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아까부터 느꼈던 기묘한 분위기가 우리를 휘감는 것 같았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
숨 막히는 위화감에 내가 눈을 크게 뜨려는 순간이었다.
“‘쉬어요. 잠이 보약인 거 알죠?’”
기억 속의 목소리와 눈앞의 주이안 씨의 목소리가 겹쳐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방금까지가 내 꿈이었다는 것처럼 평소 같은 미소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알지알지.”
난 평소처럼 답하면서 그에게서 물러섰다.
주이안 씨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잠이 덜 깨서 헛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
하지만 테이블 위, 잉크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까 멈춰 있던 주이안 씨가 만들어낸 커다란 잉크 자국이 여전히 종이 위에 남아 있었다.
―사락.
주이안 씨는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그 종이를 치워 버렸다.
이제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신유리 헌터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도 평소와 같았다. 아니 오히려.
“오늘 컨디션이 정말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그는 나를 걱정했다. 그러면서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아아아니거든요. 지옥의 수프 사절.”
나도 모르게 내뱉은 난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
‘정말요?’
주이안은 조금 전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기억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숨을 멈추고 있던 신유리 헌터님.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건 설렘이 아니었다.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짧게 숨을 내뱉는 것도, 떨리는 눈동자도.
갑작스러운 제 변화에 놀란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
파르르 떨리는 그 눈동자는 제가 꿈이라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 꿈이길 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주이안은 정답을 말했다.
‘쉬어요. 잠이 보약인 거 알죠?’
정해져 있는 답 같은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그 묘한 교착상태는 풀려 버렸다.
그리고 평소처럼 웃어 주자 그녀는 그제야 안정을 회복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았던 ‘아까’의 흔적은 옆으로 치워 버렸다.
내가 당신을 흔들면 이렇게 되는구나.
아주 살짝만 건드려도 당신은 이렇게 긴장하는구나.
“…….”
주이안은 소파에 앉아 있는 신유리를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 그녀와는 달리, 설렘으로 두근거렸던 제 심장소리를 그녀가 듣지 못했기를, 알아채지 못했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당신이 행복한 게 좋아요.
언제나 그렇게 웃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입술이 바싹 마른 듯했다. 하지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제 마음이 새어나갈 것만 같아서.
내 마음이 당신의 행복을, 안정을 해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주이안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
주이안.
나랑 신재헌보다 두 살 많은 사람.
두 살 차이면 삼시세끼 다 챙겨먹는다 쳐도 밥그릇이 365×2×3개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어른스러운 것 같지?
밥그릇 이천 개쯤이면 저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건 그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이런 서류는 함정이 있는데…….’
그는 나와 신재헌 앞으로 날아온 사기꾼들의 서류를 걸러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덕분에 나를 호갱 잡으려던 길드 놈들은 싹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서류를 보기 싫어해서 한 달마다 몰아 처리하려는 내 매니저 역할까지 자처해 버렸다.
‘아니, 그건 좀 죄송한데.’
‘팀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슥 가져가 버렸다.
‘물론 최종 처리 전에 간략하게 보고할게요. 괜찮죠?’
‘아니 그래주면 저야 머리 박고 고마워해야죠. 근데―’
‘근데 뒤는 안 들을래요.’
그래 놓고 그는 내 일거리를 가져가 버렸다.
그것도 모자라서 신재헌과 소예리 헌터의 것도 슥슥 뺏어가 버렸다.
‘원래 이런 걸 보는 걸 더 좋아해서요.’
그렇게 말한 그는 결국 우리 팀의 비공식 서류 담당이 되어 버렸다.
물론 우리라고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워이, 여러분이 좋아하는 주이안 씨 지금 피곤해서 뻗었거든요? 설마 팬심이랍시고 갈굴 셈 아니지?’
난 집 앞으로 몰려온 주이안 씨 팬클럽이라고 읽고 사생팬이 분명한 놈들을 쫓아내 주기로 했다.
신재헌은 요리를 맡았고, 소예리 헌터는 주이안 씨가 좋아할 만한 흥미로운 힐러 아이템을 가져오곤 했다.
‘이거 봐요. 이걸 이렇게 켜면…….’
얼리어답터 기질이 있는 그녀는 가끔 시제품을 어디서 얻어 와서 써보고는 했는데, 덕분에 주이안 씨가 편해진 적도 있었다.
특히 던전용 특수렌즈가 그랬다.
그건 파티원에게 치명적인 버프나 체력 부족 사태가 오면, 그쪽이 강조되어 보이게 하는 렌즈였다.
주이안 씨는 그걸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아마 아직도 쓰고 있을 거다.
“…….”
난 서류를 정리하는 주이안 씨를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이걸 하고 나서 확실히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혹시나 놓치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급할 때.’
우리가 위급할 때 힐을 못 할까 봐 불안했다는데, 우린 그가 힐 타이밍을 놓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충격에 대비해 미리 힐을 준비해놓기까지 하는 실력 좋은 힐러였으니까.
우리 팀에 탱커가 없는 데에 한몫한 것이 주이안 헌터이기도 했다.
다른 S급 힐러가 들어오면 우리 팀은 못 굴러갈 거다. 주이안 씨의 센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
하지만 여기선 집으로 몰려와서 주이안 씨 보겠다고 와글거리는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으니, 처리해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요리를 해 주기엔, 나 대신 일하는 사람한테 불타버린 계란프라이를 주긴 좀…….
“쉬시래도요.”
주이안 씨는 내가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집중이 안 되는 듯했다.
“알았어요, 안 볼게요.”
난 슬며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 동네에 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사각사각 서류를 처리하는 주이안 씨에게 다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난 그를 보다가 문득 궁금한 걸 물었다.
“근데 단안경은 어디 가고 그냥 안경이에요?”
내가 알기로 그 단안경도 특수효과 있는 장비일 텐데?
내 말에 주이안 씨의 펜이 잠깐 멎었다.
“……이곳에 와서 서류 볼 일이 많아져서요.”
“눈이 피곤해요?”
내 말에 주이안 씨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S급 눈이 피곤할 정도면 대체 사람을 얼마나 굴린 거야? 신전도 블랙이네.”
난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잠깐, 그런 사람을 내가 지금 추가로 굴리고 있는 거네?
“휴가 필요한 건 주이안 헌터님 아니에요?”
내 말에 주이안 씨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지금이 휴가예요.”
단호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
“…….”
묘한 침묵이 흐르고, 나와 주이안 씨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가 웃었다.
“신전에 혼자 있으면 외롭거든요.”
그야 외로움 많이 타는 사람인 건 알지만.
난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했다.
“주이안 씨, 오늘 이상한 거 알아요?”
말도 행동도 다?
내 말에 주이안 씨의 펜이 다시 멎었다. 그는 살짝 입을 벌렸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네. 알아요.”
알아? 난 뻔뻔한 답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다시 내게 향했다. 늘 온화하던 눈동자는 오늘따라 평소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건 아마…….
‘정말요?’
조금 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에게서 풀어내려는 손을 붙잡으려던 그의 작은 움직임도 분명히 떠올랐다.
상대의 움직임에 민감한 내가 그 변화를, 그 거리에서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불안한 듯, 거칠어졌던 숨소리도.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처럼 살짝 떨어졌던 입술도.
‘정말요?’
그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울리는 것 같은 순간.
난 충동적으로 물었다.
“주이안 씨, 나 좋아해요?”
내 말에 주이안 헌터의 갈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