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며칠 후.
그동안 내겐 다소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에델바이스 가가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는 것.
그야 게이트 수십 개가 나타났던 게 순식간에 처리됐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게이트가 폭증해서 불안해하던 영지민들도 빠른 처리에 안심했는지, 분위기가 좋아졌다.
이제 이 뒤로 열릴 게이트는 모조리 홀딩이다! 와라, 동제국!
더불어 마력석 광산 채굴이 시작되면서 재정이 본격적으로 든든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야 역시도 변화가 있었다.
비록 이번 텐치아 백작 축하 연회에 주인공은 없었지만, 미야가 얻은 건 많았다.
마탑과의 공식적인 협정.
‘폐하께서 혹여 불편해하시진 않을는지…….’
물론 마탑과 손을 잡기 전에 그렇게 걱정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미야랑 마탑이랑 협정 맺을게요?]
황제 직통 일방통보 시스템!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게이트 잡는 데에 마법사 빌려달라고 하려고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
그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ㅇㅋ 알았어요]
그 답을 들은 직후 나는 미야 사람들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저희의 충정을 의심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내 확신에 찬 말에 미야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폐하의 눈과 귀는 이미 제국의 이곳저곳에 놓여 있습니다. 저희가 진심으로 그분을 모신다면 그분께서 저희를 의심하실 일은 없겠지요.’
왜냐면 내가 다이렉트로 정보를 갖다 꽂을 거거든요.
……라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난 오글거리는 말을 갖다 붙여 댔다.
사실 말하면서도 멍소리란 거 알고 있었다.
세상 어떤 황제가 뭉치는 귀족들을 편히 볼 수 있단 말인가?
행복회로 조지게 돌리는 거지, 뭐.
하지만 미야의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오오, 역시……!’
‘황제 폐하 만세!’
‘에델바이스 백작의 충심은 반드시 폐하께 닿을 것입니다!’
충심은 모르겠고 채팅이 닿기는 했다.
여하튼 감동의 도가니탕에 너무 쉽게 빠지는 미야의 귀족들을 보면서 난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저런 단순한 뇌로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하지만 페널티 안 주고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난 다행이었으므로 곱게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그 결과 내 영지도, 미야도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어디 보자.”
난 시스템창을 펼쳤다.
“게이트 처리도 거의 다 됐고. 나머지도 몇 시간 후엔 다 깰 것 같은데.”
[현재 공략 중인 게이트 : 2개]
이것들만 끝내면 이번 ‘서브 퀘스트 : 영지 관리’는 클리어하게 된다.
다 깨고 나서부터는 계획대로 게이트 홀딩 준비하면 되고.
그럼 43개의 게이트를 처리했으니 개당 500코인을 획득, 총 21500코인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럼 거의 7만 코인이 있는 건데.
“흐음.”
이 정도 모였으면 당연히 ‘은하 서버 스킬 열쇠’나 ‘은하 서버 인벤토리 열쇠’로 내가 갖고 있던 스킬이나 아이템을 갖고 오는 게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저번처럼 외형 변경 물약 같은 걸 무지막지하게 살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어느 정도의 코인은 남겨 둬야 했다.
“장비, 아니면 스킬?”
쓸모 있는 스킬이야 차고 넘친다.
하지만 코인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비상시에 코인이 없어서는 곤란하니, 스킬이든 열쇠든 하나만 사면 될 것 같은데.
“음.”
어차피 잔상 스킬은 있다.
다른 스킬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지금 필요한 건 좀 쓸모 있는 장비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B)
체력 : 1004213 (+55000)
근력 : 11823 (+10000)
마력 : 14230 (+10400)
민첩 : 7991 (+10005)
지구력 : 5259 (+10200)
방어력 : 3551 (+1000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일일퀘스트와 잡다한 퀘스트로 든든하게 쌓인 능력치.
이 정도면 B급 중에서도 최상위의 능력치였다.
