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공격을 받아낸 손이 저릿했다.
천상의 견갑 덕에 잔상을 한 번에 많이 쓸 수 있었던 게 천운이었다.
간신히 공격을 막을 수 있었으니까.
[마력 : 41023 / 54630]
하지만 마력이 너무 많이 닳아 버렸다.
마력이 있어야 잔상을 쓴다는 걸 생각해 보면 비상사태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 B급(딜러)
- 버프 : 잔상(SS+)]
하지만 내 채팅이 다급하게 끊긴 점, 그리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버프창을 보면 팀은 분명히 이쪽 상황을 알아챌 것이다.
요컨대 이놈을 잡아 족치지 못하면 버티기만 해도 된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바로 근처엔 소예리 헌터가 있었다.
[…….]
하지만 아까부터 말이 없는 게, 설마…….
초집중 상태인 건 아니겠지?
소예리 헌터의 ‘초집중’ 스킬은 다른 스킬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대신 시야가 극히 좁아지는 스킬이다.
어느 정도냐고 묻는 내 말에 소예리 헌터는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
‘옆에서 한일전 축구 봐도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정도?’
요컨대 뵈는 게 없다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불안한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챙!
놈의 검이 다시 부딪쳐 왔다.
[–291012]
스쳤는데도 데미지가 십만 단위였다.
체력의 1/4가량이 순식간에 증발한 셈이었다.
“미꾸라지같이 피하는군!”
놈이 소리를 질렀다.
저 속도는 적어도 S급이다.
내가 S급의 속도에 익숙한 잔상 딜러가 아니었다면 절대 피하지 못했을 거다.
“…….”
난 놈의 검 끝에 집중했다.
숲속으로 들어가는 게 상대하기 좋으려나?
아냐, S급 스탯이면 나무를 종잇장처럼 베어 버릴 거다.
그렇게 시야가 가려지면 불리해지는 건 오히려 이쪽.
차라리 적당히 나무가 있는 숲 초입에서 적치물을 이용하여 상대하는 게 나았다.
“죽어라!”
식상한 대사를 외치며 쇄도해오는 놈은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았다.
SS급 수학선생님만큼 강하고 빠른 검이다.
문제는 수학선생님의 컴퍼스처럼 공격 방식에 한계가 있는 무기가 아니라, 날이 바짝 선 검을 들고 있다는 점.
저걸 정면으로 막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쌔액!
고개를 숙여서 피하자 머리 위로 살벌한 파공음이 흩어졌다.
주변의 나무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공격이 오는 걸 보고 피하면 늦는다!
내 시선이 놈의 손과 팔에 집중되었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 어디에 힘이 들어가는지를 보고, 미리 피하는 게 나았다.
놈의 손에 힘이 실리는 순간. 난 왼쪽으로 몸을 과감하게 틀었다.
―후웅!
그리고 내가 있던 곳 오른쪽으로 검풍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다.
―콰가가가각!
그리고 그 검풍에 휩쓸린 나무는 허리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우지끈 뽑혀 뒤로 날아갔다.
완전 괴물이잖아!
“카르만은 검의 나라라더니, 미꾸라지밖에 없는 것이냐!”
놈은 분노하더니 내게 다시 검을 내질러 왔다.
이번엔 오른쪽!
난 놈의 움직임을 보고 미리 몸을 피했다.
이것도 저쪽이 SS급 이상이라면 오래 통할 작전은 아니었다.
그럼 통하는 사이에 잡아야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B)
체력 : 1004213 (+55000)
근력 : 11823 (+10000)
마력 : 14230 (+40400)
민첩 : 7991 (+31125)
지구력 : 5259 (+10200)
방어력 : 3551 (+1000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특수 버프 “천상의 힘(S)” : 스킬 발동 속도 10% 증가, 받아들이는 버프 효과 10% 증가]
B급과 S급의 차이는 까마득하다.
근데 저놈은 딱 봐도 S급 초과였다. 원래 능력치 들고 와야 붙어볼 만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정도 차이가 나면 튄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사망이었다.
“재앙을 소환한 죄를 묻겠다!”
놈의 검이 다시 쇄도해 왔다.
뭔 죄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몸을 잘못 틀 뻔했다.
“그거 내가 소환한 거 아니거든!”
미쳤냐!
나도 RP던전 안에서 게이트 사태 만나는 이런 양파 같은 전개 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놈은 믿지 않는 듯했다.
