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살려주세요]
주이안은 올라오는 채팅에 저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웃었다.
수프를 앞에 둔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식사 미리 한 거 다 계략이었던 거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이거 본인도 못 먹을 음식인 거 알고 있는 거지???]
그 말에는 저도 모르게 반박해 버렸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저는 잘 먹습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아니 답 없길래 자는 줄 알았어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안 자면 얘네 좀 말려줘요 건강짱 교황님의 조언이었다고 이걸 다 먹어야 한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걸어다니는 생강 되겠다고ㅗㅗㅗㅗㅗㅗㅗ!!!!!!!]
주이안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다 드시고 올라오셔야 해요]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님)>>> ㅋㅋㅋㅋㅋ 그러게 몸조심하시라니까~ 나처럼 안 맞으면 그럴 일이 없어용~]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보조계 되는 법 삽니다 제발]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님)>>> 도라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도라가 보니까 깨달았는데 여기 도라지도 들어간것같음]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던전산 도라지가 들어가는 게 맞습니다]
잘 아시네. 주이안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본 신유리의 몸 상태는 확실히 안 좋았다.
하지만 신유리가 공포의 수프라고 부르는 걸 몇 접시고 먹어야 할 정도로 안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식당에, 인벤토리에서 꺼낸 수프를 나무통에 담아 건넨 건 조금의, 심술이었을지도 몰랐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아니 도라지는 언제 캐고 다니는 거냐고]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님)>>> 아 그거 뉴월드백화점 헌터관에서 내가 맨날 사주잖아]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와 씨 저 씨]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본인은 안 먹는다고 재료 조달하는 거 봐]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님)>>> 오구오구 유리헌터님 건강하자~]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헌터님)>>> 어흥헌ㅁ흔ㅇ헣ㅁ]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래,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툭툭, 툭.
신전 정보원들만의 독특한 박자로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까지?
“들어오세요.”
그의 말이 들리자마자 방에 들어온 성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급히 신전으로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갑자기 날 찾을 일은 없을 텐데?
주이안은 머릿속에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하지만 성기사가 말한 건 뜻밖의 소식이었다.
“동제국에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네?”
이건 무슨 소리지?
이 정도 소식이면 멸망계시록을 가지고 있는 소예리 헌터님이든, 동제국 동향을 주시하고 있을 신재헌 헌터님이든 두 분 중 하나는 먼저 말씀하셨어야 했는데.
하지만 헌터 채팅에 동제국 이야기는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니.
그가 멈칫했다.
RP던전에서 일어나기로 정해져 있던 사건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 내지는 헌터팀의 누군가가 만들어낸 사건이라면?
멸망계시록에서는 황태자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는 내용만 나왔을 뿐, 반란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동제국 역시 게이트를 막는 주체인 만큼 황태자가 실각한다면 당연히 언급될 텐데도.
만약 ‘이쪽’의 누군가가 동제국에 불을 붙인 거라면?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헌터님) - S급(딜러)
- 버프 : 없음]
주이안의 시선이 며칠간 미동도 없는 신재헌의 상태창에 닿았다.
상태창뿐만이 아니라, 그는 바쁜 듯 말도 없었다.
“……동제국 내부 사정은 알아보고 있나요?”
주이안이 성기사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성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동제국의 귀족들은 황태자의 무능에 이미 질려 있는 상태였습니다만, 이번에 발탄 제국 명예의 상징이라고도 불리는 에페를 잃었다는 것에 분노한 것 같습니다.”
에페는 히든 루트였다.
에페를 처리하고 나서 던전이 완전히 히든 루트로 접어들게 되면서 그 증거로 게이트의 난이도가 전체적으로 높아졌다.
그런데 그것에 더불어, 동제국마저 혼란에 빠진다고?
이게 RP던전의 히든 루트 때문에 일어난 일일까?
주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직감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황태자를 옹립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기사가 그런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굴?”
“……현 황태자의 사촌, 킨나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이안 앞에 시스템창이 떴다.
[정보 : 동제국의 황족 킨나
현 발탄의 황태자 파리스의 성정에 오래전부터 불만이 많았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동제국은 능력보다는 혈통을 중시하는 나라. 적통성이 떨어지는 킨나는 오랜 시간 외면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황태자 파리스가 연이어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자,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더불어 출처불명의 자금줄까지 더해져, 그를 새로운 황태자로 옹립하고자 하는 세력에게 불이 붙었습니다.]
주이안의 시선이 시스템창 한 곳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출처불명의 자금줄?
그는 그 뒤에 누군가의 이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신재헌 헌터님.
그가 속으로 뇌까렸다.
성기사는 주이안의 생각에 쐐기를 박듯 말했다.
“오래전부터 카르만 황가에서 킨나를 예의주시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황가에서.
그 말은 신재헌 헌터가 이번에 움직였다고 해도 페널티를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주이안은 며칠째 미동도 없는 신재헌의 상태창을 보다가 성기사를 돌아보았다.
“……신전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세요. 그리고,”
황가에서 예의주시하던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당연히 카르만 황가도 주시해야 했다.
“황제가 최근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그걸 알아보는 데에는 헌터 채팅으로 충분했는데, 신재헌 헌터는 근래 말이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폭풍전야처럼.
