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나 광산에 있었는데 상태창 뜨는 거 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소예리 헌터가 안락의자에 몸을 묻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초집중 중간에 안 끊었으면 못 올 뻔했어.”
소예리 헌터의 초집중은 상태창에 뜨지 않는 스킬이었다.
ON/OFF가 가능하지만 버프보다는 ‘상태’에 가깝다고 인식되는 듯했다.
초집중 상태에서는 특정 스킬 효과를 높이는 대신, 헌터 채팅 등 다른 창이 보이지 않고 시야가 좁아진다고 했다.
주이안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그러면서 예의 그 침대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주이안 씨의 치료 전용 침대.
그러고는 나와 신재헌을 쳐다보았다. 얼른 오라는 듯이.
잔소리 스팟이다……!
긴장한 내가 말했다.
“나이순으로 치료해주세요.”
난 12월 10일생.
신재헌이 11월 19일생으로 먼저 태어났으니까 나이순으로 치료한다면 저놈이 먼저 치료받게 된다.
“이름순으로 치료해주세요.”
그런 내 옆에서 신재헌이 지지 않고 바로 말했다.
가나다순으로 보면 내 이름이 먼저니까.
“…….”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빨리 먼저 안 가? 아까 그 무지막지한 스킬 막은 게 누군데? 지금 너 뼈마디 다 쑤시는 거 다 알거든?”
“그놈한테 중상 입히겠다고 순간가속 썼다가 굳어서 얻어맞은 거 다 봤거든?”
우리가 기 싸움을 할 때였다.
“…….”
눈썹을 치켜 올린 주이안 씨가 우리 사이에 섰다.
[헌터 주이안(S) ‘야전병원(L)’ 설치 준비도 : 5%]
[헌터 주이안(S)의 능력치를 영구소모하여 광역 회복 지대를―]
“으아악!”
우리는 상태창이 다 뜨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거 주이안 씨 능력치 깎는 거잖아!
“아.”
그리고 벌떡 일어나다 말고 난 비틀거렸다.
아까 놈한테 공격당한 충격이 확실히 컸는지 뒷목을 타고 찌르르한 통증이 온 탓이었다.
신재헌이 날 보자마자 말했다.
“이놈입니다!”
그는 재빨리 날 들어다 침대에 내려놓았다. 던질 것처럼 굴더니 내려놓는 손은 상냥했다.
[헌터 주이안(S) ‘야전병원(L)’ 스킬 준비 취소]
그제야 주이안 씨가 스킬 사용을 중지했다.
“그러게 말 좀 듣지.”
소예리 헌터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뭐라고 따질 틈도 없이 내 위로 주이안 씨의 집중치료 스킬이 쏟아졌다.
“어쩌다가 그런 걸 만난 거예요?”
내가 입을 다물자, 주이안 씨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화났다! 이 사람 화났어!
“아니, 그, 난 그냥 마실 나갔거든요?”
원래 그런 놈하고 혼자 마주칠 계획은 정말 추호도 없었다.
“채팅 봐서 알잖아요, 그죠?”
난 ‘모든 위험은 내가 떠안고 죽겠어!’ 하는 멍청한 희생양 포지션엔 관심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위험은 최소화한다.
그게 내 지론이었다.
이번엔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다.
어설프게 시간을 끌려다가 내가 죽고 소예리 헌터에게 놈이 가버린다면, 소예리 헌터도 나도 죽는다.
그럼 그것만큼 큰 재앙이 없었다.
적어도 내 쪽에서 에페에게 중상은 입혀 놔야 했다.
죽어도 하나만 죽어야 할 거 아니야?
“누군지는 알겠어요?”
그때 신재헌이 물었다. 그의 푸른 눈이 오늘따라 더 짙어 보였다.
“이름은 에페라고 했어요.”
“에페?”
신재헌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그 이름을 몇 번 입에서 굴려 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동제국 검사 아닌가?”
“아까 동제국 찾긴 하던데요.”
소예리 헌터가 거들었다. 죽기 직전에 동제국을 위하여 어쩌고 하긴 했지.
“어떻게 알아요?”
혹시 유명한 놈?
하긴 S급한테도 랭크가 안 보일 정도로 강했으니 세계관상 유명한 놈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히든 루트가 개방되어 튀어나온 놈이라고 해도, RP던전에서는 개연성 없이 보스 몬스터가 출현하는 일은 없으니까.
“전대 서제국 황제가 그놈한테 죽었거든요.”
“오.”
황가 입장에서는 본의 아니게 복수한 셈이었다.
“근데 그놈이 왜 신유리 헌터님한테 갔지?”
오려면 나한테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한 신재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주이안 씨도 눈을 가늘게 떴다.
“RP던전 자체가 모든 파티원이 한 번씩 위기에 처하도록 설계된 걸까요?”
그의 의견에 신재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멸망계시록에 떴겠죠. 우리 이름 나왔을 때.”
“음…….”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주이안 헌터가 침음할 때였다.
“찾았다.”
멸망계시록을 펼쳤던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우리가 돌아보자 그녀가 멸망계시록을 우리 쪽으로 돌려 보여 주었다.
[복수심에 불타던 황태자는 동제국의 전설의 검 ‘에페’를 만난다.
그의 능력을 시험할 겸, 서제국의 수호기사단장을 죽이라고 하지만 그것마저 실패로 돌아간다.]
“……시험할 겸?”
신재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다른 교황도 마탑주도 황제도 암살에 실패했으니까, 일단 에페가 어느 정도 능력을 가졌는지 알아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요?”