“문답무용!”
그러면서 다시 검을 내질러 왔다.
[매크로 ‘지금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 사용합니다.]
[잔상(SS+) - 잔상(SS+) 스킬을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 ‘수룡의 가시비늘(B)의 잔상’의 잔상]
[빠른 스킬 중첩으로 속도 보너스 적용(10%, 헌터랭크 상한)]
[빠른 스킬 중첩으로 데미지 보너스 적용(10%, 헌터랭크 상한)]
스킬 매크로 이름 따위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십수 개의 잔상과 놈의 검이 스쳤다. 맞부딪친 것도 아니고 흘려보내느라 스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한 힘을 받아 잔상(SS+)효과가 해제됩니다.]
[지나치게 강한 힘을 받아 잔상(SS+)효과가 해제됩니다.]
……
시스템창이 도배되는 게 보였다.
[잔여 체력 : 50% 이하]
더불어 눈앞도 번쩍거렸다.
“흐음!”
놈은 바이야 백작 이종사촌이라도 되는지 기합과 함께 검을 가로로 넓게 휘둘렀다.
―타탁!
난 옆의 나무를 밟고 가볍게 위로 뛰어올라 피했다.
―콰지직!
그리고 내가 밟았던 나무는 나 대신 공격을 받고 유명을 달리했다.
이야, 숲 다 날아간다!
괜히 몬스터들이 자취를 감춘 게 아니었던 듯했다.
“끝이다!”
놈은 내가 허공에 뜨자 예상대로 이쪽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받아치기(C) 효과 적용 중]
[흘려보내기(A) 효과 적용 중]
난 그 검을 살짝 쳐냈다. 잔상 몇 개가 다시 박살 나는 게 보였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씨)>>> 지금…….]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까 그…….]
뭐라고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가는 게 보였지만 볼 틈이 없었다.
―쿠콰쾅!
치켜 올라갔던 놈의 검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근처의 나무둥치들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뽑혀 날아가는 게 보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다른 자들이라면 절망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거기서 묘한 희망을 느꼈다.
비정상적으로 넓고 크게 휘둘러지는 검.
상대가 나처럼 체구가 작은 편이라면 저렇게 검을 크게 휘두를 이유가 없는데?
하지만 저놈은 습관적으로 검을 크게 휘두르고 있었다. 난 저런 습관을 가진 자들을 알고 있었다.
중국의 헌터들.
뭐든지 큰 나라답게 출현하는 몬스터도 괴물같이 크다 보니, 검을 크게 휘두르는 습관이 든 자들이었다.
다른 나라의 헌터들과는 반대로 대형 몬스터는 잘 잡지만 소형 몬스터에는 오히려 쩔쩔매는 자들.
요컨대 이놈은 커다란 몬스터만 상대해온 것이 분명했다.
몬스터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이 RP던전 세계관을 생각해 보면, 어디 산중 깊은 곳에서 쑥쑥 자란 몬스터들만 상대해본 게 분명했다.
요컨대 대인전에는 약하다는 것!
“!”
놈이 다시 가로로 검을 그어 왔다.
난 그걸 간단히 뛰어서 피했다.
―타탓!
그리고 파헤쳐진 땅 속에서 드러나 있는 굵은 나무뿌리를 박차고 놈에게로 파고들었다.
“!”
소형 몬스터를 상대하지 못하는 중국 헌터들과 똑같은 반응이다.
놈은 내가 파고들 줄 몰랐는지 당황하는 게 보였다.
―쩡!
놈은 간신히 검을 틀어 내 공격을 막았지만, 어깨에 생채기가 나는 걸 피할 순 없었다.
난 그 사이를 다시 파고들었다.
―쩡!
놈이 빠르게 대응해왔다.
아까와는 달리 제대로 된 검로를 가지고 휘둘러져 오는 검은 육중했다.
[받아치기(C) 효과 적용 중]
[흘려보내기(A) 효과 적용 중]
[-102285]
받아치고 흘려보낸 데다 잔상 몇 개를 박살냈는데도 들어오는 데미지는 10만씩이나 됐다.
입매가 뒤틀렸다.
[잔여 체력 : 40% 이하]
시스템창은 무시해 버렸다.
어차피 한 번 죽어도 주이안 헌터에게는 소생 스킬이 있다.
