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살벌한 목소리에 황태자가 멈칫했다.
“난, 난 못 나와. 어떻게, 뭘 원하지? 뭘 해줘야 해? 내가? 나 아직 이 나라 황태자야. 네가 나를 도와서 킨나를 몰아내기만 하면 동제국과 서제국의 관계는, 아니 동제국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으니까…….”
“필요 없어.”
신재헌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검을 든 파리스의 멱살을 들어 올렸다.
“으아아악! 놔!”
검을 든 팔이 허우적거렸지만 신재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전신 고통 극대화(L) 디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디버프 때문에 파리스가 걷어차거나 그의 검에 스칠 때마다 고통이 컸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잘 들어. 네가 들어간 뒤로 한 시간 동안 이 게이트에 들어가는 사람은 너와 같이 이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
“……!”
그것도 몰랐는지, 파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누구든 오기만 하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의 얼굴에 희망이 조금 차오르길 기다렸다가, 신재헌이 말했다.
“그러니까 난 한 시간 동안 여길 지킬 거야.”
파리스는 숨 쉬는 것도 잊고 굳어 버렸다.
“이 게이트로 들어가려는 놈들 목은 싹 날릴 거야. 그럼 너는 이 게이트에 혼자 남겠지?”
신재헌이 차게 웃었다.
“나는 네가 그 애와 같은 공포를 겪길 원해.”
네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누굴 건드렸는지 뼈저리게 알기를 원해.
“한 시간 동안 기다려 봐. 혹시 모르잖아. 네 휘하의 기사들이 나를 죽이고, 던전 안으로 진입해줄지.”
신재헌의 말에 파리스의 얼굴이 더욱 질렸다.
“내기하는 거야, 응? 좋아한다며, 내기.”
신재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파리스는 내기를 좋아했다.
변한 서제국 황제 아이반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을 때도 귀족들과 카드놀이에 빠져 듣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목숨을 걸고 한 내기는 아니었다.
아니, 내 목숨이 걸린 건 아니었지! 귀족 놈들이야 돈도 잃고 집도 잃다가 온갖 것을 다 걸기 시작했지만!
“난, 난 이런 내기는 안 해.”
“내가 해.”
나도 좋아하거든, 내기.
신재헌이 그를 잡은 손을 게이트 앞으로 천천히 뻗었다.
“살려줘.”
파리스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신재헌은 그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한 시간.
지원군이 올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고 한 시간을 던전 입구에서 서성이다 보면 넌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몬스터에게 덤벼서 일찍 죽든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게이트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기를 쓰든가.
물론 B급에 게이트 초행인 파리스가 S급에 준하는 게이트에서 살아 나올 가능성은 0%였다.
―우우웅!
신재헌이 파리스를 잡은 손을 게이트 쪽으로 점점 밀어 넣으려고 했다.
“아냐, 이건 아니지. 내가 어디로, 아니, 내가 여길 왜…… 아니지! 이건 아니지!”
황태자가 외쳤지만 신재헌은 그의 얼굴을 반쯤 게이트에 집어넣은 채 말했다.
“잘 가.”
그리고 손을 툭 놔 버렸다.
“으아아―”
비명은 게이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한 대륙 정세 변화’에 의해 RP던전 페널티를 받습니다.]
[가장 사용 빈도가 높은 스킬의 랭크가 한 단계 하락합니다. (영구)]
[스킬 검색 중…….]
[대상 스킬 : 검의 수호자(A)]
스킬 랭크 하락.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의 수호자(A)의 랭크가 B랭크로 하락합니다.]
[‘상세불명의 통증(L)’ 디버프 효과를 받습니다.]
[상세불명의 통증(L) : 48시간 이내에 임의의 부위에 상세불명의 통증이 10번 가해집니다(통증 강도 9/10).]
통증 페널티야 버티면 그만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지만 않으면 되니까.
하지만.
“이건 좀 티가 나겠는데.”
[검의 수호자(B)]
헌터스킬의 랭크가 하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유리는 스킬창에 검의 수호자가 보이자마자 알아챌 것이다.
랭크가 낮아진 게 RP던전 페널티 때문이라는 것을.
왜 낮아졌느냐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떤 멍청한 답을 해도 상관없다.
너 때문이라고만 안 하면 돼.
“나야 실수 많은 놈이니까.”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입을 잘못 놀렸다고 할까? 네가 습격받은 것에 놀라서…….
아니지, 그럼 신유리 탓을 하는 것 같잖아.
아무래도 황성으로 복귀하다가 실수가 있었다는 핑계가 제일 자연스러울 듯했다.
“좋아…….”
신재헌은 게이트 앞에 버티고 섰다.
이제 한 시간 동안만 이 앞에서 버티고 있으면 된다.
그 다음엔 떠날 것이다.
―우웅!
일렁이던 게이트가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 아무도 진입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게이트는 완전히 굳어 버릴 것이다.
“…….”