소예리 헌터도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야……. 폐급 일반인에서 이 정도면 개천에서 용 났네.”
난 황당해서 뇌까렸다.
[헌터 주이안(S) ‘집중치료(SS+)’ 스킬 준비도 : 100%]
그때 내 머리 위에서 치유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몸이 훨씬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도 진짜 우리 팀 와서 온갖 고생 다 한다.
“고마워요, 주이안 씨.”
난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주이안 씨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주이안 씨가 미소 지었다.
“매일 고마워하고 싶어서 다치는 건 아니죠, 신유리 헌터님?”
……아직 화가 덜 풀린 듯했다.
난 슬그머니 신재헌을 침대로 밀어 넣고 화난 힐러의 앞을 탈출했다.
“아무튼 다들 고마워요.”
진짜 한숨 돌렸다. 하마터면 다진 고기로 발견될 뻔했으니까.
빨리 빌어먹을 랭크를 올리든가 해야지.
그렇게 뇌까릴 때, 주이안 씨가 고개를 저었다.
“미리 채팅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신재헌이 말을 받았다.
그건 공감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싸하더라니.
“우리 유리 헌터님은 감도 좋지~”
소예리 헌터가 예쁘게 웃었다. 그러다가 멸망계시록을 넘겨 보았다.
“뒷내용도 있답니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안 좋은 내용은 아닌 듯했다.
우리의 시선이 다시 멸망계시록으로 모였다.
[한편 동제국과 서제국의 격차는 커져만 가고, 동제국의 황태자는 실패를 거듭하여 평판이 나빠진다.
이에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쌤통이네.”
하긴, 아까 그놈이 제국 최고의 검이라며?
그럼 무라도 썰어 왔어야 했는데 검이 부러져 버렸으니 동제국 귀족들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가 되었다.
애초에 그놈도 정치엔 관심 없고 권력에 취해 사는 놈이었다며?
“신재헌 헌터님?”
그때 주이안 씨가 신재헌을 불렀다. 돌아보니 신재헌은 멸망계시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뚫리겠어요, 응?
“안 누워?”
내 말에 신재헌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주이안 씨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
[헌터 주이안(S) ‘집중치료(SS+)’ 스킬 준비도 : 7%]
다시 스킬이 올라가는 게 보였다.
“괜찮아요?”
급히 온 탓일까, 주이안 씨는 유독 피곤해 보였다.
하긴 집중치료 스킬 자체가 주이안 씨의 정신력을 갉아먹는 스킬이니 자주 쓰는 게 좋을 리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주이안 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밤중에 이게 무슨 난리냐, 진짜.”
난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페널티 위기 창 한두 개씩 달고 달려왔을 게 분명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다들 적당한 때에 와 주어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원래 죽었어야 했다. 예상대로라면 그랬다.
그 스킬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난 스킬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킬 사용 시 2초간 데미지 50% 감소]
가장 아끼는 것 앞에서 99% 데미지 감소]
아까 완성된 문장을.
가장 아끼는 것……. 아끼는 사람들.
당연히 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미쳤냐!’
저 문장이 활성화된 순간.
그 순간에는…… 신재헌이 뒤에 있었다.
난 그를 돌아보았다. 눈을 감은 그는 안도한 표정이었다.
***
급히 빠져나온 만큼 모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신재헌이 별장이라고 주장하는 안전가옥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난 페널티 없당!]
다행히도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운 소예리 헌터는 갑자기 자리를 비웠어도 페널티가 없었던 듯했다.
그럼 다른 두 사람은?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의 뜻으로 해결된 것 같네요]
하긴, 저쪽은 뭘 하든 신의 뜻 갖다 붙이면 그만이었다.
신시안 만세. 교황 만세.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신재헌 헌터님은?]
그런데 이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설마?
난 불안한 마음으로 채팅을 기다렸다.
[…….]
다른 두 사람도 긴장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신재헌의 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안 받았어요]
다행이었다. 대체 어떻게 피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물론 이쪽도 페널티 위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RP던전 페널티 위기! : 이유 없이 숲을 파괴한 세니아]
몰래 나간 건 둘째 치고 숲이 반이나 아작났으니 해명이 필요한 건 당연했다.
게다가 세니아의 성격상 화가 난다고 숲을 아작낼 리는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되신 일인지…….”
그럼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낼 수밖에 없다.
주이안 씨가 치료해주었다고 해도 몰골이 엉망인 건 어쩔 수 없으니, 이야기를 지어내기엔 좋았다.
“강한 몬스터가 있었어.”
갑자기 튀어나온 불청객이란 점에서 에페도 몬스터라면 몬스터랄 수 있겠다.
“얼마나 강하기에……?”
“좀 많이 고전했어.”
“그걸 홀로 상대하신 겁니까?”
헬렌은 금방이라도 잔소리를 쏟아낼 기세였다.
난 재빨리 말했다.
“등 돌려 도망갈 만큼 만만한 놈도 아니었고, 민가로 가게 둘 순 없었으니까.”
헬렌이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RP던전 페널티 위기! : 세니아의 무모한 행동]
내용은 바뀌었지만 페널티 위기 창은 그대로였다.
아니, 세니아가 길 가다 마주친 몬스터랑 좀 싸울 수도 있지!
물론 세니아라면 백작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맞게 물러날 방법부터 모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니까?
이럴 땐!
프로 S급 헌터의 경험을 살릴 때였다.
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