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난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멍청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낯선 천장이라서가 아니다. 낯익은 천장 맞다.
문제는 테이블에 엎어져서 30분만 자려던 내가 왜 이렇게 개운한 상태로 침대에서 깨어났냐는 것이다.
10여 년 전의 기억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지나치게 머리가 맑고 마음까지 평화로운 것이, 이건 마치…….
지각시간 한참 넘기고 잠에서 깨어난 느낌?
순간 소름이 돋아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풀썩!
두터운 이불이 내 움직임을 따라 젖혀졌다.
옷을 살펴보니 일하던 복장 그대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왜 침대지?”
살펴보니 집무실과 연결된 간이 침실이었다.
잠깐 잘 때 쓰는 곳.
헬렌이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서 여기다 옮겨 놨나?
“…….”
그러기에는 E급인데? 그것도 딜러계열도 아닌 것 같았는데?
게다가.
난 무심코 옆의 시계를 보고 기겁했다.
“오후 5시 반이잖아!”
1시 반엔 일어났어야 했다고!
“헬렌!”
밀린 일이 몇 개고 그 네 시간 내에 보내야 할 연락이 몇 갠데!
안 깨웠냐! 도르신? 도도도르신?
―쾅!
내가 간이 침실의 문을 벌컥 열고 나간 순간이었다.
난 평화롭게 오후의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는 집무실을 보면서 멍청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어?”
“일어나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내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주이안 씨?”
다름 아닌 주이안 씨였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앞의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서 쉬세요.”
“아니, 주이안 씨가 여기 어떻게 있어요?”
여기 내 집무실 아님? 사실 잠결에 신전 가서 일하다가 엎어져 잠들었나?
하지만 아무튼 묘한 인연으로 내 간이 침실이랑 주이안 씨 집무실이 연결된 거?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기 왜 있어???”
난 그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가 섰다.
집무실 옮겼나? 그럼 페널티는?
이 인간들이 에페한테 한 번 입 터지더니 드디어 단체로 돌아버렸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주이안 씨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상황파악 덜 된 머리에 주이안 씨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좀 더 쉬세요. 급한 건은 제가 처리할 테니.”
“우우우리 영지 건데?”
그거 막 남이 처리해도 돼?
페널티가 연쇄 폭탄처럼 터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을 번쩍거리며 가려야 할 RP던전 페널티 위기 창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이 어떻게든 에델바이스 저택의 사람들에게 납득되었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괜찮아요. 중요 서류는 헬렌 경이 가져갔으니까.”
그 말에 난 눈을 깜빡였다.
“그럼?”
난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업무용 책상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긴급 팀 편성 자료]
그건 내가 자기 전까지 보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게이트 난이도 상승 사태로 팀이 바뀐 것만 지시하고 있는 듯했다.
“수호기사단장 업무만 제가 대리하고 있어요.”
주이안 씨는 서류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돼요?”
그래도 페널티 안 받나? 난 주이안 씨 얼굴을 살폈다.
주이안 씨는 멀쩡해 보였다.
“네. 아무래도 급한 업무인 데다……, 수호기사단장의 작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제들에게 빠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라서요.”
신유리 헌터님이 누워 계실 때는요.
그렇게 덧붙인 그가 빙그레 웃었다. 난 머릿속이 볶아지는 기분이었다.
“그걸 헬렌이 허락해줬어요???”
“이대로 멈출 수는 없으니까요. 신유리 헌터님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셨고.”
“오.”
그럼 거꾸로 들어서 흔들어서라도 깨웠어야지!
주이안 씨가 안 왔으면 그랬겠지만 이번엔 주이안 씨가 와서 그러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헬렌 경이 융통성 있으신 분이라…….”
주이안 씨가 서류를 넘기면서 말했다.
난 그 말에 멈칫했다.
융통성 없는 건 우리 팀에서 주이안 씨가 최고 아니었어?
하지만 주이안 씨는 오늘따라 뻔뻔해 보였다.
난 그의 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주이안 씨 맞죠? 신재헌 아니지?”
“맞습니다.”
외형변경물약 먹은 신재헌 아니냐?
그가 그 물약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심이 갈 정도였다.
“주이안 씨 생일은?”
“1월 7일……. 근데 이건 신재헌 헌터님도 아는 건데요.”
주이안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그놈 숫자 엄청 못 외워. 가끔 나한테 7월 1일 아니었냐고 물어봐.”
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주이안 씨의 웃음은 진짜였다.
저 부드러운 미소는 신재헌의 얼굴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놈이 노력해도 묘한 썩소밖에 안 나올걸?
“주이안 씨 2년 전에 나랑 설악산 등산했을 때 무슨 일 있었죠?”
“제 ASMR 너튜버랑 만나서 인터뷰―”
자연스럽게 답하던 주이안 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이이이건!
“진짜잖아???”
진짜가 왜 여기 있어? 난 머리를 싸맸다.
“진짜라니까요. 얼른 쉬어요.”
주이안 씨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소파를 가리켜 보였다.
“페널티도 안 받았으니 안심하시고요.”