흔적을 감출 생각은 안 했으니 누구든 와도 상관없었다.
파리스의 기사들이 오든, 킨나의 기사들이 오든.
누구든 오는 자는 다 목을 쳐버릴 거니까.
그렇게 이놈이 혼자 남았다가, 다시 이 게이트가 오픈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황태자는 죽은 거다.
직접 목을 베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건 너무 쉽잖아.
“…….”
복수는 끝났다.
놈은 고통받다가 처절하게 죽을 것이고 다시는 유리를 위협하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한두 번 해 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늘따라 기분이 묘했다.
RP던전 페널티 때문에? 스킬 랭크가 내려가서?
이미 페널티는 감수하고 여기까지 온 건데, 이제야?
그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페널티 때문은 아니었다. 대신 자꾸 신유리가 생각났다.
―콰드득.
땅에 박힌 말레티아의 검이 땅 위를 긁으며 거친 소리를 냈다.
“…….”
그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드디어 정무 보다가 딜러의 본색을 드러낸 거야? 그래서 튀기로 한 거임?]
꺼두었던 헌터 채팅을 올려보니 바로 그녀의 이름이 보였다.
“하.”
그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
뭐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이 분노로 뜨거워진 지금은 할 말이 없었다.
조금은 가라앉고 나서 해야 했다.
신유리는 그런 나만을 알고 있으니까.
장난스러운 네 친구. 십년지기 친구. 그래, 그저 친구.
―콰직!
다시 검이 바닥을 긁었다. 그가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왜 이리도 기분이 가라앉는지 알 것 같았다.
뭘 하든 그저 친구라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녀의 행복을 해치지 않기 위해 숨죽여 이곳까지 온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뒤흔들기를 원했다.
내가 사실 너를 보고 있었노라고, 그러니 너도 내게 미쳐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을 갈증이었다.
그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검을 쥔 손에 살기가 깃들었다.
***
신시안 교단과 서제국 황가가 서로를 견제한 건 오래된 일이었다.
당연히 서로에게 침투해 있는 첩자들도 많았다.
주이안은 그것을 통해 마탑이나 에델바이스 백작가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황제 아이반이 동제국 방향으로 갔다는 정보를 손에 쥐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제국 방향이요.”
주이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황제 아이반, 신재헌 헌터님은 ‘동제국 방향’으로 간 게 아니었다.
‘동제국’으로 간 거였다.
누가 서제국의 황제가 단신으로 국경을 넘을 거라고 생각할까.
‘…….’
주이안은 멸망계시록을 노려보던 신재헌을 생각했다.
불안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헌터님) - S급(딜러)
- 버프 : 없음]
소름끼치게 조용한 파티창이. 그리고 헌터 채팅에 답이 없는 것도.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요.”
결국 주이안은 검은 로브를 집어 들었다.
물론 그는 신재헌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페널티를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더 많았다.
마침 동제국이 시끄러우니.
그 핑계로 동제국의 평민들을 도우러 간다고 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그가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성기사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동제국에.”
주이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의 손길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렇게만 말하면 된다. 그럼 성기사들은 기꺼이 동제국 국경을 넘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페널티 없이.
최소한의 성기사들을 데리고 가겠지만 그들 사이를 잠깐 벗어나는 것 정도야 별일 아니었다.
주이안 자신 역시 S급이었으니까.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계획의 얼개를 세우자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자세한 계획이 떠올랐다.
짧은 시간 동안 계획을 세운 주이안이 기사를 돌아보았다.
“동제국으로 가야겠어요.”
“예하?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성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정세가 극히 어지럽습니다. 위험하실 겁니다.”
신시안 교황이란 이 RP던전에서 굉장히 편한 신분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생각하며 주이안이 말했다.
“……신시안 님의 뜻이에요.”
신의 뜻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교황. 그가 말하는 신의 뜻을 성기사들이 어떻게 저버릴 수 있을까.
“그곳에.”
생각해둔 말을 해야 할 때였다. 신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이 있어요, 라고.
하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한 그가 입을 닫았다.
주체 못 할 분노를 삼키려는 사람이 있다고.
내게……, 신유리 헌터님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다간 뒤틀린 속이 끓어 넘칠 것 같아서.
포기하기로 했잖아.
제 속을 씹어 삼킨 그가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다행히도 성기사는 그조차도 신의 뜻이라고 생각했는지, 그에 대해 캐묻지는 않았다.
“……중요한 자인가 보군요.”
대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불특정다수가 아니라 어떤 개인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챈 듯했지만, 신의 뜻이기에 더 묻지 않는 모양이었다.
“채비하겠습니다.”
“네, 최대한 빨리.”
주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오랜만의 휴가를 즐긴답시고 테라스에 나가 있던 신유리를 생각했다.
집무실에서는 그 뒷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던 그녀의 모습이. 편안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왜 그렇게 빤히 봐요?’
간혹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리던 그녀의 모습이.
더 원하면 안 되는데.
그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