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그 짧은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흔히 하는 질문이었다.
나 좋아해요? 당연하죠.
그렇게 흔하게 농담처럼 오갔던 질답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미소와 함께 시간이 멈췄던 것 같던 방 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죠.”
주이안 씨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안 좋아하는 사람하고 팀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야 그렇긴 한데. 내가 입을 열려는 때였다. 주이안 씨가 문득 말했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세요.”
“네?”
뭘? 내가, 뭘?
난 나도 모르게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알아챘다.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평소 같지 않은 말이 나오면. 만일 그가 나를……, 각별히 생각한다면?
당장 떠오르는 건 헌터팀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마음을 받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난 그걸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생기길 원치 않았다.
누군가와 특별히 가까워진다는 건 다른 두 사람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난,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릴 때였다.
“다른 팀 안 가요.”
주이안 씨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
이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주이안 씨는 정말 안심하라는 듯 내게 손까지 내저어 보였다.
“억만금을 제시한대도 다른 길드로 안 가요. 한국 떠날 일도 없고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전에 라엘라 영지 들렀다가 소예리 헌터님 만났거든요. 근데 신유리 헌터님이 불안해하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네?”
내가? 뭘?
내가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주이안 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혹시 팀원 중 누가 다른 데로 스카우트될까 봐.”
내가…… 그렇게 얘기했었나?
아니었다.
정확히는 신재헌 그놈이 나한테 뭘 감춘다기에, 스카우트라도 받았나 물어본 것뿐이었다.
그게 이렇게 와전된다고?
내가 눈을 깜빡일 때였다.
“안 가요. 그러니까 안심해요.”
주이안 씨가 낮게 웃었다.
“아무 데도 안 가요. 헌터팀에 일 만들 생각도 없어요.”
그 목소리에 난 눈을 깜빡였다. 주이안 씨는 날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신유리 헌터님?”
끔. 뻑.
끔……뻑.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던 난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지금 나 착각한 거임?
혼자 땅 파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춤까지 춘 거지?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왜 그래요?”
주이안 씨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를 피해 간이 침실로 후다닥 도망갔다.
“피피피곤하다! 어어어어! 피곤해 죽겠다!”
―쾅!
난 그가 오기도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기 전에 본 주이안 씨의 얼굴은 당황 그 자체였다.
그그그래요 당황스러우셨겠죠!
많이 당황하셨겠지! 그래요!
사실 나 여기 입던하기 전날 밤까지 로맨스 소설 보다가 잤다!
19금으로 찐한 거 보다가 잤다! 그래서 망상병 들렸나 보다!
“아픈 거 아니죠?”
주이안 씨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 너머에선 보일 리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외쳤다.
“멀쩡해요! 잘래!”
―풀썩!
난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불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가, 이불을 팡팡 걷어찼다.
마마마말실수 안 한 게 천만다행이다!
내가 돌아가면 휴대폰에서 소설 어플부터 싹 날려버린다!
절간 가서 108배 한다!
머릿속의 번뇌와 속세의 음욕을 날려버릴 것이다!
난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
―쾅!
주이안은 눈앞에서 문이 닫히는 걸 보았다.
붉어진 그녀의 귓가도.
곤란해하는 얼굴도. 하지만 그 전에 그는 분명히 보았다.
묘한 안도감을 감추려고 애쓰던 그 얼굴을.
“…….”
조금 전까지 방 안으로 쫓아 들어갈 기세였던 그는 문이 닫히자마자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문 너머에서 그녀가 곤란해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으꺄아흐하학!’
소리 죽여 비명 지르는 것도, 이불을 걷어차는 소리도 잘 들렸다.
너무 잘 들려서 문제였다.
“…….”
주이안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아 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당신도 흔들린 것 같았는데.
내가 당겼으면 당신은 따라왔을까?
‘고백하고 싶어요?’
소예리 헌터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럼 해요, 고백.’
‘하지만 그분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그분은 변화를 원하지 않아요.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소예리는 말했다.
다 안다는 것처럼.
‘그건 주이안 헌터님 판단이고. 겉으로 보기엔 모르는 거지. 무엇보다 주이안 헌터님이 좋아할 만큼 사려 깊은 사람이면,’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고백한다고, 사이가 흔들리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해요, 고백.’
‘그렇게 마음에 담아뒀다가 속 썩을 거면. S급도 병은 못 피해요. 알지?’
소예리 헌터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소예리 헌터님. 모른 척 내 고해를 들어주신 소예리 헌터님.
죄송스럽게도 저는, 신유리 헌터님을 흔들 그 작은 파문조차도 견딜 수가 없어요.
신유리 헌터님보다도 내가 못 견딜 것 같아.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신유리 헌터님을 지켜볼 자신이 없어요.
‘…….’
주이안은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착각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 너무 오래 민망해하지 마세요.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주이안 씨, 나 좋아해요?’
맞아요, 좋아해요.
전하지 못한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내뱉지 않았다.
당신을 좋아해.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기에, 그렇기에 포기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반드시 맺어지라는 법은 없으니.
―스륵.
문에 기대어 앉은 그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주이안 씨는 전생에 소였을 것이다.