SS+급 장비만 아니라면 내가 쓰던 장비 중 어지간한 건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동네 갑옷은 아무리 봐도 능력치가 너무 구리단 말이지.
“일도 거의 끝냈고…….”
[현재 공략 중인 게이트 수 : 1]
벌써 그 사이에 하나가 끝난 모양이었다.
기사 지원자 팀마다 클리어 시간 편차가 큰 탓에, 난 먼저 던전을 클리어한 팀의 보고를 받아 평가를 끝낸 상태였다.
1차 통과자와 탈락자도 선별했으니, 마지막 팀만 나오면 기사 지원자들도 어차피 쉬어야 한다.
게이트가 한 번에 넘어갔으니 한동안 여기에 게이트도 안 뜰 거고.
그럼 모처럼의 휴가!
휴가엔 뭐? 쇼핑!
“좋아, 이번엔 인벤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했다!
[‘은하 서버 인벤토리 열쇠’를 20000C에 구매하시겠습니까?]
난 가볍게 YES를 선택했다.
[‘은하 서버 인벤토리 열쇠’를 구매하였습니다.]
[잔여 Coin : 29213]
사고 보니 조금 걱정되기는 했다.
[은하 서버 인벤토리 열쇠(S)
- 은하 서버에 저장된 ‘신유리(S)’의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무작위로 1개 가져옵니다. (1회용)]
무작위. 그 말인즉슨 내 아이템창에 있던 던전산 육포 아이템도 포함된다는 소리다.
물론 육포 맛있고 좋지.
그런데 굳이? 2만 코인을 주고 먹을 맛은 아니거든요?
난 심각한 얼굴로 열쇠를 노려보았다.
저번에도 쓰잘데없는 스킬 두 개가 나왔던 기억이 났다.
물론 그 뒤로 어두운 데에 갈 일이 많아서 ‘암순응’과 ‘그림자 속의 무법자’ 스킬은 잘 써먹은 셈이었지만, 육포는 맛있는 거 말곤 기능이 없다고!
“내가 왜 인벤에서 식도락을 즐겼지?”
신재헌 다음으로 맛있는 것에 환장했던 게 나였다.
아니, 이 험난한 세상 먹는 낙으로 살지 그럼 뭘로 살아?
아무리 던전 안이라도 잘 먹어야 힘이 나지 않겠어?
……라는 이유로 내 인벤토리의 1/3은 음식이었다.
Noooooo…….
어디 물 떠놓고 빌기라도 해야 하나?
그래도 장비가 몇 갠데 먹을 게 뜰까?
“에라, 모르겠다!”
망하면 몬스터 때려잡아서 다시 2만 코인 벌지, 뭐!
[은하 서버 인벤토리 열쇠를 사용합니다.]
[은하 서버에서 ‘헌터 신유리(S)’의 인벤토리 목록을 불러옵니다……]
제발! 육포 안 돼, 돈가스 안 돼, 기타 먹을 것 안 돼!
로딩은 잠깐일 텐데도 길게 느껴졌다. 난 그 사이 투명한 시스템창 너머로 이상한 걸 보았다.
“?”
그건 처음 보는 흑발의 남자였다. 가볍게 걸음을 떼는 남자를 처음 보는 거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기사단 선발 시험 중이고 외부인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상하지 않은데…….
……저택 한가운데에?
[……]
머리 위에 아무런 랭크도 떠 있지 않았다.
적어도 A급 이상이라는 소린데, 그런 자가 내 저택에 들어왔다면 난 이미 보고를 받았어야 했다.
느낌이 묘한데.
“누구지?”
난 인벤토리 로딩이 돌아가는 사이 설렁줄을 잡아당겨 집사를 불렀다.
“예, 주인님.”
“방금 밖에 지나간 검은 머리 남자, 누군지 알아봐.”
눈을 크게 뜬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 나갔다.