성기사가 떠난 후.
주이안은 얼마 안 있어 신재헌이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2주]
그 쪽지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황제는 자주 외출을 하는 자였지만, 이번 외출은 최장기간이라고 했다.
게다가.
“자금줄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성기사는 이미 주시하고 있던 덕인지 빠르게 정보를 가져왔다.
덕분에 그 정보를 주이안이 접한 건, 그날 밤이었다.
“황제 아이반이 어릴 적 차명으로 운영했던 상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 상단과 아이반……, 신재헌 헌터가 관련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적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주이안은 빠르게 결심했다.
“잠행을 다녀와야겠습니다.”
이쪽은 기사들을 따돌리는 등 번거로운 절차로 자리를 떠야 하는 누군가와는 달리, 사람들을 설득하기 쉬웠다.
“신시안 님의 뜻으로.”
성기사는 고개를 숙였다.
주이안이 더 신경 쓴 건 성기사 쪽이 아니었다.
“갑자기요?”
“일이 조금 생겨서요.”
“하긴 이 정도면 오래 있었죠……. 채팅해요, 알았죠?”
신유리는 아쉬운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주이안은 떠나기 전에 그녀의 얼굴을 조금씩 살폈다.
부디 그녀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길 바라면서.
***
동제국이 망한다고 해도 우리가 대륙을 지키면 되지 않을까?
신재헌이 며칠 전 했던 생각이었다.
‘동제국의 킨나를 둘러싼 자들의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황태자 파리스가 무능의 끝을 보여주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안 그래도 대결 구도인 서제국과 동제국.
그런데 서제국은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동제국은 황태자가 앞장서서 삽질을 하고 있으니 귀족들은 속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그 보고를 듣자마자 신재헌은 깨달았다.
지금이 기회라고.
그렇게 그가 탄 말이 동제국 국경을 넘은 지는 꽤 되었다.
서제국의 국경 경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아는 데다, S급인 그가 국경을 몰래 통과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얼굴이 알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신유리의 외형변경물약이라도 있으면 좋았겠지만, 이번 일은 그녀에게 알릴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있을 곳은 동제국이었다.
서제국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본 이가 동제국에 많을 리가 없으니.
그는 머리를 금발로 염색해 버렸다. 염색약의 질이 안 좋아 얼마 가지 못하고 물이 빠져버리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머리 색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짐꾼을 구한다고 하셔가지고…….’
허름한 옷을 입고 짐꾼 일을 하려는 평민으로 위장하는 것도 쉬운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킨나의 무리에 합류했다.
용병이 아니라 일용직 일꾼에 지원한 이유는 간단했다.
무기를 쓰는 용병을, 반란을 일으키는 킨나의 무리가 함부로 쓸 리 없었다.
하지만 짐꾼들은 달랐다.
그들은 제가 든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른 채 짐만 옮기고 자리를 떠야 했다.
덕분에 킨나의 무리는 소리 없이 조용하게 황성의 그림자로 침투하고 있었다.
“제국을 위하여……!”
그렇게 외치는 자들을 따라간 지 며칠.
“큰일입니다, 킨나 님!”
신재헌의 좋은 귀에는 멀리 떨어진 곳의 속삭이는 소리도 잘만 들렸다.
하필 주변이 조용한 덕에 더욱.
그는 짐을 옮기면서 그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파리스 놈이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냄새를 맡았다? 신재헌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부관과 함께 급히 황성을 비웠다고 합니다.”
오.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정보가 새어나갔나?”
킨나는 벌써 들켰느냐며 곤란해하는 기색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황태자 파리스를 어떤 죄목으로든 잡아넣지 못하면 적통성을 따지는 무리가 파리스를 중심으로 집결할 테니까.
“최대한 조용히 황성 주변부터 샅샅이 뒤진다.”
킨나는 그렇게 명령했다.
“그놈을 절대 놓쳐선 안 돼.”
아니, 놓치게 될걸.
하지만 킨나에겐 나쁜 미래는 아닐 것이다.
그는 실종될 거니까.
얻을 것을 얻은 신재헌은 킨나의 무리를 벗어났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신재헌 헌터님 겨울잠자요???]
그 사이 잠깐 켜본 헌터 채팅에는 신유리의 이름이 보였다.
……길게 연락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보면 다시 화가 날 것 같아서. 그럼 더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녀에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찾아가는 놈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안자요 그냥 바빠서 그래]
그렇게 답한 그는 돌아가야 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상보다 킨나는 느리게 진군했고, 덕분에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다.
자칫하면 페널티 받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받을 게 분명했다.
“…….”
저번에 유리에게 하녀와 하인들을 보낼 때처럼 편두통 일주일 정도로 끝나진 않을 터였다.
이미 각오하고 나온 길이었다.
랭크 하락이나 능력치 하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하지만 그는 더 자신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네가 위협받는 꼴을, 난 두 번은 못 볼 것 같아.
황태자를 죽여버린다고 해도 사망 페널티는 받지 않을 것이다.
대륙 전체에 내가 이계에서 왔노라며 인벤토리를 펼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명 처리해버리는 것뿐인데.
그럼 됐잖아?
그가 킨나의 무리를 벗어나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