으로 줄기 위 허공을 잡아 보였다.

“이렇게. 이얍!”

그녀가 줄기를 뽑는 시늉을 해 보였다. 누가 봐도 힘들어 보이는 자세였다.

“제대로 뽑으려면 뿌리 근처를 잡아 뽑지 않았을까요?”

난 중간부터 뜯겨 있는 식물을 가리켰다. 주이안 씨가 그걸 보다가 말했다.

“식물을 채취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화풀이였다면 뿌리 근처만 잡아 뽑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그야…… 그렇긴 한데. 내가 머리를 긁적일 때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추적(A)

- 디버프 : 저택의 강력한 규율(L) 감시(L)]

신재헌의 스킬창에 추적이 떴다가 사라졌다.

주변에 살기의 흔적이 없음을 확인한 듯, 그가 좀 편안한 표정으로 식물을 가리켰다.

“어린애가 뽑은 거 아니에요? 저도 어릴 때 풀 뽑고 다녔다던데.”

그걸 왜 뽑아?

“어려서부터 딜러의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으셨나 보네요.”

내 말에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신유리 헌터님도 해마다 강낭콩 하나씩 죽이지 않으셨어요?”

어쭈, 과거를 끌고 오시겠다?

“그건 내가 죽이려고 잡아 뽑은 게 아니라―”

“화분에서 아무것도 안 난 거죠.”

신재헌이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았다.

웃는 낯엔 침 못 뱉는다던데 난 기꺼이 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낯 바이 낯 아니겠습니까?

“싹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 사랑은 충분히 줬다고요.”

우리의 설전이 오가자 소예리 헌터와 주이안 씨의 고개가 나란히 우리 사이를 오갔다.

이 얘기 안 했던가? 처음 듣는 것처럼 너무 흥미롭게 쳐다보시네?

“자, 생각해 보세요.”

내가 손을 펼쳐 보였다.

달변가 신유리 입장!

“학교에서 키우는 화분이니까 밤새 못 보잖아. 그니까 밤에 물 잔뜩, 아침에 물 잔뜩 주고, 쉬는 시간마다 물 주고, 점심시간엔 나도 배고프니까 물 줬죠.”

내 말이 이어질수록 주이안 씨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럼…….”

“뿌리가 썩었겠는데?”

소예리 헌터가 불쑥 팩트를 내리꽂았다.

난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전 신재헌 헌터님과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생명을 소중히 다뤘다는 거죠.”

암.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화분에서 뭐가 나긴 났었죠. 저랑은 다르게.”

그러더니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강낭콩을 심어도 봉숭아를 심어도 버섯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아오.”

저걸 콱! 남의 흑역사 파지 말랬지!

내가 주먹을 들어 보이는 가운데 소예리 헌터가 음소거로 웃기 시작했다.

또 품위 어쩌고 할까 봐 신경 쓰시는 게 분명했다.

주이안 헌터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게 보였다.

“신유리 헌터님 앞으로 오는 선물을 제가 관리하는 게 정말 다행이군요.”

그는 간간이 헌터 협회를 통해 내 앞으로 오던 화분들을 생각한 게 분명했다.

저도 이제 어지간한 식물이 하루에 2L씩 안 마신다는 건 알거든요?

내가 인자하게 웃는 사이 신재헌은 주변을 다시 살폈다.

그러고는 확신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어린애가 뽑은 건 맞는 것 같아요. 높이도 그렇고 잡아 뽑은 모양도 그렇고.”

그가 식물을 가리켰다.

난 그 주변에 나 있는 족적을 보면서 말했다.

“싸운 흔적도 아닌 것 같죠?”

꾹꾹 밟혀 있는 걸 보고 처음에는 싸운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잠깐이었다.

싸울 때 날 법한 강하고 짧은 족적이 없었다.

일부러 지르밟은 흔적이 좀 있긴 한데, 그것도 전투를 했다고 보기엔 애매했다.

“족적이 확실히 작기도 하고요.”

주이안 헌터가 내 말을 받았다.

그가 손으로 가장 진하게 남은 족적의 크기를 재어 보더니 말했다.

“어린아이의 발자국이 확실합니다.”

