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96)화 (96/218)

96화

이 장악도 시스템은 저번에 보니 이러했다.

일정 기간 동안 처리된 게이트는 시스템에 기록된다. 그 수와 랭크가 함께.

그리고 주기적으로 그와 똑같은 수준과 숫자의 게이트들이 상대 제국에 열리는 식이었다.

주기는 일주일 정도?

우리 서제국에서 F급 게이트 20개를 없앴다면 일주일 후엔 동제국에서 F급 게이트 20개가 열린다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나타나는 족족 처리하면 게이트 장악도 차이를 벌리기가 힘들어진다.

왜냐고?

이렇게 자잘하게 넘기면 저쪽에서도 자잘하게 넘어오고, 이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 아닌가?

상황을 뒤집을 터닝포인트가 필요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이번에 우리 영지에 게이트가 유독 많았거든요? 다른 영지도 그럴 것 같은데]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맞아요 바이야령도 그렇고 대체로 게이트가 많아졌어요]

때가 딱 좋다는 말이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럼 이번에 게이트 넘기고 나서, 다음에 게이트 넘어오면 대기 타죠]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대기?]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홀드하자고요?]

‘홀드한다’.

게이트 내에서는 몬스터들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한 번에 쓸어버리는 걸 뜻했다.

주로 신재헌 같은 광역기가 있는 딜러들이 쓰는 사냥방식이었다.

물론 여기엔 선제조건이 좀 필요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눈치빠른놈2)>>> 다음에 넘어오는 게이트들을 처리하지 않고 홀드하다가 한 번에 처리해서 넘기자는 이야기 같은데, 맞나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넵 그겁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눈치빠른놈2)>>> 게이트 관리 인력이 안 부족할까요?]

그 생각을 내가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보고 금방 터질 것 같은 건 처리하고, 며칠 버틸 수 있는 건 기다렸다가 한 번에 처리하는 거죠]

동제국과 서제국이 다른 점.

동제국은 일단 게이트에 대한 지식 수준이 떨어진다.

게이트를 아무리 꼬나보고 있어도 이게 언제 터질지 제대로 계산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게이트에 이골이 난 우리 팀이 있는 서제국은 달랐다.

정밀한 계측기가 있는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며칠 내로 게이트가 터질지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아 그래서 게이트 장악도 낮은 상태에서 한 번에 뒤집자?]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넹 어차피 60% 간격 벌린 채로 클리어해야 하니까]

난 서브 퀘스트 창을 켜 보았다.

[게이트 장악도가 60% 이상 높을 경우, 보상 레벨+3]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문장을 보면서 전율했다.

L급 RP던전에 떨어져서 개고생을 했으면 뽕을 뽑아야 할 것 아닌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소예리 헌터는 감탄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딜러의 뇌를 무시하지 마라!

어디든 딜 넣는 것이라면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게 딜러니까!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다 좋은데 문제는 게이트를 처리할 현장 인력과 실시간 연락이 가능한가예요]

“음…….”

신재헌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곧바로 이해했다.

이 동네는 핸드폰이나 인터넷이 있기는커녕 TV나 라디오도 없는 동네였다.

대기 탔다가 일제히 한 번에 게이트에 들어가는 발상은 좋다.

하지만 ‘출발!’ 사인을 어떻게 전국적으로 줄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물론 난 그 해답을 이미 생각해둔 뒤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우리에겐 마탑이 있잖아요]

난 소예리 헌터를 돌아보았다.

“응? 나?”

나랑 눈이 마주친 소예리 헌터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듯했다.

마탑 불새 있잖아, 그거!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내가 전서구 역할 하라는 거죠?]

물론 전국의 모든 영지에 불새를 날려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요 영지 몇 군데만 연락할 수 있으면 충분했다.

어차피 같은 영지 내에서는 하루 안에 연락이 다 닿는다.

게다가 근처의 큰 영지에서 다른 영지에 연락을 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렇다면?

미리 연락을 약속한 주요 영지에 마탑의 연락이 성공적으로 닿는다면, 하루 내로 약속한 모든 팀이 게이트에 한 번에 입던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눈치빠른놈2)>>> 그런데 그 정도로 협동이 가능할까요?]

그때 주이안 씨의 걱정스러운 질문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건 자신 있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네]

딜러의 확신엔 다 뜻이 있느니라.

