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부자의 어색한 시선이 맞물렸다.
“아, 아버지?”
“지금 이 꼴이 무슨 일인지 해명해 봐라.”
몇 달 동안 아프다며 게이트는커녕 몬스터 토벌에도 안 나갔던 놈이, 책이나 보면서 낄낄거리고 있어?
그러자 얼굴이 사색이 된 키칼이 책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었다.
“아프다며?”
포를랭 자작이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였다.
키칼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자자잠깐, 아버지! 오해입니다!”
“뭐가 오해야!”
이게 무슨 가문 망신이람!
앞에 처먹을 게 있는 걸 보니 사용인 일부는 이놈이 멀쩡한 걸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걸 가주인 제게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 사용인들이 곱게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이놈이 과연 사용인들의 입을 단속할 수 있었을까?
일단 어디까지 말이 퍼져나갔는지 알아본 후, 목을 베어 입을 다물게 해야 할 터다.
그렇게 살벌한 생각을 했을 때였다.
키칼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밤에만!”
밤에만? 포를랭 자작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밤에만 이렇게 멀쩡해집니다.”
“?”
포를랭 자작이 멈칫했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그때,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 가문의 주치의가 튀어나왔다.
“진, 진실입니다!”
진짜 그런 병이 있어? 포를랭 자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예.”
주치의가 키칼에게 협박을 받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포를랭 자작은 경악한 얼굴로 아들을 돌아보았다.
“제가, 어쩔 수 없이, 그, 밤에만 아프다는 게 뭔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키칼은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해대기 시작했다.
의사는 머릿속에서 발광하는 제 평생의 의료지식을 부정하며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감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상한 병이라고 소문이 나면 가문에 누가 될까 봐……!”
키칼의 눈물연기에 포를랭 자작이 멈칫했다.
“정말이냐?”
“예.”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가리는 키칼에게 화를 낼 수 없는 포를랭 자작이 얼굴을 풀었다.
그런 병이 있다는 건 처음 듣지만, 긴 시간 가문을 지켜온 주치의가 보증하고 있으니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이 병을 고칠 방법은 없느냐?”
“없습니다. 아직까지는요.”
의사가 재빨리 말했다. 너무 단호한 답에 포를랭 자작이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연, 연구 중입니다.”
“근데 아직 방법이 없다고 해서, 아버지께 근심을 얹어 드릴 순 없었습니다.”
키칼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포를랭 자작은 혀를 찼다.
“그런…….”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이런 병에 걸린 걸 알리느니 나서지 않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키칼은 새까만 속을 감추고 그렇게 말했다.
그는 아직도 강화제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좀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있다.
물론 후유증이 가시고 나서도 그는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여차하면 튈 수 있는 전장도 아니고, 끝나기 전까진 나오지도 못하는 곳이라고?
그는 그 지옥 같은 곳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근데 밤에만 아픈 병이 있다는 말을 아버지가 믿을까?
문제는 이거였다.
가문의 주치의에게는 이미 돈을 먹여 입을 맞춰 두었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가족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거라는 협박도 한 건 물론이었다.
사실 처음에 대려던 핑계는 ‘밤에만 아픈 병’ 따위가 아니었다.
매수한 주치의와 함께 적당히 증거를 조작해, 폭주한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가 입힌 상처로 오랫동안 요양이 필요하다고 핑계를 댈 셈이었다.
이렇게 일찍 포를랭 자작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증거를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의사가 제 편을 들어준다고 해도, 증거가 너무 빈약하다.
키칼이 침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포를랭 자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돌연 환한 표정이 되었다.
“?”
키칼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움찔한 순간이었다.
“밤에라도 괜찮아진다니 다행이구나. 난 또 엄청난 병인 줄 알았잖느냐.”
포를랭 자작은 진심으로 안심하고 있었다.
세니아도 병이 났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키칼까지 병이 들었다고 말이 퍼지면 핏줄 자체에 저주라도 든 것이 아니냐며 사람들이 수군거릴지도 모르니까.
“그, 그렇습니까?”
한편 키칼은 떨떠름한 얼굴로 반문했다.
정체 모를 병에 걸렸는데 다행? 뭐가요?