어떻게 엎어져 잤는지도 의문인데 일어나 보니 그는 아직도 일을 하고 있었다.
‘배고프죠?’
그리고 식사까지 미리 준비시켜 놓았다고 했다.
S급 힐러쯤 되면 사람이 언제 기상하는지 예상 기상 시각 같은 거라도 보이나?
황당해하는 사이에 이미 나는 식당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주이안 씨는 안 먹어요?’
‘저는 아까 가볍게 들었답니다.’
그러면서 그는 식당으로 나를 안내해 버렸다.
그리고 저택의 요리사들은 에델바이스 가의 사용인인 주제에 그의 명령을 너무 잘 따르고 있었다.
“오늘 몸이 안 좋으셔서 특식을 풀코스로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집 요리사 아니었어?”
내가 황당해서 묻자 요리사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주인님의 건강을 살피지 못한 죄, 지금이라도 갚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죄까지는 아니고…….”
따지자면 에페가 죄인이지 삼시세끼 맛밥 차려준 요리사 탓을 내가 왜 해?
내가 손을 내젓자 요리사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식사……하시겠습니까?”
그럼 식당 내려와 앉아서 냅킨까지 펼쳤는데 뭘 하겠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리사가 비장한 얼굴로 손을 처억 들었다.
―탁.
그리고 무슨 일제사격 명령하듯 손을 내리자, 그의 뒤에서 문이 일제히 열리고 총구 대신 음식이 담긴 트레이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헐.”
“오늘, 이 한 몸 불살라 ‘건강’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요리사는 대체 주이안 씨한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열의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건강이 음식 한 큐에 해결되는 일이―”
그러면서 트레이 뚜껑을 열었다.
닭의 범주를 넘어선 것 같은 거대한 크기의 닭고기 요리가 보였다.
닭에 놀라는 것도 잠깐.
“잠……깐만.”
난 본능적인 공포로 의자를 뒤로 물렸다.
갖은 양념과 화려한 데코로 감춰져 있었지만 그 아래의 녹빛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저거…… 설마…….
“혹시, 그, 주―”
[RP던전 페널티 위기! : 이세계의 이름]
“아니, 그 예하께서, 뭔가 그…… 레시피를 주셨나요?”
던전산 영양수프라든지? 아니면 저 색이 나올 수가 없는―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신전에서 급한 환자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하는 수프라고 하셨습니다.”
으아아악! 맞잖아! 그 공포의 수프 맞잖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래 도특식은시 기상조같 아.”
기계처럼 이상한 데서 띄어 말한 것 같지만 저 공포의 수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일 을하 러가야겠 어.”
삐걱삐걱 돌아섰을 때였다.
요리사의 두툼한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가주님의 상태가 이리 심각하신 줄도 모르고, 그저 한가하게 음식만 준비했던 이놈을 벌해주십시오!”
“벌해주십시오!”
그러자 트레이를 끌고 온 요리사……가 아니라 하인들과 헬렌이 입을 모아 외쳤다.
헬렌, 댁은 여기 왜 있어???
“아니 나 잘 먹고 잘 살고 있었거든? 이번에 좀 피곤했을 뿐이야.”
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요리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 피곤하셨다는 말씀은!”
그러더니 나를 강인한 손으로(……) 테이블 앞으로 이끌었다.
주이안 씨 특제 수프의 지독한 향이 올라왔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것 같은 이…… 이…… 지독한 약초 냄새…….
“이걸 꼭 드셔야 합니다!”
요리사도 헬렌도 하인들도 저 닭요리를 다 뜯기 전엔 나를 식당에서 나가게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푹 삶았으니 절대 퍽퍽하지 않을 겁니다.”
퍽퍽한 게 문제가 아니거든?
요리사는 나를 안심(?)시키면서 내 앞에 놓인 잔에 물을 따랐다.
―쪼르륵.
아니, 물이 아니라 묽은 수프를 따랐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꼭 다 드시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동네의 걸어 다니는 병원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교황, 주이안 씨였으니 그의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해는 갔다.
이해는 가는데.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주이안씨 제가 혹시 뭐 잘못했나요? 여기 초록색 수프가 엄청 많은데 초록나라를 보았니 풀과 약초가 가득한]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뭐야뭐야 둘이 같이 있어요? 특식 주러 간 거야?]
소예리 헌터의 채팅에 난 멈칫했다.
진짜 수프 주러 온 거……?
난 어젯밤의 쪽팔리는 과거에 다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주님의 얼굴에서 독기가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역시! 냄새만 맡아도 독기가 빠져나간다는 특제 수프……!”
독기 아니고 핏기거든? 나가지도 않았거든?
내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려는 때였다.
[…….]
그때까지도 주이안 씨는 답이 없었다.
그 사이.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식사 시중을 들겠답시고 하인이 무려 네 명이나 튀어나왔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살려줘요 예리언니]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ㅋㅋㅋㅋㅋ 힐러님 처방은 예리언니라고 불러도 못 막아줘 안 돼 돌아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NOOOOOO]
수프 너머로 주이안 씨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공포의 식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