조용해진 채팅창에 난 말을 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가장 게이트 경험 많은 수호기사단장의 계획인데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황제에 교황에 마탑주까지 동의하면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는데?]

이럴 때 쓰라고 있는 이름값 아니겠습니까?

짜릿한 권력의 맛 한번 볼래?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럼 확실히 이쪽엔 한순간 게이트가 확 비어서 쉴 시간도 생길 것 같고]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눈치빠른놈2)>>> 그동안 동제국은 정신없어지겠군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오]

다들 구미가 당기는 기색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어때어때 좋은생각이죠?]

어차피 클리어할 때 게이트 장악도는 동제국보다 60% 이상 높아야 한다.

이렇게 넘기고 받길 반복하면서 핑퐁하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게이트를 한 번에 싹 넘긴 채로 클리어한다면?

최고 등급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그럼 그 사이에 해야 할 게 있는데]

뭔데? 나랑 소예리 헌터의 눈이 마주쳤다. 신재헌의 채팅이 연달아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동제국 황태자 옆에 사람 붙여야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오]

그러게? 정신없을 때 사람 한 명 끼워 넣어 놓으면 좋겠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눈치빠른놈2)>>> 아]

주이안 씨도 뒤늦게 반응했다.

며칠 정신없었지만 잊을 리가 없었다.

동제국 황태자가 누구의 목숨을 노렸는지.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기회 봐서 언제든 목을 칠 수 있게]

살벌한 말이었지만 나도 공감이었다.

물론 주이안 씨는 반대하고 싶을 거다. 자신의 일보다 파티의 일을 우선시하는 그이기에.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눈치빠른놈2)>>> 그런데 동제국 황태자의 목을 치면 던전을 클리어하기 전에 동제국이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저럴 줄 알았다.

하지만?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럼 클리어 직전에 처리하자]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그래서 한동안은 살려두려고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RP 끝내기 전에 패면 되지]

우리의 채팅이 동시에 올라왔다.

―짝!

눈이 마주친 나와 소예리 헌터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주이안 씨의 힐러 뇌로는 떠올리지 못할 발상인지 그는 답이 없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눈치빠른놈)>>> 그러니 일단 목부터 손 안에 넣고 생각하죠]

캬, 신재헌 일 처리 깔끔하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와 설렌다;]

복수는 확실하게 해야지. 안 그래?

저쪽 황태자를 뚜까 팰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들뜨는 것 같았다.

***

신재헌은 암행에 여러 번 다녀온 뒤 바빠진 상태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카르만 제국의 황제.

쓸데없이 거창한 직책을 맡게 된 덕이다.

하지만 그가 황제란 자리를 싫어하는가와는 별개로, 그에게는 황제가 잘 맞는 듯했다.

일단 업무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정무를 보면서도 한쪽에 헌터 채팅을 켜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채팅이 올라오면 반응도 곧바로 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일 처리가 느려지는 것도 아니라, 그는 며칠째 빠르게 일을 끝내고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었다.

“흐음.”

근래 왜 이렇게 집중이 잘 되나 했더니.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그랬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이마를 꾹꾹 눌렀다.

“하,”

참으려고 해도 더운 숨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이가 없게도 그랬다.

그가 일하던 것도 그만두고 두 시간째 보고 있는 건 신유리의 한 마디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와 설렌다;]

그 말에 평소처럼 웃어야 했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순간 심장이 쥐어짜이듯이 눌려서.

더운 날씨도 아닌데 유독 주변이 더워지고 한 가지 생각만 나는 건 제 탓이 아닐 터였다.

“…….”

아니, 온전히 제 탓일 터였다.

그저 가볍게 한 말인 줄 알면서도, 제게 한 말임을 알기에.

신유리가 제게 한 말임을 알기에.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어도 과민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설레요?]

그는 이렇게 되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이마를 짚은 그가 고개를 숙였다.

“미치겠네.”

한번 자각하고 나니까 안달이 나.

자꾸 보고 싶잖아.

자꾸 듣고 싶잖아.

“설레?”

정말로? 내게? 아니면 다른 것에?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 속에서 단 하나 확실한 생각은 이거였다.

다른 놈에게도 그런 말을 할까?

그의 입매가 뒤틀렸다. 그는 간절히 원했다.

저 달콤한 말이, 자신에게만 향하는 말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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