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제 얼굴도 안 가리고 오네?”
에페 잡고 나서 나 빼고 페널티 면제권 받았니?
사실 나만 없는 거야? 음악선생님의 기쁨처럼?
황당해서 그를 올려다볼 때였다.
몸을 일으킨 그가 내 앞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
아니, 가볍게 뛰어내리는 것 같았다. 난 그가 한쪽으로 조금 비틀거리는 걸 분명히 보았다.
스탯이 높아진 탓에 확실히 보였다.
S급의 균형감각이 저 정도 높이에서 무너질 리가 없는데?
난 아주 잠깐 한쪽으로 비틀거렸던 그를 보다가 물었다.
“너 다쳤어?”
내 말에 신재헌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나? 왜?”
멀쩡하게 답하는 목소리는 정말 평소 같았다.
―탁.
하지만 내가 그에게 빠르게 다가가 왼쪽 어깨를 건드리려고 했을 때.
그가 몸을 트는 대신 오른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여기 안 다쳤어? 움직이는 게 이상한데.”
난 그의 어깨를 보다가 물었다. 신재헌은 내 말에 고개를 슬슬 저었다.
“안 다쳤어.”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벗겨보기 전에 이실직고한다, 실시.”
비틀거리는 거 분명히 봤거든? 그리고 안 다쳤으면 잡긴 왜 잡아?
“…….”
신재헌은 내 말에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 속네.”
“한두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속겠냐?”
내가 팔짱을 낄 때였다.
그는 왼팔은 움직이지도 않은 채 오른손으로 겉옷을 젖혔다.
―툭.
이어 그가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자 하얗게 감은 붕대가 드러났다.
그리고 붕대로 감긴 부위는, 내 생각보다 훨씬 컸다.
“뭐야, 크게 다친 것 같은데?”
내가 그의 옷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신재헌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옷을 다시 잠갔다.
“며칠 후면 나아.”
며칠 후면 나을 상처치고는 붕대를 너무 크게 감았는데.
“S급이라고 상처가 그렇게 빨리 낫진 않잖아.”
너만 S급 해봤냐?
게다가 붕대에 드러난 붉은빛의 피는 심상치 않게 넓게 퍼져 있었다.
그만큼 상처가 크고, 피가 많이 났다는 증거였다.
저렇게 붕대를 칭칭 감을 정도의 상처면 뻔하다. 분명 누군가와 접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주이안 씨에게 치료받았을 땐 없었던 상처이니, 그 이후에 생긴 거다.
……아마 연락이 안 된 사이에.
“…….”
난 입을 닫고 있는 신재헌에게 불쑥 물었다.
“너, 그 사이에 동제국 갔었어?”
내 말에 신재헌은 한참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또 거짓말하는 얼굴이다. 난 그가 답하기도 전에 말했다.
“거짓말하지 말고.”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그러자 신재헌이 픽 웃어 버렸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 마른세수를 두어 번 하고는, 순순히 이실직고했다.
“그래, 다녀왔어.”
역시 갔구나. 난 답을 알 것 같았지만 물었다.
“거기서 다쳤어. 이거.”
신재헌은 제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다치러 간 건 아닐 테고.
“어쩌다가 다쳤는데?”
내가 계속 묻자, 신재헌은 가만히 있다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난 움찔하기만 하고 올라오지 못한 그의 왼손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 언뜻 스쳐 지나간 고통은 상당해 보였다.
순간 얼굴이 하얘질 정도로.
그만큼 심한 상처라는 증거다. 내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오늘 질문은 여기까지.”
뭘 여기까지야? 난 손을 내저었다.
“안 돼. 온 김에 다 불고 가.”
뭔가 감추는 게 분명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
“…….”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 어스름한 연무장에서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난 그의 짙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명 신재헌은 소예리 헌터의 봉인을 막을 때까지만 해도, 동제국 황태자는 이 RP던전을 나갈 때 잡으면 된다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가 연락이 끊긴 시기에 동제국 황태자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그리고 신재헌은 다쳐서 돌아왔고.
‘…….’
난 에페를 물리친 후의 그를 기억했다.
그는 분명히 화난 얼굴로 소예리 헌터의 멸망계시록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화는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신재헌은 답하지 않았다.
답하기 싫다는 것처럼, 또는 곤란하다는 것처럼.
난 결국 그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아무것도 안 물어볼 테니까, 또 어디 다쳤는지 말해봐. 아니,”
혼자 동제국에 갔다면, 그리고 외형변경물약 같은 것도 없이 갔다면.
상처보다도 페널티를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어떤 페널티 받았는지 말해 봐.”
눈이 마주치자 신재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상처.”
그리고 잠깐 말을 멈추었다.
저게 끝인가?