의아함을 감추려는 키칼 앞에서 포를랭 자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놓았다.
“그럼 밤에는 출정을 나갈 수 있겠구나. 그렇지?”
“예?”
키칼이 입을 떠억 벌렸다.
약으로 유지해왔던 강함이 없어진 그는 이제 일반적인 기사들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데 현장을 지휘하고 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투 끝까지 전면에 있진 않더라도 적어도 선두에 서야 한다는 말이다.
근데 이 상태로 선봉에 섰다간 바로 실력이 들통 날 텐데!
“그, 그게 무슨 말씀―”
“가문의 명예가 달린 문제다!”
포를랭 자작은 제 아들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말했다.
“지금 에델바이스 백작가가 무섭게 치고 올라온다는 걸 알고 있지 않느냐?”
사실 에델바이스 백작가는 포를랭을 향해 치고 올라오는 게 아니라, 이미 포를랭을 넘어선 지 오래였지만 그는 아무튼 그렇게 주장했다.
“그, 그렇죠.”
세니아, 그 독한 게……!
키칼은 검술대회에서 마주했던 동생을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사교계에서 세니아를 두고 소문이 돌고 있다. 포를랭에서는 폐인이었던 것이 어떻게 저리 펄펄 날아다니느냐고!”
그 말에 키칼이 멈칫했다.
포를랭 자작은 아직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아들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세니아가 포를랭에서 어떤 음모에 휘말린 건 아니냐는 이야기도 벌써 나오고 있어! 저 실력으로 어떻게 가주 계승식에서 밀리는 것도 모자라 폐인이 되느냐면서!”
이대로 가면 독을 먹인 게 들통 날지도 모른다.
“적어도 포를랭의 후계가 되려던 네가, 독을 먹여서 그 애를 약하게 만들었다는 소문만은 막아야지 않겠느냐!”
거기에 더불어 키칼은 마법약까지 먹고 도핑한 채로 활동했지만 그 사실을 포를랭 자작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그런…….”
키칼이 어버버거리는 동안 포를랭 자작이 외쳤다.
“곧 출정할 자리를 만들어 보마. 꼭 실력을 보여야 한다. 알겠느냐?”
“아버지, 아직 제 몸이―”
“밤에만 짧게 출정을 다녀올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말고!”
밤이든 낮이든 실력만 보여주면 된다.
키칼에게 전장을 이끌 카리스마가 있고 게이트의 몬스터들 앞에서도 기세가 죽지 않았다는 소문을 퍼뜨려 주면?
키칼이 세니아보다 못하다는 소문은 도로 들어갈 것이다.
더불어.
‘포를랭 가에서 에델바이스 백작의 앞길을 막은 게 아닌지?’
그 의혹에 맞불을 놓은 자신의 작전이 통하려면 일단 키칼이 멀쩡해야 했다.
‘원래 세니아는 실력이 좋았지만, 폐인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오. 그러나 중간에 그렇게 비약적인 성장을 보인 건……. 그건 저희 포를랭의 검류로는 설명을 할 수가 없소이다.’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비정상적인 경로로 얻은 힘이다.
그가 퍼뜨린 소문은 이미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쯤에서 키칼에 대한 실력 논란을 끝내야 했다.
“자리는 만들어줄 테니, 약한 놈들 상대로라도 좋으니 실력을 보여!”
키칼은 원래 실력이 없는 놈이 아니었다.
세니아보다는 못했지만 확실히 보통 귀족보다는 빠른 눈과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실력을 보인 후 소문을 부풀려 퍼뜨린다면 실력 논란은 종결될 것이다!
포를랭 자작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계획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키칼의 얼굴이 새하얘진 것도 모르는 채.
***
―달칵.
키칼의 방에서 좀 환해진 얼굴로 나온 포를랭 자작은, 문 앞에서 리카스와 마주쳤다.
“네가 무슨 일이냐?”
“아, 저도 형이 걱정돼서요.”
그러면서 머리를 긁적이는 둘째는 여전히 못미더웠다.
“네 형한테는 신경 꺼라.”
그러면서 리카스를 스쳐 지나가려던 포를랭 자작이 멈칫했다.