게다가.
[히든 루트 ‘에페’와 마주쳤습니다!]
아까 그 시스템창.
그리고 재앙 어쩌고 하는 걸 보면 답이 나왔다.
저놈은 RP던전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요컨대 이 RP를 공략하고 있는 우리 네 명만 노린다는 소리.
다시 말해서 내가 처리하거나 적어도 중상이라도 입히지 못하면 다음 순서는 다른 헌터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아마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여기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소예리 헌터.
그런데 하필이면 그녀는 지금 초집중 상태인 듯했다.
게다가 광산을 연구하고 있을 테니 튈 곳도 없는 광산 안쪽에 있을 거다.
소예리 헌터가 아무리 실력 있는 보조계 S급 헌터라고 해도, 이런 S급 이상의 속도가 빠른 딜러와 맞붙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소예리 헌터한테까지 이놈을 멀쩡하게 보내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중상은 입혀야 한다.
난 놈이 움직이는 걸 보다가, 놈을 숲 안쪽으로 살살 유인했다.
최대한 보너스 능력치를 당길 수 있는, 어두운 곳으로.
[암순응(S)이 활성화됩니다.]
[그림자 속의 무법자(S)가 활성화됩니다.]
시스템창을 확인하자마자 난 놈에게 외쳤다.
“동제국에서 보냈나!”
내 말에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놈에게 할 말은 없다!”
대신 벼락같은 외침과 함께 이쪽으로 파고들었다.
어차피 대답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놈이 이쪽을 공격하길 기다렸던 거지.
[매크로 ‘지금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 사용합니다.]
[잔상―]
시스템창 수십 개가 눈앞을 어지러이 수놓았다. 그리고 그만큼의 잔상 역시 놈을 덮쳤다.
“!”
그림자 속의 무법자. 어둠 속에서 3배의 데미지 보너스를 주는 스킬.
그리고 암순응. 어둠 속에서 치명타를 가할 확률이 올라가는 스킬까지.
거기에 수십 개의 잔상이 덮이자 놈도 무시할 수 없었는지 자세가 흐트러졌다.
―푸욱!
그리고 잔상 하나가 그 틈을 파고들어 놈의 팔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대로 목까지 베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탓!
욕심을 부리는 대신 난 뒤로 뛰어올랐다.
―쿠콰콰쾅!
그 직후 내가 있던 자리에 놈의 검이 쑤셔박혔다.
폭음이 들릴 정도로 거친 검이 흙을 튕겨 올렸다.
흙먼지가 눈앞을 뒤덮는 순간.
[경계태세(A)를 사용합니다.]
이건 세니아에게 원래 있던 스킬이었다.
[전신의 감각을 일깨웁니―]
시스템창이 뜨기도 전에 그 위로 빨간 시스템창이 떴다.
[전방 기준 북북서 방향에서 적 침습]
북북서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그쪽으로 몸을 틀어 검을 들이댔다.
―태앵!
내가 내리그은 검이 놈이 휘두른 검의 진로를 간신히 막아내는 게 보였다.
“실력자로군.”
남자가 뇌까렸다. 이쪽에서 할 말도 비슷했다.
히든 루트가 이런 사기 필드보스인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진작 저택에 박혀 있었……으면 저택 살림살이랑 사람들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들 때문에 헌터팀에서 지원도 못 왔을 거고.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하아!”
난 답하는 대신 놈에게 검을 빠르게 찔러 넣었다.
“!”
아까 공격이 치명적이긴 했는지, 놈은 그때와는 달리 몸을 빼서 내 공격을 완전히 피해냈다.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헌터의 생존법. 적에겐 없고 내겐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라.
[수룡의 가시비늘의 검집(B)]
놈에겐 없고 내겐 있는, 인벤토리.
난 인벤토리에서 검집을 꺼내 빠르게 집어 던졌다.
놈의 눈에는 내가 허공에서 검집을 꺼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RP던전 페널티 위기! : 비정상적인 경로로 물건 입수]
헌터 생존법 둘.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땐 고민하지 말 것.
난 RP던전 페널티 위기 창을 무시한 채 스킬을 켰다.
[순간가속(SS)을 사용합니다.]
[3초간 움직임이 3배로 빨라집니다.]
[이후 5초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원래는 안 쓰려고 했지만 이판사판이었다.
3초 내에 끝낸다.
끝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