그렇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디버프로 상세불명의 통증, 전신 통증 극대화. 스탯 풀체력 5% 영구저하, 스킬 랭크 영구저하.”
난 살짝 입을 벌렸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랬을까.
뭐 때문에 네가 이렇게 페널티를 받을 때까지 무리한 걸까.
무슨 일이었냐고 묻고 싶은데 물을 수가 없었다.
묻지 않기로 했으니까.
대신 난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 몸으로,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야? 이건 물어도 되지?”
안 쉬고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내 말에 신재헌은 불쑥 답했다.
“보고 싶어서.”
답이 너무 빨라서 순간 흘려들을 뻔했다. 내가 눈을 살짝 크게 떴을 때, 신재헌이 재차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웃었다.
그 미소는 평소처럼 가볍지도, 장난기가 어려 있지도 않았다.
“너한테 어리광부리고 싶어서.”
아직 해가 어스름하게 뜬 시간이기 때문일까, 신재헌의 묘한 분위기 때문일까.
그 말은 이상하게 들렸다. 그답지 않은 말이기에 더욱 그랬다.
너한테. 내가, 이만큼 다쳤다고.
그가 작게 뇌까렸다. 그의 웃음은 자조에 가까워 보였다.
난 그런 그를 살피다가 말했다.
“……뭐든 힘든 일 있으면 다 말해. 들어주고, 도와줄게.”
대체 뭐가 너를 그렇게 괴롭히는 건지 몰라도.
그러자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정말?”
“응.”
문답은 고민도 없이 오갔다.
네 이야기면 못 들어줄 게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에 그의 눈을 봤을 때, 나는 뭔가 어긋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신재헌이 입을 열었다.
“그럼 딱 10초만.”
그렇게 말한 신재헌이 입을 닫았다가, 천천히 말했다.
“10초만, 내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 봐.”
“뭐?”
내가 되물었을 때였다. 신재헌은 내게서 시선도 떼지 않고 말했다.
“하나.”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 보라고? 갑자기?
눈을 깜빡이는 사이.
“둘.”
신재헌의 담담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울렸다.
너랑 내가 친구가 아니라고?
왜?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셋.”
친구가 아닌 채로, 우리가 이렇게 서 있으면…….
친구가 아닌 신재헌. 헌터 신재헌.
난 그의 이름을 조용히 뇌까려 보았다.
소꿉친구 신재헌이 아니라…….
“넷.”
너, 그냥 너.
‘내가 말했잖아.’
‘기회가 오면, 너보다 먼저 죽겠다고.’
어느 순간 내 뒤에서 내 옆으로 훅 다가온 너.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내 옆에 서고야 만 너.
‘네 옆에 당당하게 있고 싶어서.’
어떻게 S급이 될 수 있었느냐는 말에, 그리 간단하게 답했던 너.
“다섯.”
그런 네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약속, 꼭 지킬게.]
그래도 너는 그런 약속을 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의심은 들지 않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너와 내가 언제 어디서 만났든 너는 내게 약속했을 것이다.
언젠가 내가 위험해지면, 네가…… 나 대신 죽겠다고.
“……여섯.”
그때까지도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신재헌의 짙푸른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그 순간 불쑥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주이안 씨, 나 좋아해요?’
불과 얼마 전 가볍게 물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신재헌 앞에서는 가볍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
난 살짝 입을 벌렸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나는 우리 사이에 서 있는 아주 얇은 유리 벽의 존재를 발견했다.
“일곱.”
네가 친구가 아니라면.
네가 내 옆에…… 오래전부터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면.
“여덟.”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꿉친구 신재헌이 아니라 그저 신재헌이었다면.
그랬다면.
“아홉.”
나는……, 한순간도 네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쿵.
마음속에서 그와 나 사이의 얇은 유리 벽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그 너머의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내가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열.”
그의 담담한 말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마법 같은 시간이 끝났다.
그의 얼굴이 지금까지의 10초가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늘 내가 알던 얼굴, 어쩌면 그에게 강요했을지도 모르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그 얼굴에 서렸다.
다시 유리 벽이 사라지고, 침묵이 사라지고, 익숙한 모습의 그가 말했다.
“간다.”
“뭐?”
그리고 그는 내가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타탓!
훌쩍 도약한 그는 순식간에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내가 미처 다른 행동을 하기도 전이었다. 움찔하며 올라갔던 손이 다시 내려왔다.
“…….”
연무장엔 나 혼자였다.
신재헌은 오지도 않았던 것처럼, 꿈이었던 것처럼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가 버렸다.
난 살짝 입을 벌렸다.
‘10초만, 내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해 봐.’
딱 10초만.
그렇게 그가 센 열이란 숫자는 다른 세상에서 세어진 숫자 같았다.
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짙푸른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십 초 동안 뭔가에 홀렸던 것처럼.
그에게, 홀렸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