잠깐, 어쩌면 둘째가 쓸모 있을 수도 있겠는데?
키칼이 실력을 보여 소문을 가라앉힌다 해도 그건 미봉책에 불과했다.
포를랭 가에서 게이트 방어율 같은 성과를 보이지 않는 한, 에델바이스와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 잠시 에델바이스에 다녀오는 게 좋겠다.”
“예?”
리카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쯧.”
그 꼴에 혀를 찬 포를랭 자작이 말했다.
“그곳에 침투해서 어떻게든 에델바이스의 게이트 방어법을 알아내.”
“하지만 아버지, 세냐는 가문을 나간 이래로 우리 가문과 연락한 적이 없잖아요.”
리카스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 가문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멍청한 둘째 놈은 키칼과 세니아 사이에 오간 기류도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현재는 오히려 그게 나았다.
적어도 이놈은 키칼과 달리 세니아와 큰 불화가 없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그 점을 노리란 말이다.”
포를랭 자작이 낮게 속삭였다.
“포를랭을 나왔다고 해. 음…… 내가 키칼한테만 신경을 쓰는 데 질려서 나왔다고 하든, 어떻게든 동정을 사란 말이다.”
리카스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포를랭 자작이 빠르게 속삭였다.
“세니아는 원래 잔정이 많은 애였다. 게다가 보는 눈도 있으니 널 쉽게 내치지는 못할 게야. 그러니 옆에서 그 애의 비밀을 싹 빼와.”
포를랭 자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게이트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무엇보다 단기간에 어떻게 그리 강해질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 말씀은 저더러 에델바이스에 가서 첩자 짓을 하라고―”
“첩자라니!”
리카스의 말에 포를랭 자작이 호통을 쳤다.
“가문을 위해서다. 가문을 위해 잠시 자존심을 버리지도 못하겠느냐? 그 알량한 자존심이 가문을 살려줘? 응?”
그 말에 리카스는 움찔했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떠나라. 하루 한시가 바쁘니까.”
그러고는 포를랭 자작은 리카스의 옆을 쌩 지나가 버렸다.
복도에 남은 리카스는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에델바이스로 가라고?”
에델바이스로? 지금?
이 타이밍에?
제 방으로 향하는 리카스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는데.
“마침 ‘후원자’도 연락이 끊겨서 곤란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판을 깔아줘?”
게다가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었던 리카스는 귀가 유독 좋았다.
분명 방음이 되는 방 안에서 이야기하는 포를랭 자작과 키칼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에게 상태창이 있었다면 ‘도청’ 스킬이 A랭크로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스킬은커녕 상태창의 존재도 모르는 리카스는 유독 좋은 제 귀에 감사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내가 이쪽 줄을 타게 될 줄이야.”
제 방에 들어간 리카스는 종이부터 준비했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받는 이의 이름을 썼다.
[파리스 님께]
“아, 이제 파리스가 아니지.”
그는 종이를 태워 버리고 새로 꺼냈다.
[킨나 님께]
세니아 드 포를랭이 폐인이 되기 전.
그녀가 검 실력으로 승승장구하여 서제국 황가의 눈에 띄기 시작했을 즈음.
리카스에게 접근한 동제국의 세력은 그를 매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실력도 애매하고 둘째라는 위치도 애매했던 리카스에게 그건 기회였다.
……그 후원자라는 파리스가 죽어 끈 떨어진 연이 되기 전까진.
이제 동제국 입장에선 포를랭에 있는 첩자인 자신은 잊힌 패였다.
오히려 생각나면 처분해버려야 할 쓸모없는 패.
하지만.
‘에델바이스로 떠나라.’
포를랭 자작이 이렇게 판을 깔아준다면?
안 그래도 수호기사단장 에델바이스 백작은 양대 제국에서 주목받는 인물이었다.
[제국의 새로운 별이 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그의 펜 끝에서 유려한 문장의 편지가 만들어졌다.
편지를 쓰는 리카스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리카스는 금방 가문에서 쫓겨난 것 같은 허름한 차림을 하고 에델바이스 영지로 출발했다.
동제국 황가의 피에만 반응하는 마법 잉크로 쓰인 제 편지가, 마탑의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