주이안 씨는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다. 난 결국 그를 보다가 슬금슬금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일은 거의 끝나 가요. 아,”
주이안 씨는 종이를 넘기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신전에서 파악한 결과 동쪽 가문들에 더 많은 게이트가 치중되어 있어서, 사제들을 추가 파견했어요.”
동쪽 가문들이면 대부분 연합 ‘미야’ 소속이다.
“미야 연합에서 게이트를 놓칠 일은 없을 거예요.”
그의 말에 난 좀 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사제들한테 명령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왜 필요했나 했더니, 하긴, 사제 추가 병력은 공문 써야 하지…….
“그것 때문에라도 헬렌 경이 허락해준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던 주이안 씨가 미소 지었다.
“그와는 별개로, 피곤하실 것 같아서 왔어요. 돕고 싶어서.”
그가 손을 펼쳐 보였다.
“가뜩이나 피곤하실 텐데, 서류 보는 것도 안 좋아하실 거고요.”
“그야…….”
정말 너무 적절하게 나타나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고마운데 이상했다.
주이안 씨다우면서도 주이안 씨답지 않은 저 묘한 분위기가.
그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에페를 때려잡고 헤어졌다가 다시 이곳에 그가 올 이유가 없었다.
―드르륵.
난 결국 그의 앞에 의자를 하나 끌어다 놓고 앉았다.
의자 등받이를 주이안 씨 쪽으로 두고, 그쪽에 팔을 걸친 채 턱을 괸 내가 주이안 씨를 살폈다.
“그럼 무슨 이유로 왔어요?”
내 말에 주이안 씨가 멈칫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치료해드릴 겸, 음, 저번에 신세 진 것도 갚으러?”
“신세?”
내 말에 주이안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돌아보고 가셨잖아요.”
말할 때마다 멈칫하는 거 다 보인다.
두뇌 풀가동하는 거 보인다!
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핑계 대고 왔다는 거죠?”
결국 주이안 씨의 손이 멈췄다. 그가 낮게 웃었다.
이제야 좀 주이안 씨 같았다.
“네. 그 핑계 대고 왔어요.”
그러더니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왔더니 던전에 들어가셨다더라고요. 그렇게 무리하고 나서 또 던전을 들어가시면…….”
“그으거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자자잔소리다! 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이번엔 나도 할 말이 있었다.
“C급 던전이 업그레이드된 거라 어쩔 수가 없었어요.”
B급에다가 초짜들 던져 넣을 순 없잖아요?
내 말에 주이안 씨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신유리 헌터님의 수준에는 B급이 쉬워 보이는 게 당연하지만…….”
그는 내가 지금 B급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내게 무리라는 말을 예쁘게 돌려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될 수준이니, 조심하셔야 해요.”
힐링계다운…… 단어 선택이다……. 난 이마를 짚었다.
아마 내가 S급이어도 주이안 씨는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부디 무리하지 말라고.
“알았어요.”
난 결국 주이안 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함정인 줄도 모른 채.
내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주이안 씨가 불쑥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이틀 정도는 일하지 않으시는 걸로.”
“네?”
주이안 씨가 손을 펼쳐 보였다.
“쉬셔야 하지 않겠어요?”
“…….”
이번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 듯했다.
진짜…… 무슨 사람이 이렇게 적절한 때에 우렁각시처럼 튀어나오지?
우렁각시를 원하면서 자긴 했는데 진짜 우렁각시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아니, 이 경우는 우렁총각인가?
“진짜…….”
난 입을 벙긋거렸다.
주이안 씨 일도 바쁠 텐데 여기까지 기꺼이 와서 일을 떠맡아준 셈이다.
에페하고 싸우고 나서도 멀쩡한 척 돌아왔었는데, 힐러의 눈은 속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피곤할까 봐 자기 일도 제쳐두고 달려온 거다.
“진짜 미안해요. 그리고.”
―드르륵!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업무용 책상 뒤로 돌아가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새하얀 로브와 붉은 장식의 천이 팔랑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고마워요! 주이안 씨 최고!”
물론 바깥에 사람이 있으니 크게 외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속삭여 주었다.
놀랐는지 그의 깃펜이 삐끗하면서 서류 위로 미끄러졌다.
난 그의 연갈색 머리 위에 이마를 마구 비볐다.
“사랑해―!”
부드러운 머릿결이 느껴졌다. 한국에 있는 저택에서 종종 했던 짓이었다.
그가 이렇게 우렁각시처럼 나타나서 귀찮은 일을 처리해 줄 때마다.
고마워서.
이럴 때면 주이안 씨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얼굴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돌아보면서 말했다.
‘쉬어요. 잠이 보약인 거 알죠?’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
하지만 주이안 씨는 말이 없었다.
난 그의 옆으로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주이안 씨?”
오늘따라 이상하긴 이상했다.
주이안 씨는 깃펜의 잉크가 종이를 물들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숨도 쉬지 않고 내게 안겨 있었다.
그러다가 물었다.
“정말요?”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답을 원하는 것처럼.
그의 갈색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