그 사이 인벤토리 로딩이 끝났다.
난 시스템창을 보기 전에 숨을 들이마셨다.
먹을 거 안 된다. 알지?
그리고 눈을 뜬 순간.
[아이템 획득 : 천상의 견갑(S)]
“오.”
눈을 꽉 감았다 뜬 난 순간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집사 쫓아온다! 안 돼! 페널티 안 돼!
숨을 참은 난 주식 상한가 친 소예리 헌터처럼 주먹을 치켜올렸다.
나이스!
방어력과 체력이 든든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이 친구에게는 아주 좋은 기능이 있었다.
[천상의 견갑(S)
- 민첩성 +21120, 마력 +30000
- 특수 버프 : 천상의 힘(S)]
[천상의 힘(S) : 스킬 발동 속도 10% 증가, 받아들이는 버프 효과 10% 증가]
나한테 딱인 아이템이었다.
내가 SS급 아이템으로 둘둘 말고 다닐 수 있음에도 어지간한 던전에서 이 견갑을 고집하는 건 이 ‘천상의 힘(S)’ 때문이었다.
‘쓰면 몸만 축나는 거 아냐?’
‘어차피 랭크가 높으면 속도는 빠르고, 일정 속도 이상 가면 피부만 찢어지는데.’
실제로 속도 계열의 스킬을 쓰는 헌터들은 이 갑옷을 쓰레기 취급했다.
그들은 몸으로 직접 공기 사이를 갈라 공격하다 보니,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면 오히려 자신의 몸에 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잔상을 쓰는 나라면 얘기가 달랐다.
잔상은 공기저항을 받지 않으니까.
그야말로 신유리 전용 아이템이라고 볼 수 있겠다.
“흐음.”
오늘 뽑기 운 좋다?
이따 퀘스트 클리어하면 다시 4만 정도 들어올 텐데, 몇 개 더 가져와 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서브 퀘스트 : 영지 관리’ 클리어!]
[보상 : 21500C (게이트 43개 클리어)]
타이밍 좋고! 내가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띠링!
눈앞이 번쩍였다. 갑자기 회색으로 물든 시야에서 색을 유지하고 있는 건 시스템창뿐이었다.
뭐야?
멈칫했을 때였다.
[히]
히? 히 뭐? 누가 웃어? 웃겨?
시스템창이 히히덕대기도 한단 말인가? 너도 내가 천상의 견갑 가져온 게 좋아?
어이없는 생각까지 드는 사이 글자가 하나 더 떠올랐다.
[히 든]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손으로 쓰듯 하나하나 나타난 글자는.
[히 든 루 트 개 방]
뭐?
[현재 서제국 게이트 장악도 : 82%]
[현재 동제국 게이트 장악도 : 18%]
[게이트 장악도 차이 60% 이상으로 ‘연약한 시한부 영애에 빙의해버렸다(L/RP)’ 던전의 히든 루트 진입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뭐? 아직 제대로 게이트 홀드하지도 않았는데?
[던전 클리어 시 기본 보상이 2배로 지급됩니다.]
그러더니 눈앞을 물들였던 회색이 다시 사라지고, 주변의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 마지막으로 뜬 시스템창을 보자마자
“히든 루트?”
기본 보상이 2배로 지급된다고? 그럼 L급 보상이 두 배라는 뜻?
눈이 돌아가기 전에 일단 이성은 차려야 했다.
L급 던전에서 히든 루트라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대체 뭐가 바뀐 거지?
하지만 시스템창이나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뀐 건 없어 보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히든루트?]
다들 같은 시스템창을 본 모양이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주변에 특별하게 달라진 점이 있나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없는데]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그렇다고 이 RP던전이 L급에서 더 높은 미지의 등급으로 올라간 것도 아니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래서 뭐가 달라진 건데?]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때까지는 없었다.
며칠 후, 난 그 질문의 답을 알게 되었다.
하필이면, 혼자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