“이 근처에 있으려나?”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이라곤 주변에 저택밖에 없는데, 그 저택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근데 여기 어린아이의 흔적이 있다는 게 좀 수상한데.

“살기는 안 느껴지는데, 아직 적하고 마주친 게 아니라서 추적이 제대로 발동하진 않네요.”

신재헌의 눈이 다시 파랗게 반짝였다가 돌아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이.”

소예리 헌터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몬스터로도 나오는 게이트다. 게다가 여긴 SS급 이상의 난이도를 가진 던전.

아무리 생긴 게 어린아이여도 주먹 한 대에라도 스쳤다간 갈비뼈가 가루가 되는 수가 있었다.

‘…….’

난 지난 RP던전에서 날 살벌한 시선으로 돌아보던 김천재(SS+)를 생각했다.

어우.

내가 두 손으로 팔을 문지를 때였다.

“어쨌든 계속 가 보죠.”

몬스터만 피하면 된다.

우린 손님이니까 저택 사람을 최대한 빨리 찾아서 저택으로 들어서는 게 급선무였다.

“초대장은 다들 잘 갖고 있죠?”

사실 설명문 같긴 하지만 아무튼 이름이 초대장이니 저택에 들어가는 데에는 필요할 터였다.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갑시다.”

경비병이든 뭐든 마주쳐서 보여주면 마차든 뭐든 가져오겠지, 뭐.

“얼른 누구든 나와라.”

이걸 걸어서 가라는 건 오버 아니냐?

이게 손님 대하는 태도야?

껄렁한 걸음으로 숲을 얼마나 가로질렀을까.

―사락, 사락.

날카로운 눈으로 풀숲 이곳저곳을 헤치며 순찰하는 순찰병이 보였다.

“오.”

저깄다!

“……!”

마침 경비병 쪽에서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우리에게 경계하며 다가왔다.

“당신들은?”

경비병은 우리를 수상하게 보는 듯했다.

하긴, 나라도 멀쩡한 대로에서 마차 타는 대신 숲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경계할 것이다.

“메이든 저택에 초대받아서 왔습니다.”

우리 파티의 품위를 담당하는 주이안 씨가 대표로 초대장을 들어 보였다.

초대장답지 않은 규칙이 잔뜩 쓰여 있긴 하지만 어쨌든 겉보기에는 초대장이었다.

……근데 보통 저택에 사람 초대해서 규칙 지키라고 갈구면서 안내인 하나도 안 보내나?

4인 던전도 아닌데 마차는 4인용 한 대만 보내고?

내가 눈썹을 치켜올린 순간이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추적(A)

- 디버프 : 저택의 강력한 규율(L) 감시(L)]

다시 신재헌의 스킬창에 추적이 올라옴과 동시에.

―까앙!

언제 튀어나왔는지 모를 신재헌의 말레티아의 검이 경비병의 창을 가로막았다.

“뭐뭐뭐뭐야?”

검과 창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난 기겁했다.

경비병이 손님 패는 게 어딨어?

그리고 그때.

[‘헌터 신재헌(S)’이 ‘저택의 규율 1번’을 어겨 경고를 받습니다!]

[소음에 주의해주세요!]

그와 동시에 신재헌의 주변으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검의 수호자(B) 화염검(SS) 책임감(S)

- 디버프 : 저택의 강력한 규율(L) 감시(L) 경고1(L)]

그의 디버프창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괜찮아요?”

소예리 헌터가 놀라서 물었다. 하지만 신재헌이 답할 틈은 없었다.

“으럇!”

남다른 기합을 준 경비병이 다시 창을 휘둘렀던 것이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찌르라고 있는 창을 휘두르는 거라 공격력은 약하겠지만, 휘두르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다!

―후우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바람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창이 허공을 갈랐다.

“!”

신재헌이 간신히 몸을 틀어 피한 덕이었다. 그의 머리칼이 강한 바람에 젖혀지는 순간.

“이럇!”

기합을 내지르며 뛰어오른 경비병이 나무를 박차며 순식간에 신재헌의 심장으로 창을 내질렀다.

“!”

어떻게 대응할 틈도 없었다.

그대로 경비병의 창이 신재헌에게로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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